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유혹을 이긴 변화를 위하여
  • 이기우
  • 등록 2026-02-28 21:39:12

기사수정


▲ (사진출처=독립기념관)



사순 제2주일 (2026.03.01) : 창세 15,5-18; 필리 3,17-4,1; 루카 9,28-36


연중시기를 시작하는 주님 세례 축일에 우리가 기억한 대로,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라고 세상에 보내신 그 아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이끄심으로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시고 우리를 이끄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계시하신 것입니다(요한 14,6). 그 과정은 하느님을 적대하며 욕망으로 유혹하는 악마와의 대결이었고 이 또한 그분이 보여주신 길을 걸어가려는 모든 사람이 받아들여야 할 십자가였습니다. 지난 사순 제1주일의 전례에서 기념한 내용이 바로 이러했습니다. 오늘 사순 제2주일의 전례는 이 과정은 하느님 앞에서 거룩하게 변화되어 가는 과정임을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이 거룩한 변화의 여정은 그 변화야말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룩한 변화는 이미 하느님께서 계약을 맺으신 아브라함 이래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청되어 오던 바였습니다. 그 계약의 내용이란,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주님이 되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바친 제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세상에 펴겠다는 의지의 봉헌이었고, 그에 따른 하느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하늘의 별들처럼 늘어나리라는 축복과 늘어난 그 후손들이 살아갈 수 있는 땅을 주시겠다는 축복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러한 하느님과의 계약을 실현하고 그 축복을 실현하시고자 세상에 오신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계약의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 대신에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이들, 즉 그리스도의 교회로 바뀌었습니다. 교회는 새 이스라엘이요 참 하느님 백성으로서 ‘하늘의 시민’(필리 3,20)으로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고 양성하신 열두 사도와 바오로 사도는 이스라엘 땅을 떠나 당시 지중해를 둘러싼 로마 제국의 강역과 그 주변 지역에로 이 복음을 전하여 복음의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온 세상에 퍼져 나간 교회는 시대별로는 물론 지역별로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보여주신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유다인들은 그 길에서 떨어져 나갔지만, 하느님께서 유다인 모세가 전해준 율법과 역시 유다인인 엘리야를 위시한 예언자들이 전해준 예언으로 인류에게 보여주신 진리의 계시는 여전히 유효하였기에 각 시대의 교회와 각 지역의 교회는 지난 2천 년 동안 모세의 율법과 엘리야의 예언을 귀담아 들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해 왔습니다. 옛 이스라엘 백성이 보여준 시행착오의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도 예수님을 본받는 거룩한 변화를 지향하면서 세상도 죄악에서 벗어나 의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복음화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이 복음화의 여정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옛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고, 이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지만 사실은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보여준 언행에서 상징적으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지방을 중심으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타볼 산에 오르시되, 따로 동행하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만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는 기도하시던 중에 일어난 일이었고, 당시로서는 오래 전 서로 다른 시대에 활약했던 모세와 엘리야가 시대 간격을 뛰어 넘어 소환되어 왔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선포는, 후대의 교회들에 의해 계승되는 복음선포 활동 역시 일찍이 모세와 엘리야 시대에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세 제자는 잠에 빠져 있다가 깨어나서 모세와 엘리야가 그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이 광경을 보고는 아주 놀랐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어 오래도록 이 상황에 머물고 싶었지만, 예수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변화를 이루어 주시는 하느님의 산에서 오래 머물 수 없었고, 그들이 체험한 하느님의 변화를 산에서 내려가 세상에서 증거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이 명심해야 할 바가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에 담겨 있었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6).