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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신성국] 전쟁의 교회와 뮈텔의 후계자들 2015년과 1919년 교회는 무엇이 달라졌나 신성국 신부 2015-11-10 1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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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일본 가톨릭 중앙협의회 복음화선교 연구실 엮음) 이 책은 일본의 침략 전쟁 시기에 일본 가톨릭은 어떤 입장이었는가를 소상히 정리한 일본 주교단의 고백과 참회의 반성문이다. 이 책은 한국과의 관계도 자세히 기술하고 있어 중요한 자료도 제공하고 있다. 


또한 오늘날 한국 교회의 고위성직자들이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와 현실 문제에 왜 침묵하고 방관하는지 그 원인도 엿볼 수 있다. 뮈텔 주교 일기를 통해서는 한국교회가 철저한 친일 부역자의 교회였음을,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통해서는 한일 양국의 가톨릭교회가 침략 전쟁의 후견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은 성직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깨어있는 민중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심을 깨닫게 된다. 민중들 속에 살아계시는 하느님 안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왜 일본 가톨릭교회는 전쟁의 교회였음을 고백하며 사죄하였는가?


청일 전쟁(1894년)과 교회 – 일본과 청나라가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서 싸운 전쟁이 청일전쟁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요동반도와 대만 등지를 청나라로부터 빼앗아 식민지화하는데 성공하였다. 일본 가톨릭교회는 전쟁 승리를 기원하는 미사를 봉헌한 본당들이 있었다. (『일본 그리스도교 敎史』 286쪽)


당시 일본의 총리는 이토오 히로부미였다. 일본 정부는 동학 농민군에 대한 학살지령을 내렸다. “동학난에 대한 조치는 엄렬함을 요구하니 모조리 살육해야 한다” 일본군은 청일 전쟁 중에 동학농민 10만 명을 무참하게 학살하였다. 뮈텔 주교일기에서 동학 농민군의 수를 5만에서 10만 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일본정부의 지령대로 동학농민들은 모조리 살해된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여순 법정에서 이토오 히로부미의 15가지 악행 중에서 10만 명의 조선인을 학살한 죄악도 포함시켰다.


▲ 안중근은 10월 26일부터 11월 1일까지 할빈주재 일본총령사관 지하실에 감금되어있었다.


러일전쟁(1904년)과 교회 – 일본과 러시아가, 만주와 조선의 지배권을 얻고자 해서 일으킨 전쟁이 러일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해서는 독점적인 지배권을 얻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가톨릭교회는 전쟁을 지지하였고〔주전론主戰論〕 우치무라 칸조와 카시와기 기탄 등 개신교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이 전부가 아니라는 주장〔비전론非戰論〕을 펼쳤다. 가톨릭교회는 종군從軍을 위한 의연금을 모집해서 전쟁에 협력했다고 알려지고 있다.(고노이 타카시, 『일본 그리스도교사』 289쪽)


한일 강제 합병(1910년)과 교회 – 일본은 1910년 무력으로 대한 제국을 식민지화했고, 대한 제국이란 이름을 세계 지도상에서 지워버리고 말았다(한일 강제 합병). 일본 교회는 합병에 대한 어떤 입장이었는가? “그들이 이 세상에서 학수고대하던 신도의 자유는 한일 합방으로 완전히 얻게 되었다”(쿠스다 후사부로오, 《조선 천주교사》 292쪽) 


일본 교회는 조선 천주교 신자들이 한일합방 덕분에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고 주장하였다. 나라를 빼앗겨 36년간 고통 속에 신음하는 민족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교회가 보호받고 신앙의 자유만 누리면 된다는 궤변은 실로 치욕스럽다. 일본 가톨릭교회는 자국이 저지른 불의한 침략과 지배를 모두 정당화시켰으니 전쟁의 후견인이었다.  


3·1운동과 교회 – 1919년 3월 1일, 경성(서울)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은 조선 전역에 걸쳐 번져나갔다. 일본 군대에 의해서 2개월 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이 독립운동에 대해서 타구키 호오고로오 신부(후에 추기경에 서임)는 “이전 조선에서 만세 소동이란 불령한 사건이 일어나 많은 조선인들이 여기에 휩쓸려 큰 소동을 빚었지만, 이 많은 참가자들 중에 가톨릭 신자는 단 한사람도 없었다”(타구치 호로고로오, 『만주 제국과 가톨릭교』 204쪽) 


독립 운동 참가자 중에 천주교 신자가 한사람도 없어서 다행스럽다는 일본 추기경의 증언은 민족을 배반한 종교로서 자랑스럽다는 말이 아닌가.  


일본의 식민지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온 국민이 독립 만세 시위에 나섰을 때 한국 가톨릭교회는 어떤 입장이었는가? 서울교구 뮈텔 주교와 대구대목구 드망주 주교는 천주교회 신자들이 삼일 만세 운동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뮈텔 주교 일기는 우리를 부끄럽고 슬프게 한다. 3·1운동 직후 서울 용산 신학교 신학생들이 만세 운동에 동참하겠다고 하자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그들은 나를 붙잡고 나라가 이렇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울기도하고 발을 구르기도 하고 정말로 무서운 모습이었다. 마침내 그들에게 질서를 지키도록 간청했고,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차라리 신학교를 떠나라고 했다”


결국 몇 명의 신학생들은 만세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신학교를 떠났다. 뮈텔 주교는 징계 처분으로 1919년에는 서품식을 거행하지 않았다.  


대구 대목구의 드망주 주교는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1919년 3월 5일 저녁, 대구 대목구의 성 유스티노 신학교 신학생들은 신학교 운동장에서 독립을 위한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한 미국의 윌슨(W. Wilson)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고 3월 9일 시내에서 행진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드망주 주교는 3월 9일에 신학교를 방문하여 신학생들에게 만세 운동에 참여하지 말 것과 참여할 경우 신학교를 폐쇄할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신학생들은 주교에게 복종하겠다고 약속했고, 만세 운동 참가는 무산되었다. 


신학생들은 우리 동족이 나라를 빼앗겨 고통 속에 있는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워서  발을 동동 구르며 만세 시위에 참가하고 싶다고 애원했지만 주교는 끝내 거부하였다. 행동에 나선 신학생들은 모두 신학교를 떠나야 했고, 그들은 결국 사제를 포기해야 했다. 


2015년과 1919년 교회는 무엇이 달라졌나? 고통당하는 국민들을 외면하기는 여전하다. 교구마다 사회복지 시설을 운영하는 것으로 자족한다면 크나큰 착각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박근혜 일당들이 역사 교과서 국정화 추진으로 독재국가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며 학생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피켓을 들고 반대 시위를 하고 있는 데 고위 성직자들은 침묵하고, 아무런 반응도 없다. 


96년 전, 1919년 뮈텔과 드망주 주교가 신학생들에게 독립 운동에 참가하면 신학교를 떠나라, 누구도 참가해선 안 된다는 금지령을 내린 그 태도와 무엇이 다른가? 


세상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민을 품고 행동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에게서 왜 그들은 배우질 못하는가? 뮈텔의 후계자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필진정보]
신성국 : 마리스타 교육수사회 파견사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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