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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다시 인간을 묻다
  • 지성용
  • 등록 2026-05-01 12:5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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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제공 = 백악관 (Official White House Photo by Molly Riley)



인류의 학명은 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에서 끝나지 않고,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로 한 번 더 반복될까. 라틴어 sapiens는 ‘지혜로운’, ‘분별하는’, ‘아는 존재’를 뜻한다. 직역하면 “지혜로운 인간, 더욱 지혜로운 인간”이다. 단순한 생물학적 명칭처럼 보이지만, 이 이름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이 숨어 있다. 인간은 단지 생존을 위해 진화한 존재가 아니다. 배고픔을 해결하고, 추위를 피하고,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만으로 인간은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이라면 다른 동물들도 이미 해내고 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것은 두 번째 사피엔스다


첫 번째 사피엔스가 감각의 세계를 살아낸 존재라면, 두 번째 사피엔스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상상한 존재다.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말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계획하며, 죽은 이를 기억하고, 태어나지 않은 세대를 걱정하는 능력. 정의, 자유, 사랑, 희망 같은 비가시적 가치를 위해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존재. 바로 그것이 인간이다. 우리는 눈앞의 빵만으로 살지 않았다. 정의를 위해 싸웠고, 자유를 위해 희생했으며, 사랑을 위해 삶을 바쳤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나는 왜 사는가. 고통은 왜 존재하는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들이 종교를 만들었다. 종교는 인간의 불안을 달래고, 공동체를 결속시키며, 윤리와 자비를 가르쳤다. 수도원은 문명을 지켰고, 사찰은 마음의 평화를 가르쳤으며, 성당과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인간이 짐승으로 추락하지 않도록 붙잡아 준 힘 가운데 하나가 종교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종교는 언제나 빛만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진리를 독점하려 할 때 종교는 폭력이 되었다. 의식은 목적이 되었고, 권력은 신의 이름을 빌렸으며, 맹신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역사는 십자군과 종교전쟁, 이단 심문과 박해, 차별과 혐오의 기록도 함께 남겼다. 


종교의 타락, 민주주의의 위기


오늘의 세계 역시 그 오래된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 정치의 한복판에서는 종교가 권력을 위한 소품처럼 소비되곤 한다. 트럼프는 자신을 구원자처럼 연출하며 신앙의 언어를 정치적 동원 수단으로 사용해 왔다. 지도자가 자신을 메시아처럼 포장하는 순간, 시민은 신도가 되고 민주주의는 변질된다.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숭배하게 되는 것이다. 교황, 레오 14세와의 갈등 역시 상징적이다. 종교의 본래 언어가 평화와 연대, 인간 존엄에 있다면, 권력의 언어는 승리와 복종, 적대의 언어에 기울어져 있었다. 그 충돌 속에서 지금 세계는 묻고 있다. 종교는 권력의 시녀인가, 양심의 예언자인가. 


중동에서는 더욱 비극적인 현실이 펼쳐진다. 네타냐후의 강경한 권력 정치와 지역 패권 경쟁은 중동 전쟁의 악순환을 키워 왔다. 폭격 아래 쓰러지는 아이들, 폐허가 된 도시, 증오를 유산처럼 물려받는 세대들 앞에서 어느 종교도 무죄를 선언할 수 없다. 신의 이름으로 피를 흘리게 하는 순간, 그 신앙은 이미 자신을 배반한 것이다. 종교가 본래의 자리에서 벗어날 때, 위기는 신앙 내부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곧 민주주의의 위기로 번진다. 시민이 스스로 판단하는 주권자가 아니라 지도자를 추종하는 신도가 될 때, 비판은 불경으로 취급되고 토론은 배신으로 낙인찍힌다. 


사실과 이성의 공론장은 음모론과 선동에 잠식되며, 선거는 정책 경쟁이 아니라 구원 서사를 둘러싼 신앙 전쟁으로 변질된다. 권력을 견제해야 할 종교가 오히려 권력을 신성화하는 순간, 민주주의의 핵심인 자유·다원성·책임정치는 무너진다. 종교가 인간을 해방시키지 못하고 맹목적 복종을 가르칠 때, 그것은 더 이상 구원의 통로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좀먹는 위험한 우상이 된다.


한국 사회도 다르지 않다. 통일교의 정치 네트워크 논란, 신천지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 그리고 극우 개신교 세력의 혐오 선동과 폭언은 종교가 어떻게 공공성을 잃고 진영의 무기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십자가가 사랑의 표지가 아니라 분노의 깃발로 사용될 때, 종교는 사회 통합이 아니라 사회 파괴의 도구가 된다.


대한민국의 새로운 길 찾기


대한민국은 지금 높은 기술력과 낮은 행복감 사이에 서 있다. 경제 규모는 커졌지만, 삶의 의미는 흔들리고, 정보는 넘치지만, 지혜는 줄어들었다. 연결은 많아졌지만 외로움은 깊어졌고, 종교는 넘치지만, 위로와 돌봄은 희미해졌다. 목소리는 커졌으나 자기 성찰은 줄어들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예산의 팽창이나 거대한 종교건물의 확장이 아니다. 디지털 문명의 한가운데에서 인간의 존엄과 삶의 의미를 지켜낼 영성의 확장이다.


영성은 특정 종교나 교단의 전유물이 아니다. 영성은 인간이 자기 욕망을 넘어 더 큰 가치와 연결되는 능력이다. 타인의 고통을 내 일처럼 느끼는 감수성, 눈앞의 이익보다 공동선을 선택하는 용기, 속도보다 방향을 묻는 지혜, 소유보다 존재를 귀하게 여기는 태도다. 영성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더 깊이 책임지는 힘이다. 이미 세계 곳곳에서는 새로운 흐름이 시작되고 있다. 명상과 치유, 생태 감수성, 공동체 회복, 청년들의 의미 탐색, 종교를 넘어선 연대와 봉사, 삶과 죽음을 함께 성찰하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교리의 반복만을 원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삶의 의미를 원한다. 경쟁의 승리가 아니라 존재의 충만을 갈망한다.


AI 시대가 깊어질수록 인간은 더 인간다워져야 한다. 알고리즘이 계산할수록 우리는 더 양심적이어야 하고, 권력이 과장될수록 시민은 더 깨어있어야 한다. 종교가 타락할수록 영성은 더 넓고 깊어져야 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살아남은 종이었다. 이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왜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종이어야 한다. 그 질문을 잃은 사회는 번영해도 공허하다. 그 질문을 회복한 사회만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대한민국의 다음 시대는 경제 성장률만으로 오지 않는다. 기술 혁신만으로도 오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내면의 성숙, 공동선에 대한 감각, 서로의 존엄을 지키려는 시민의식, 그리고 삶의 의미를 회복하려는 영성적 각성 위에서 시작될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의 새로운 길은 더 많이 가지는 길이 아니라, 더 깊이 사는 길이어야 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렸습니다.


[필진정보]
지성용 : 천주교 인천교구 사제, 가톨릭관동대학교 중독재활상담학과 교수, 한국영성심리분석상담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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