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고자 받으신 세례 때에 들려온 같은 메시지였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예수님만 들으셨는데, 이제는 세 제자가 함께 들을 수 있었다는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거룩한 변화가 그분이 기도하시던 중에 일어났음을 감안하면, 세 제자처럼 교회가 말씀에 대해서 깨어 있지 못하고 잠들어 있으면 안 됩니다. 말씀 전례에 있어서는 물론 복음선포에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말씀 안에 늘 현존하여 계십니다. 모세의 시대가 다르고, 엘리야의 시대가 다르며, 또 우리의 시대가 다를지라도, 시간이란 어디까지나 인간적 범주일 뿐 하느님의 말씀은 이 범주를 초월하여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또한 말씀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영은 우리를 재촉하여 산에서 내려가게 합니다. 전례에서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은 이제 세상으로 나아가서 우리의 삶을 통해 선포되어야 합니다. 초막을 지어서 산에서 언제까지나 머무르고자 하던 베드로의 선택은 틀렸습니다. 이처럼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전례를 거행하되 전례를 통한 복음선포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전례에는 말씀 전례만이 아니라 성찬 전례도 있습니다. 말씀 전례는 성찬 전례를 살아있게 하며 전례 이후의 행동을 방향 지어줍니다. 그래서 타볼 산에서도 초막을 지어 산에 머무르겠다던 베드로와 두 동료에게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찬 전례는 예수님의 행동적인 말씀입니다. 당신이 행한 모든 가르침을 기억하고, 당신이 행한 모든 사랑을 계승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전례에서 기운을 받아서 세상에 그 기운을 나누어 주라는 뜻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가르침과 사랑에 대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세 가지로 간추려 전해주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일과, 서로의 신앙 감각을 존중하는 일 그리고 서로가 공동으로 합의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입니다. 이 세 가지가 말씀과 성찬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께서 복음선포를 하도록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재촉하시며 세상 안에서 현존하시는 양식입니다. 이 현존양식에 충실하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의 복음을 전할 수 있고, 그분의 빛을 비출 수 있게 됩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과거 이스라엘 백성은 이 세 가지 징표를 알아보지 못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섬기기는 커녕 오히려 가난한 이들이 율법을 모르며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소외시켰습니다. 서로의 신앙 감각을 존중하기는 커녕 율법을 좀 안다는 자들은 열 가지 계명으로 시작된 율법을 6백 가지도 넘게 방대하게 만들어 놓아서 사람들을 죄인으로 낙인 찍어서 율법 지식의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공동합의성 역시 지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하던 대사제와 최고의회는 증인도 확보하지 못한 한밤중에 졸속으로 신성모독과 성전모독의 혐의를 뒤집어 씌워 죽일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러고도 로마 총독의 권세를 빌려 죽임으로써 후환을 아예 없애고자 혁명당원들과 야합한 바리사이들의 꾀를 빌려서, 종교적인 혐의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독립을 원하던 유다인들에게 민중봉기를 일으키며 로마 황제에게 반역을 꾀했다는 정치적 반란죄를 뒤집어씌우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2천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시행착오로부터 얻었어야 할 역사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고 나서야 지난 세월에 일어난 교회의 시행착오마저도 반성의 대상으로 삼아서, 위에 언급한 다섯 가지 징표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양식으로 확정하고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권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거룩한 변화의 요청입니다. 이 요청은 교회의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 모두에게 주어지고 있는 초대입니다. 


