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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치제(民治制)를 병행해야 민주주의가 완성된다
  • 이원영
  • 등록 2026-03-27 19:3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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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촛불행동)



한국 현대사의 두 차례 촛불+빛의 혁명은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유례없는 이정표를 남겼다.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의 외침은 단순히 특정 정권의 퇴진을 넘어, "선거날에만 주권자로 대접받고 평상시에는 구경꾼으로 전락하는 대의제가 과연 정당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 함성이 가리키는 방향은 분명하다. 시민이 광장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의 제도 안에서 직접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구조, 곧 헌법의 재해석을 통한 민주주의 재설계다.


아테네의 고전적 지혜와 스위스·미국·대만의 현대적 실험을 통해, 한국이 더 이상 제도 밖의 시행착오에 머물지 않고 '시스템 민주주의'로 나아갈 방향을 생각해 본다.


아테네의 유산 — '추첨'이 민주주의의 본질이었다


흔히 민주주의의 고향이라 불리는 고대 아테네에서 '선거'는 오히려 귀족적이고 과두적인 제도로 간주되었다. 돈 많고 이름 알려진 자들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민주주의의 핵심 기제는 '추첨(Sortition)'이었다.


아테네의 핵심 의사결정 기구였던 '500인 평의회'는 30세 이상의 시민권자 중 추첨으로 선발되었다. 그들은 1년 임기 동안 입법 안건을 준비하고 행정을 감시했다. 평범한 신발 수선공이나 농부가 오늘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하고 내일은 다시 본업으로 돌아가는 구조였다. 이는 "누구나 통치자가 될 수 있고, 동시에 피치자가 될 수 있다"는 민주적 평등의 극치였다. 현대 대의제가 잃어버린 '국민의 얼굴을 닮은 의회'의 원형이 바로 여기에 있다.


스위스·미국·대만 — 대의제의 벽을 넘는 현대적 실험


대의제의 한계를 넘으려는 시도에서 가장 앞선 나라는 스위스다. 스위스는 연방 차원의 국민발안과 국민투표를 헌법에 명문화하여, 의회가 처리하지 못하거나 거부한 사안을 국민이 직접 결정하는 전통을 150년 이상 유지해 왔다. 선출된 의원과 직접민주주의 장치가 상호 견제하며 공존하는 이 모델은 대의제 보완의 가장 오래되고 검증된 사례다.


현대 대의제의 심장이라 불리는 미국에서도 대의제의 결함을 보완하려는 움직임은 치열하다. 특히 캘리포니아, 오리건 등 서부 지역은 20세기 초 부패한 정치 카르텔에 맞서 강력한 '주민발안(Initiative)' 벨트를 구축했다. 의회가 기득권에 막혀 처리하지 못하는 사안을 시민들이 직접 투표에 부쳐 법으로 확정하는 이 시스템은, 주권자가 언제든 '최종 결정권'을 회수할 수 있는 제도적 우회로를 보장한다.


대만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디지털을 통해 민의를 제도화했다. 2014년 '해바라기 운동' 이후, 대만은 유권자의 0.01%(약 2,000명)만 찬성해도 정책 제안을 공식 등록하고 정부의 답변을 강제하는 체계를 만들었다. 'vTaiwan' 같은 플랫폼을 통해 갈등 사안의 공통분모를 찾아내고 이를 정책에 녹여내는 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물론 vTaiwan이 모든 의제에서 성공한 것은 아니다. 노동법 개정이나 에너지 정책처럼 이해관계가 첨예한 사안에서는 정부가 플랫폼의 결론을 외면한 사례도 있었고, 참여자가 기술 친화적 계층에 편중된다는 비판도 꾸준히 제기된다. 그러나 '대화의 판'을 제도화하고 시민의 일상적 참여를 시스템화하려는 시도 자체는 대의제의 '불통'을 돌파하는 중요한 실험임에 분명하다.


