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빕니다.
제주에 오면, 그 특별한 아름다움에 매번 경탄하게 됩니다. 그리고 강정에 오면, 그 아름다움에 대한 폭력의 무자비함과 비인간성에 경악하게 됩니다. 오늘 마태오 복음서 구절을 여기 강정에서 들으니, 이 구절이 그 폭력, 다시 말해서 "힘"에 대해 생각하자고 초대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당시의 기성 종교가 말하는 것은 듣되, 그 실천은 본받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종교가 포장으로만 기능하고, 그 속의 알맹이는 비어있다는 것과, 살아계신 하느님이 이 땅에 발생하기 위해서는, 알맹이인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쉽게 오해하게 만드는 표현이 "전능하신" 하느님이라는 말인 것 같습니다. 온 우주를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또 자비로 구원하시는 절대자를 이르는 말입니다만, 흔히 그렇듯이, 언어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곡해되고 왜곡되어서, 하느님을 "힘 있는" 분으로 그래서 우리가 모두 "힘"을 추구해야 하는 것으로 은연중에 알아들을 여지가 있는 것이죠. 여기서 힘은 오늘날 가장 강력한 힘을 행사하고 있는 돈. 이라는 말로 바꿔놓아도 될 것입니다.
어쨌든, 결국 힘이 있는 곳으로 사람들이 모이게 됩니다. 여기에는 서열이 생깁니다. 위와 아래. 힘을 더 가진 쪽과 힘을 덜 가진 쪽. 더 강력한 힘을 지닌 편과 그렇지 못한 편으로 구분 또는 차별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런 힘의 편중은 고착화되기 마련이어서. 힘을 더 가진 쪽은 이제 자신만의 고유한 질서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유지하는 데에 힘을 기울이게 됩니다. 여기에는 인간과 생명의 가치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힘이 중요하고, 돈이 중요하게 됩니다. 혹은 더 강한 힘과 더 많은 돈이 중요해 집니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무엇보다 먼저 이야기들의 뿌리, 원체험이 바로 히브리 노예들의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성서는 힘 있는 쪽의 이야기가 아니라, 힘없는 이들의 만난 그 어떤 진리체험의 이야기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유대교는 바로 그 체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유대교는 힘없는 자들의 여정에서 발생한 하느님체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유대인들도 떠돌이 신세에서 벗어나 땅을 차지하고 국가를 건설하자, 더 큰 힘, 세속적인 힘을 추구하면서, 본래의 야훼 체험을 놓치게 됩니다.
그리스도교의 언어도 힘없이 처형당하신 평신도 청년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왕. 또는 왕국이라는 세속적 언어로 그 사건을 표현하고 해석한다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나타난 믿는 이들의 공동체는 결국 로마제국 안에서 힘과 기득권을 갖게 되었고, 급기야는 자신만의 강력한 군대를 갖게 되었고, 살육을 벌였습니다. 설교는 십자가의 언어, 힘없는 자들의 구원의 언어였지만, 실천은 극히 세속적인 것이 되고 말았고, 하느님은 증발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어떤 하느님을 믿고 어떤 하느님을 찾고 있나요? 오늘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하느님을 살고. 있습니까? 하고요. 당신이 말하는 전능하신. 하느님은 어떻게 발생합니까?
힘이 있는데, 힘을 추구하고 또 유지하려고 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을 위선…이라고 부릅니다. 돈이 많이 있는데, 돈을 추구하고 있는데, 돈에 신경 쓰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 때, 바로 그것을 거짓 예언자라고 일컫습니다. 온갖 수단으로 서민들에게서 세금을 강탈해 가면서, 증세가 아니라고 말하고, 대기업들에게는 오히려 어처구니없이 많은 혜택을 줄 때,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한다고 말하면서, 304명의 생명이 바다에 수장되는 것을 수수방관할 때, 통일은 대박, 평화로운 남북교류를 말하면서, 핵잠수함이 들어올 수 있는 군사기지를 건설할 때, 그것을 거짓 정권, 살인정권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교회는 어떤가요? 우리는 어떤 실천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실천은 하느님을 발생시키고 있습니까?
작년 여름, 교종 프란치스코의 방한으로 남한은 신자 비신자를 막론하고 어떤 알 수 없는 열정에 들떠있었습니다. 시장과 거리에서는 비신자이면서도 교종의 실천을 말하고 그 실천에 매혹되었다고 고백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지요.