교회의 상층부인 성직자들의 변화 없이 평신도들에게만 변화를 기대했던 노력은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전례 안에서만 거룩한 변화를 맛보려는 유혹이 우리 교회에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러했듯이 산에서 내려오지 않으려는 유혹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하고, 그래서 교회는 위와 아래, 모두가 함께 변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신도들이 거룩하게 변화되려는 자발적 동기가 필요합니다. 거룩한 변화를 전례 안에서만 맛보려 하거나 성직주의라는 종교의 산에 머무르려는 유혹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 거룩한 변화를 이루는 일, 이것이 이번 사순 시기에 우리에게 요청되는 회개의 은총입니다. 


또한 오늘은 삼일절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7년 전인 1919년 3월 1일부터 한 달여 동안 한반도 전역에 울려 퍼졌던 ‘대한 독립 만세’의 함성과 이를 이끌어 낸 독립선언에는 반만년 전부터 세워온 고매한 뜻과 한민족의 이상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는 한민족과 한국교회가 현재에 다가오는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할 이정표입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1905년에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후 1910년에 강제합방(强制合邦)으로 나라를 통째로 빼앗기고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민족 전체가 노예가 되자, 지식인들이 앞장 서고 민중이 뒤따라 일제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한일 합방 조약의 무효와 나라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 운동을 시작한 민족의 대사건이 ‘3·1 만세 운동’이었습니다. 


1919년 이 날에 발표된 독립선언서에는 나라의 기원을 기원전 2333년에 이 땅에 처음으로 세워진 왕조인 고조선의 건국 기념일로 잡아 단기(檀紀)를 서기(西紀)와 함께 공표함으로써 이 나라의 역사가 오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왔음을 밝혔으며, 새로이 세울 나라의 정체성으로서 고조선 이래 고구려 · 신라 · 백제, 고려와 조선을 이어오며 이 땅에 대대로 살아온 한(韓) 민족의 사상을 담았습니다. 본시 이 사건은 대한제국 고종 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되어 숨졌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 장례일이었던 3월 3일을 앞두고 3월 1일에 시작하여 한반도 전역에서 한 해 내내 봉기한 독립운동이었습니다. 특히 3월부터 5월까지 석 달 동안에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전국 230개의 군(郡)에서 2백만 명 이상이 천 5백여 회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습니다.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평화 시위를 일제가 총칼을 앞세우고 폭력으로 진압하자 무장투쟁으로 변해갔습니다.


그 결과 공식집계 상으로도 7천 5백여 명이 살해되고 4만 6천여 명이 체포되었으며, 만 6천여 명이 부상당했습니다. 그리고 체포된 사람들 중 상당수가 잔학한 고문과 태형으로 옥사(獄死)했습니다. 당시 인구가 2천만 명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만 해도 인구의 1/10 정도이니까 이들을 돕거나 간접적으로 참가한 이들까지 하면 극소수 친일파를 제외하고는 거의 전 민족이 참여하여 대규모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독립만세운동을 계기로 지식인과 소수 지도자로 시작된 움직임이 대중의 참여로 명실상부한 민족운동으로 전환되면서, 민족의식과 계급의식이 각성되었습니다. 이렇게 민족 성원 대부분의 각성이 이루어진 것은 아마 한 민족 오천 년 역사상 초유의 일일 것입니다. 


이러한 3·1 독립만세 운동을 계기로 그 다음 달인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을 국호로 하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는데, 이는 국운이 기울어가던 1897년에 세워지고 1910년에 한일 강제합방으로 멸망한 ‘대한제국’(大韓帝國)에 대해서 한(韓)이라는 국호는 ‘대한’으로 계승을 하지만 이제는 국가 권력을 군주에게 맡기는 대신에 백성이 직접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민중의 각성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제국(帝國)이 아니라 ‘민국’(民國)이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1948년에 제정된 대한민국 제헌 헌법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3·1운동을 대한민국 건국의 기원으로 삼아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함을 천명하였습니다. 