한국의 현실 —민의는 어디서 잠드는가


한국은 5만 명 이상의 동의가 있어야 국회의 심의 대상이 된다. 그러고도 결과는 만만치 않다. 21대 국회에서 5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 성립된 청원은 194건에 달했지만, 실제 처리율은 고작 17%에 불과했다. 나머지 80% 이상의 민의는 상임위 캐비닛 속에서 잠자다 임기 만료와 함께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22대 국회 역시 개원 6개월 만에 60건이 넘는 청원이 쏟아졌지만, 처리된 안건은 단 한 건도 없다(0%).


이 수치는 단순히 '국회가 게으르다'는 비판을 넘어, 현행 대의제가 시민의 의사를 흡수할 구조적 통로를 갖추지 못했다는 제도 실패의 증거다. 이래서는 민주주의 구현이 어렵다.


한국형 민치제 병행 시스템 구축: '발안-숙의-결정-실행'의 4단계 순환 모델


한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역동적인 시민 사회를 가졌음에도, 제도적 출구는 여전히 꽉 막혀 있다. 이제는 광장의 함성을 법전 속의 조문으로 바꾸는 장치가 필요하다. 필자는 '4단계 민주주의 순환 시스템'을 상상한다.


1단계: 국민발안 — 강력한 의제 설정


현재의 5만 명 성립 요건은 유지하되, 성립된 안건에 대해서는 국회가 '심사 연기'를 할 수 없도록 법적 강제성을 부여해야 한다. 대만처럼 낮은 문턱에서부터 논의가 시작되는 구조를 지향하되, 한국의 현실에서는 우선 성립 요건의 강제력 확보가 급선무다.


2단계: 추첨제 시민의회 — 대의제의 동맥경화를 치료하다


이 시스템의 핵심이자 가장 혁신적인 장치가 '추첨제 시민의회'다. 이것이 필요한 이유는 국회의 처참한 안건 심의 성적표에 있다.


5만 명을 넘긴 안건을 국회가 6개월 이내에 처리하지 못하거나 처음부터 거부할 경우, 독립적인 추첨제 시민의회로 안건을 강제 회부한다. 또 처음부터 시민의회에 회부할 것을 명시한 안건(가령 개헌, 선거제도 등)도 해당된다.



▲ 2024년 5월 서울에서 열린 시민의회 국제심포지움에서 시민의회입법추진100인위원들이 선언하고 있다. ⓒ 이원영



시민의회는 전국 유권자 명부에서 무작위 추첨으로 선발한 150~200명으로 구성하되, 성별·연령·지역·직업·교육수준 등의 비례를 맞추어 '대한민국의 축소판'이 되도록 설계한다. 임기는 안건별로 3~6개월로 한정하고, 참여 기간의 활동비(일 15~20만 원 수준)와 직장·학업 보호(휴가 의무 인정, 복귀 보장)는 국가가 보장한다.


시민의회는 전문가 패널(법률·경제·행정 등 분야별 10~15명)을 상시 지원받아 복잡한 안건도 충분히 숙의할 수 있도록 한다. 숙의 과정은 4~8주간의 집중 토론(온·오프라인 병행)으로 진행되며, 최종적으로 찬반 투표를 통해 결정을 내린다. 이 결정은 국회에 '구속력 있는 권고'가 아닌, '직접 발의안'으로 자동 상정되는 효력을 가진다. 즉, 시민의회가 찬성 과반(예: 55% 이상)을 얻으면 해당 안건은 국회 본회의에 의무 상정되어 표결에 부쳐지며, 국회가 재거부할 경우 최종 국민투표로 넘어간다.


특히 대의제 민주주의의 가장 고질적인 모순인 선거제도의 셀프입법, 즉 "선수(의원)가 경기 규칙(선거법)을 정하는 현상"은 바로 이 시민의회로 바로잡아야 한다. 정치학계가 '권력의 자기복제' 또는 '카르텔 민주주의'라 부르는 이 병폐를, 어떤 정파적 이해도 없는 추첨 시민이 고쳐낼 수 있다.


