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2026.06.20)
: 2역대 24,17-25; 마태 6,24-34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은 한처음에 창조주 하느님과 함께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주체 즉 생명의 주인으로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당신의 자유와 같은 속성을 지닌 자유를 선사하셨기 때문에, 선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악으로도 기울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는 인간 자유를 염두에 두시고 스스로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통하여 당신께 나아 오기를 바라셨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유의 본질입니다. 인간의 자유가 사탄의 유혹에 빠져 악으로 기울면, 가치 질서가 흐트러져서 영혼보다 정신을, 정신보다 육신을 더 귀하게 여길 수도 있고, 영원한 생명보다 현세적 생명에 필요한 것만을 찾을 수도 있음을 예수님께서는 잘 알고 계셨습니다. 심지어 오늘 독서에서 들으셨듯이, 권력 다툼으로 살인을 자행하고 분쟁을 자초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합니다. 그런데 목숨에도 질서가 있습니다. 바로, 몸과 마음과 영혼입니다. 몸이 생명력을 유지하는 수명만큼 우리네 인생의 기간이 정해지는 것은 분명하고 사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져 있는 운명입니다. 하지만 몸에 달려있는 두뇌의 정신 작용도 중요해서 이에 따라 마음이 정해지는데 이 마음이 몸을 움직입니다. 양심도 자유도 몸을 움직이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이 마음이 편안하면 몸도 편안하고 마음이 괴로우면 몸도 힘들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이것입니다. 흔히 세상 사람들은 몸과 마음으로만 목숨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목숨의 핵심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혼이 있다는 것이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인간에게 고유한 이 혼의 생명력이 마음도 움직입니다. 인간의 혼은 하느님의 영을 받아 소통해야 비로소 생기를 얻습니다. 영혼이 생기를 얻어야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서 목숨이 우리네 삶을 인간다운 품격을 발휘합니다.
또 목숨도 소중하지만 그 목숨을 지어내신 하느님은 더 소중합니다. 하느님의 영이 목숨을 살아있도록 생기를 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계시해 주신 하늘의 질서요 생명의 근본이며 따라서 가장 근본적인 힘이요 뜻이기 때문에, 이것을 먼저 찾으면 나머지는 가치 질서가 바로 잡혀서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잡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런 가르침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또 세상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성찬례를 제정하여 남겨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찬례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몸을 사랑의 희생으로 봉헌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동시에,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일을 계승함으로써 우리도 사랑의 희생으로 봉헌하기를 행하라는 유산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성찬례의 배경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두 주인을 섬겨온 쓰라린 죄악의 역사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겉으로는 하느님을 섬긴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특히 정치와 종교의 엘리트들은 권력과 재물을 탐하며 분쟁을 일삼고 툭하면 정적을 죽이거나 백성을 억압하며 종으로 부렸습니다.
“그들은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겼다.”(2역대 24,18)는 오늘 독서의 진술이 이런 죄악을 겨냥한 대목입니다. 그러니 두 주인을 섬기지 말고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라는 단호하게 권고하시는 예수님의 심중에는 지난 천여 년 간 저질러진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역사적 교훈이 단단히 담겨져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역대기를 포함한 구약성경의 역사서들은 대부분 예언자들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들은 타락해 가는 왕실과 지도자들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일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정치 및 종교 엘리트들은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남쪽 유다 왕실이나 북쪽 이스라엘 왕실이나 똑같이 경쟁하듯이 타락해 갔던 그 죄과가 바빌론 유배로 나타났으며, 그 후에도 사정이 별로 나아지지 않자 그리스계 왕조에 이어 로마의 지배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배 엘리트들의 죄악과 시행착오를 예언자들은 빠짐없이 기록해 놓았고, 이것이 오늘날 구약성경의 역사서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역사서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역사적 경험에 따라 쓰여졌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후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겪은 과정은 여호수아기에 담겨 있고, 가나안에서 왕정을 수립하기까지 겪은 과정은 판관기와 사무엘기 상권에 적혀 있으며, 다윗 임금 치세에 이스라엘 역사가 이루었던 황금기에 대해서는 사무엘기 하권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에서 왕국의 분열을 거쳐 기원전 587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바빌론으로 유배를 당하기까지 겪은 과정은 열왕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독서인 역대기는 바빌론 유배 이후 독립된 왕국을 수립하지 못한 채 정체성을 상실하고 살아가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고자 쓰여진 역사서입니다.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도 비슷한 연대의 역사를 기술해 놓고 있습니다. 역대기에서 굳이 아담에서부터 시작되는 족보를 기록해 놓은 것이나 유배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잊어버린 사실 즉 전성기 이스라엘의 통계를 덧붙여 놓은 것, 그리고 신명기 이래로 하느님께서 성전과 예배에 관해 구체적이고도 직접적으로 지시해 놓으신 것들을 기록한 연유도 신앙과 민족의 정체성을 회복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언자들이 역사서들을 편찬하면서 지배 엘리트들의 죄악상을 남김없이 기록해 놓았다면, 흔히 ‘아나빔’이라고 불리우는 이름없는 민초들이 지배 엘리트들의 억압과 수탈을 당하면서 하느님께 탄원하고 속죄하면서도 찬양과 감사를 드린 기도는 시편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150편에 이르는 이 기도의 시들은 같은 시대를 살면서 소통해 온 예언자들의 예언서와도 쌍벽을 이루는 한편, 지배층의 죄악상과 대비된다는 점에서 역사서들과도 쌍벽을 이룹니다.