나라의 정체는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이라는 삼권분립(三權分立)의 원칙과 나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원칙을 헌법 제1조에 담았습니다. 1919년 3월에 민중이 대규모로 참여하는 만세시위운동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민주주의의 역사적이고 제도적인 진전이었습니다. 한 민족의 ‘한’을 한자로는 성씨로도 쓰고 나라 이름으로도 쓰는 ‘韓’으로 표기합니다만, 이는 그 음을 빌려와서 썼던 것이고 본래는 크다는 뜻의 우리 말 한을 아래 아(ㆍ)를 써서 써 왔었습니다. 백 년 전 독립선언서에 담겼던 그 사상은 바로 한 민족이 본래 품어 왔고 실현해 왔던 그 뜻, 즉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재세이화(在世理化)라는 고조선의 건국이념을 압축하여 현대어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독립선언서에 담겼던 그 “하늘의 뜻과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독립하려던 바는 일제로부터 풀려나서도 강대국들에 의해서 분단과 전쟁, 빈곤과 독재의 고난과 시련을 겪어야 했기 때문에 일제의 강점에서 풀려난 지 70년이 지나가는 지금에서야 가까스로 실현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산업과 문화와 정치와 국방 등 삶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전 세계의 호응을 받고 있는 한류를 보면, “원래부터 풍부하다고 자부해온 독창성이 발휘된 우수한 문화”의 결과라고 보입니다. 국난이 닥칠 때마다 단결하여 보란 듯이 극복해 낸 그 길에 “양심과 진리가 빛을 비추어 주고” 있다고 여겨질 뿐만 아니라, “수천 년 전 조상의 영혼이 안에서 도와줄 것이고, 온 세계의 기운이 밖에서 지켜줄 것”이라던 그 희망대로 앞으로 우리 한 민족은 저 앞의 밝은 빛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우리 민족은 주변 민족들을 야만적인 오랑캐로 보는 나머지 세상의 중심이 되겠다고 자부하지도 않았고, 다른 민족들을 힘으로 억눌러서는 노예로 삼아 괴롭히지도 않았습니다. 이토록 도덕적으로 선한 이념과 사상을 그 오랜 세월 동안 지녀온 민족은 유례를 찾기 어렵습니다. 그저 양심과 이성이 명하는  진리에 따라서 더불어 평화로이 살고자 했을 따름이었습니다. 이렇듯 정신적 토양이 비옥했기 때문에 역시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복음 진리를 스스로 찾아 들여오는 오묘한 섭리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는 십자가와 부활을 핵심으로 하는 그리스도 신앙에 있어서 준비된 선교적 토양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서양의 신앙 열기가 식어가고 있고, 동양에서도 다른 나라들에서는 복음화의 상황이 불투명한 가운데, 우리 한 민족에 의한 선교적 전망이 밝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일들을 찬양하는 신앙은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께 대해 갖추어야 할 충분 조건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일깨워주는 으뜸 메시지가 그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어린이를 칭찬하신 까닭도 하느님 나라를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신앙을 강조하시고자 하셨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의지나 바람과는 상관 없이 하느님의 뜻과 섭리로 이미 다가오고 있는 현실입니다. 문제는 우리 사람들의 안목과 깨달음 그리고 의지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렇습니다. 지금처럼 극우 파시즘 세력이 준동하여 나라와 사회의 공동선이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도 물론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와 복음에 담겨 있는 또 하나의 메시지는 사람들이 다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게 만들 수 있는 필요 조건입니다. 그것은 선악에 대한 영적인 차원의 분별력은 물론 세상과 타인에 대한 이해력 등 이성으로 나타나는 인간적 차원의 믿음입니다. 신앙이 인간이 신성 차원에 접근할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이라면, 인간적 차원에서 서로 통교하고 모두가 함께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믿음의 능력은 신뢰와 신용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찬양의 필요 조건입니다. 


다시 상기해 보건대, 오늘 맞이하고 있는 삼일절은 백여 년 전에 주창했던 독립선언에 담겨 있는 그 큰 뜻을 기리기 위함이고, 그 가치들은 고조선의 건국이념인 홍인인간과 재세이화의 뜻을 이어 받는 정의와 민권 그리고 동포애였는데 남북이 분단된 오늘날에 와서는 민족 통합이라는 가치가 더 추가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시하고 힘 모아 실천해 나아가야 할 시대의 징표가 이 가치들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이 가치들을 이해하고 이 가치들로 소통하며 이 가치들을 솔선수범한다면, 북녘 동포들을 포함한 모든 민족 구성원들이 비로소 하느님을 찬양하게 될 것은 물론 다양한 민족들로 이루어진 온 인류가 가톨릭 신앙의 참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의 징표를 보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유혹에 맞서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필진정보]
이기우(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성사전담사제
TAG
키워드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