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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에 세월호 십자가 세워
  • 최진 기자
  • 등록 2015-08-05 11:23:32
  • 수정 2015-08-05 17:4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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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주검이 가족들에게 돌아온 팽목항 광장에 세워진 십자가. 6개의 구멍과 노란 리본, 세월호가 형상화됐다.


정의구현사제단은 3일 세월호 현장을 지키기 위해 팽목항에 십자가를 세우고 봉헌미사와 축성식을 가졌다.


정의구현사제단과 최병수 현장 미술가는 이날 세월호 참사의 상징성을 기리고 희생자들을 기억하자는 뜻으로 세월호 십자가를 팽목항 광장에 설치했다.


봉헌미사는 17명의 정의구현사제단 사제들의 공동 집전으로 거행됐으며, 폭염주의보에도 불구하고 50여명의 평신도와 수도자, 그리고 세월호 유가족들이 참석해 팽목항 성당을 가득 채웠다.


세월호 십자가가 세워진 팽목항 광장은 세월호 참사 당시 시체를 검안하였던 장소로, 합동 분양소 인근이다. 이곳을 통해 희생자들은 주검이 되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세월호 참사의 시대적 아픔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십자가는 다듬어지지 않은 듯한 거친 십자가 형상에 예수의 못 박힘을 표현한 3개의 구멍과 세월호 참사를 상징하는 3개의 구멍 등 모두 6개 구멍이 뚫려 있다.


십자가의 교차점에는 희망을 상징하는 노란 리본이 달렸으며, 세월호가 그 리본 위에 걸려있다. 십자가의 높이는 약 3미터 정도로, 3장의 철판을 붙여 제작했다.


세월호 십자가를 만든 최병수 작가는 “2000년 전 예수가 죽을 때는 십자가에 구멍이 3개였다. 그러나 부활한 예수를 세월호 사건이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구멍이 6개가 됐다”라고 설명했다. 예수의 십자가형을 상징하는 큰 구멍 3개 바로 옆으로 작은 구멍이 하나씩 더 뚫려있다.


한 때 목수 일을 했던 최 작가는 1980년대 이한열 열사의 대형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를 제작한 현장미술 작가다. 90년대부터는 인권과 노동, 환경 문제 등을 주로 다루고 있다.


그는 작년 한 해 동안 세월호 참사를 상징할 수 있는 십자가를 구상해 그 내용을 정의사회구현사제단의 전종훈 신부에게 알렸다. 사제단 소식지를 통해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제와 평신도 등 43명이 1,000여 만 원의 성금을 모았다.


정의구현사제단이 팽목항 광장에 세월호 십자가를 세운 이유는 간단하다. 팽목항 현장을 빼앗기고, 그 흔적이 지워진다면 세월호의 진상규명은 더욱 어려워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진도군 팽목항 주민 33명은 지난달 13일 관광객이 줄어 생계가 힘들다는 이유로 항구 주변에 설치된 세월호 유가족 분향소와 추모 리본을 철거해달라고 국민권익위원회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팽목항에 상주하면서 팽목항 성당을 지키고 있는 전종훈 신부(서울대교구)는 “용산 참사 현장이 사라지고 나서 참사에 대한 활동은 메아리에 불과하게 됐고, 이제는 그 메아리마저도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면서 세월호 참사도 똑같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지난 2009년 용산 재개발 보상 문제로 철거민과 경찰이 충돌하여 6명의 사망자와 23명의 부상자를 낸 용산 참사는 철거가 완료되면서 참사와 관련한 흔적이 모두 사라진 상태이다.


전 신부는 팽목항이 “아무것도 모르고 죽어간 우리 아이들과 희생자들의 피눈물과 피울음소리가 있는 장소”라며, “세월호 사건은 쉽게 진실이 밝혀질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에 현장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동안 고독한 싸움을 진행하면서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구나’라는 철저한 패배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세월호 진실은 예수님의 십자가 길과 같이 어렵고 힘든 시간이 남아있더라도 십자가의 믿음처럼 저버릴 수 없는 희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는 세월호 유가족. 희생자들의 구멍 난 가슴을 잊지 말고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다.


봉헌미사의 주례와 강론을 맡은 정의구현사제단 대표 김인국 신부(청주교구)는 ‘열풍과 함께 소비되어버린 프란치스코 교황의 정신’을 안타까워하면서, “예수님의 두 손 두 발이 못 박힌 그 자리에 아이들의 손발이 박힌 못 자국을 더한 것이 세월호 십자가다”라고 그 의미를 풀이했다.


그는 “가장 착하고 가장 깨끗하였으므로, 가장 악하고 더러웠던 죄악의 먹잇감이 된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었다”며,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 역시 악한 시대에 희생되었다는 점에서 우리 아이들은 십자가의 주인공들임에 틀림없다”고 말했다.


또한 “십자가는 실패의 상징이 아니라 부활의 단서이며 승리의 근거이자 희망의 보증이기 때문에 십자가 봉헌이 슬픔에 빠져계실 부모님과 유가족들에게 부활의 위안이 되고 또한 희망과 힘을 나누는 은총의 십자가가 되길 바란다”고 봉헌 미사에 참석한 유가족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했다.


김 신부는 “우리 모두에게 세월호 십자가는 고난의 다짐이어서, 세월호 십자가는 모르진 않지만 슬며시 피하고 싶은 오늘날의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게 해주는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십자가의 실체는 부활이기 때문에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헛된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허기와 갈증을 달랠 수 있는 것이 십자가”라며 “여기 계신 여러분들이 끊임없이 찾아오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나누는 끈이 끊어지지 않는 한, 세월호의 진상은 낱낱이 밝혀질 것이고, 피눈물로 얼룩진 가족들의 마음에 위안이 될 것이다”며 강론을 마쳤다.


세월호 희생자 박성호 임마누엘의 어머니 정혜숙 세실리아는 세월호 십자가 축성식에서 “4월 16일 아이들이 주검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이곳 팽목항에 십자가를 만들어주어 감사하다”며, “시대의 고통을 지나치지 않고 불을 밝혀 주는 여러분들이 저에게는 그리스도의 희망으로 다가온다”고 말했다.


그녀는 “사람을 통해서 하느님이 일하시는 것을 느꼈다”며, “여기 십자가에 세월호의 또 다른 작은 구멍을 만들어 주셨는데, 우리 아이들 모두와 무고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구멍 난 가슴을 잊지 말고 기억하고 함께해 달라”고 부탁했다.


전종훈 신부는 세월호 십자가가 세워진 팽목항 광장이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공간, 그냥 들렸다가 가는 곳이 아니라 머무르고 추모하고 새로움을 다지는 공간으로 만들어질 수 있도록 주변에 널리 알리고 협조해 달라”고 부탁했다.


정의구현사제단과 최병수 작가는 희생자 추모 가공석, 노란 돌 모으기 등을 통해 팽목항 광장을 ‘부활의 광장’으로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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