3단계: 국민투표 — 최종 결정권의 귀속


시민의회가 제시한 안건이 국회에서 재차 거부되거나 수정·삭제될 경우, 자동으로 전 국민 대상 국민투표에 부쳐진다. 대통령의 국민투표 부의권이 발동되도록 입법한다. 투표 문항은 시민의회가 숙의한 최종 초안 그대로 유지되며, 가령 투표율 30% 찬성율50%이상시 법률로 확정된다. 이는 스위스 모델처럼 대의제와 직접민주주의의 '이중 안전장치'를 작동시키는 단계다.


투표 비용 절감을 위해 온라인 투표 병행(신분 인증 강화)과 우편 투표 확대를 기본으로 설계하면 현실적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


4단계: 실행·피드백·순환 — 민치제의 지속 가능성


법으로 확정된 안건은 정부·지자체가 1년 이내에 이행 계획을 수립·공표해야 하며, 이행률을 시민감시 플랫폼(디지털 대시보드) 을 통해 투명하게 공개한다. 이행 미달 시 차기 시민의회에서 재심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이렇게 4단계가 순환하면서 민의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지속적·제도적 흐름이 된다.


가장 많이 나올 반대 논리에 대한 답변


반론1) “추첨된 일반 시민이 복잡한 정책을 제대로 다룰 수 있나?”


→ 아테네부터 현대 아일랜드·프랑스 시민의회 사례까지, 충분한 시간·정보·전문가 지원이 주어지면 일반 시민의 숙의 역량은 전문 정치인 못지않다는 것이 반복 검증되었다. 오히려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미니 국민'이 더 공익 중심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반론2) “일관성·책임성이 떨어지고 극단 세력이 장악할 위험이 있다”


→ 추첨은 매번 새로 구성되므로 특정 세력이 장기 장악 불가능하며, 성별·지역·연령 별 추첨+ 무응답자 대체 추첨으로 다양성을 극대화한다. 또한 숙의 과정 자체가 극단 의견을 중도화하는 효과가 입증되어 있다.


반론3) “예산과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다”


→ 연간 10~20건 안건 기준으로 추산 시 연 500~1,000억 원 수준(활동비 + 운영비 + 투표비 포함)으로, 국회예산 7천억~8천억원의 10%수준이고 전체 국가예산 729조원의 0.01% 수준이다. 국회예산을 약간 증액하는 셈으로 하면 된다.

안건 필터링(5만→10만 명 요건 상향 검토) 과 온라인 숙의 비중 확대로 비용을 더욱 압축할 수 있다.


물론 이 시스템이 만능은 아니다. 시민의회가 결론에 이르지 못할 때를 대비한 숙의 절차 규정, 투표 결과가 헌법적 가치와 충돌할 경우를 조율하는 헌법재판소의 역할, 그리고 포퓰리즘적 동원에 시스템이 악용되는 것을 막는 안전장치가 함께 설계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보완의 필요성이 시스템 도입 자체를 거부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대의제 역시 처음부터 완전하지 않았다. 제도는 실천 속에서 다듬어진다.


결론, 민주주의 본질을 향한 입법과 헌법반영


대의제는 결코 민주주의와 동의어가 아니다. 그것은 거대한 공동체를 운영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지금의 시대는 의사결정의 대상이 과거보다 다양하고 대의제에만 맡길 수 없는 일이 부지기수다. 게다가 SNS 등으로 권력의지를 표현하는 주권자의 요구도 폭증하고 있다.


이 모든 변화를 담으려면 "입법권은 국회에 속한다"는 헌법 제40조의 낡은 독점을 재해석하여 민치제의 길을 열어야 한다. 우리가 제안하는 발안·숙의·결정의 순환 시스템은 일반입법으로도 얼마든지 시행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정당성의 뿌리를 온전히 내리려면 헌법개정시 반드시 반영하도록 한다.


즉, "대의제에 맡길 일이 있고, 주권자가 직접 판단할 일이 있다"는 원칙을 제도로 새기는 것, 그것이 두 차례 촛불+빛의 혁명이 진정으로 가리킨 길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한겨레:온>에도 실렸습니다.


[필진정보]
이원영 : 시민인권위원회 공동위원장, 국토미래연구소장, 전 수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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