그러니까 구약성경을 전체적으로 균형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서와 예언서 그리고 율법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시편을 비롯하여 민중의 지혜가 담겨 있는 지혜문학을 아울러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평균적인 유다인들은 역사서와 예언서 및 율법서뿐만 아니라 시편에 대한 이해가 매우 깊은 편이었습니다. 예수님만 하더라도 십자가에 못 박혀 숨지시는 극도의 고통 속에서도 시편을 암송하시면 숨을 거두실 정도였습니다.
시편은 기도의 백과사전과도 같습니다. 시편에는 하느님을 찬양하고 흠숭하는 기도를 비롯하여,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감사드리는 기도, 우리가 저지른 죄에 대한 용서를 비는 속죄의 기도 그리고 온갖 필요한 것들을 청하는 기도가 빠짐없이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기도의 공리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그분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걱정에서 청하는 일은 그 다음 순위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맨 먼저 우리가 바쳐야 할 기도는 찬양과 흠숭 기도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에 대해서 그분께 찬양과 흠숭을 드리는 자세는 피조물인 인간에게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 영광송이 모두 이 찬양과 흠숭을 드리는 기도를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바쁠 경우에는 영광송만 드리거나 주모경만 드려도 훌륭한 찬양 기도가 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바쳐야 할 기도는 감사 기도입니다. 찬양과 흠숭을 드리는 목적이 우리의 생명을 거저 주신 데 대한 우리의 도리라면, 그 생명이 살아갈 수 있도록 건강과 기회와 능력 등 모든 은총을 주신 데 대해서는 우리가 감사를 드리는 것이 마땅한 우리의 도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감사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바쳐야 할 기도는 속죄 기도입니다. 찬양과 흠숭 그리고 감사를 드려 마땅한 우리가 나약한 의지나 여러 유혹에 빠져서 하느님께 죄를 짓고 사는 데 대하여 우리가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가 상처를 준 이웃들에게 대해서도 용서를 청하는 것도 이 속죄 기도에 포함됩니다. 죄를 저질렀을 때, 이웃에게 용서를 청하지 않고 스스로 하느님 앞에 뉘우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그 또한 상처받은 이웃을 다시 상처주는 죄의 행위입니다.
네 번째로 우리가 바쳐야 할 기도가 청원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청원을 하셔야 할 상황에서도 먼저 감사의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오천 명도 넘는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실 때에도 그러하셨고,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실 때에도 먼저 감사를 바치셨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은 이 기도의 순서를 거꾸로 하곤 합니다. 먼저 청원을 드려서 들어지면 감사를 하겠다는 식의 태도는 거래이지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청원은 자기의 이기적인 복을 졸라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바라는 것입니다. 단지 그를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몫을 감당하겠다고 청원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과연 어떤 지향으로 청원 기도를 바치셨는지를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의 종류와 순서를 정리하고 보면, 백 번의 청원 기도보다 한 번의 속죄 기도가 더 낫고, 백 번의 속죄 기도보다 한 번의 감사 기도가 더 나으며, 백 번의 감사 기도보다 한 번의 찬양 기도가 더 낫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개 우리가 절박한 청원이 생겼을 경우, 이미 하느님께서 알고 계시기 때문에 찬양이나 감사의 기도만으로도 대개 청원의 기도는 들어지는 수가 많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데에도 믿음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