교종께서 한국을 떠나신 후에, 주교님들과 신부님들의 강론대에서는 "교황 프란치스코께서 이렇게 하셨다, 저렇게 말씀하셨다, 그분은 참으로 친절하고 겸손하신 분이시다, 모두 그분을 본받자, 한 말씀 써주십사 하고 굉장히 큰 종이를 드렸는데 아주 작은 글씨로 서명만 하셨다." 등의 말씀을 꽤 자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말은 무척이나 많았지만, 실천은 어땠나요?
제가 그리고 꿈꾸는 실천은 이런 것입니다.
교종을 태운 비행기가 활주로를 떠납니다. 기내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고통 앞에는 중립이 있을 수 없다는 답변을 하실 그 때, 공항에 환송을 위해 모여 계시던 주교님들께서 느끼신 바 있어, 긴급한 임시주교회의를 엽니다. 그리고 회의 결과 단순하지만 결연한 성명서를 사람들에게 공표합니다.
한국천주교회의 모든 신자 분들과 한국의 모든 민중께 무엇보다 먼저 사과와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가장 가난하고 힘없고 고통 받는 이들이 곧 하느님의 현존이라는 복음의 가르침을 말만하고 실천하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극심한 사회양극화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관심을 갖지 못했고, 오히려 비정규직 문제를 만든 적도 있으며, 용산참사, 세월호 참사, 쌍용차 사태, 밀양 사태 등 수많은 민중의 고통 속으로 교회가 적극적으로 투신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오히려 교회의 양적인 확장과 더 많은 힘과 기득권을 얻고 지키는 데에 집중했던 것에 대해, 교회가 진정 하느님의 교회로서 실천하지 못했음에 대해, 용서를 청합니다.
이에 다음과 같은 실천을 하겠습니다.
1. 우리가 타고 있는 고급 승용차들을 모두 포기하고, 소형차로 바꾸며, 가능한 한 직접 운전하고, 또 대중 교통수단을 우선 이용하겠습니다.
2. 우리가 갖고 있는 골프채를 팔 것이고, 모든 신부님들의 골프채도 포기해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기금으로 쓰겠습니다. 앞으로 부유한 이들과 어울리기보다, 기득권층이 찾기를 꺼리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겠습니다.
3. 적어도 교회기관과 교회 재단이 운영하는 시설 안에서는, 노동착취와 고용불안정을 척결하겠습니다.
4. 교회의 재정에 관해서까지 성직자들이 권한을 갖지 않고, 평신도 전문가들에게 일을 맡겨서 더욱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운영되게 하겠습니다.
5. 더 이상 교회의 외적인 확장 등에 마음 쓰지 않고, 오히려 우리 모든 성직자들은 모든 권위주의와 힘을 포기하고, 금권을 멀리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든 존재의 생명과 평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겠습니다.
6. 마지막으로, 제주강정이 전쟁과 권력투쟁이 아닌, 평화의 상징이 될 때까지, 세월호 참사의 진상이 완전히 밝혀질 때까지, 우리 주교단은 끝까지 투신하고 동반하겠습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적 실천이 아닐까요? 이것이 힘이 전혀 없기에 비로소 사랑에 전능하신 그런 하느님을 발생시키는 실천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거짓과 비리, 착취와 억압으로 얼룩진 이 나라 이 땅을 진정 복음화 시키는 실천이 아니겠습니까?
박근혜정부와 집권 새누리당은 들으십시오.
이제는 거짓과 부패의 누더기를 벗고, 진실의 옷을 입으십시오.
더 큰 힘에 빌붙어 자기 권력의 유지 강화하는 일에만 몰두하지 말고, 전 민중의 평화적 생존권을 최우선 과제로 삼으십시오. 돌들이 외치는 소리와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하리라는 진리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신비롭고 아름다운 구럼비는 이제 파괴되어서 더 이상 아이들과 함께 숨을 쉬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들 가슴 속에 뛰는 심장까지 파괴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의 평화로운 삶까지 멈출 수는 없습니다. 이미 인간의 손에 의해 돌아가신 하느님을 우리들의 가슴과 삶 안에서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을 수는 없습니다.
진정 살아계시고 그래서 전능하신 주님의 영이 우리의 여정을 이끌고 계시니, 복음의 길을 끝까지 걸어갑시다.
아멘.
임 루피노 : 작은형제회 소속으로 서울에 살고 있으며, 수도생활을 재미있게 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