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 · 월성 등 단지 반경 30km 내 380만 명 거주
에너지 정책은 정치적·윤리적 선택…리스크 줄여야
지금 'CES 2026'에서 한국의 약진이 대단하다고 한다. 우리가 애써온 반세기의 제조업 약진이 이제 피지컬 AI로 꽃피우는 듯하다. 세계가 한국을 뒤따르는 형국이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 한구석에는 늘 불안하다. 원전의 위험 때문이다.
다른 나라들은 위험을 예방하는 장치가 주권기관들이 서로 감시하는 교차감시체제이지만 우리는 '팔이 안으로 굽는' 식의 행정부 내부만의 감시체제이기 때문이다. 리스크가 큰 것이다. 잠재적 핵폭탄을 머리에 이고 사는 우리는 진짜 안전한지 어떤지 알 수 없다. 고리2호기의 수명연장을 승인해준 원안위는 국제기준을 무시하는 위험천만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거대 지진의 경고와 '안전한 전기'
일본 정부가 지난해 발표한 난카이 트로프 거대 지진 발생 확률이 30년 내 80%로 상향 조정되었다. 말이 30년이지, 확률로는 당장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단순한 이웃 나라의 경고가 아니다. 동해와 남해를 사이에 둔 한반도도 지진 영향권 안에 있으며, 특히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원자력 발전소와 핵심 산업 단지가 특정 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일본은 난카이 트로프 지진 발생 시 최대 경제 피해를 2883조 원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제는 '가장 싼 전기'라는 경제적 관점에서 벗어나, 국가 존립을 위한 '가장 안전한 전기 생산'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우리는 지금 전기가 남아돈다. 원전은 비중을 늘려봤자 부하추종이라는 전력계통상의 문제 때문에 실효성이 없다. 자칫 과잉전기로 인한 블랙아웃의 우려가 있는 것이다. 오히려 넉넉한 전력예비율을 안전강화를 위해 유연하게 활용하는 접근이 요구되고 있다.

발전 단가의 이면에는 세금 구조와 위험 비용이 있다
흔히 ‘원자력은 싸고 천연가스(LNG)는 비싸다’고 말한다. 실상을 들여다 보자. 현재 우리나라의 발전 연료 과세 체계를 보면 화석연료인 LNG에는 개별소비세와 수입부과금이 부과되지만, 원자력 핵연료인 우라늄에는 직접적인 연료세가 없다. 미국, 프랑스 등은 이미 핵연료에 대해 다양한 방식의 과세를 도입하거나 사후 처리 비용을 엄격히 징수하고 있다. 특히 일본은 핵연료 가액의 10% 이상을 지방세로 징수하며 지역사회의 안전비용을 마련한다. 우리도 핵연료에 적정한 세금을 부과하고 LNG의 세제 혜택을 확대한다면 두 에너지원 간의 가격 격차는 상당 부분 줄어들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사고비용이다. 한전 내부 보고서는 후쿠시마급 사고가 고리원전에서 발생할 경우 피해액을 2492조 원으로 추산했다. 이는 연료비 절감분을 수백 배 상회하는 규모다. 원전의 '경제성'은 이러한 잠재적 사회적 비용을 어떻게 계산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게다가 우리의 동남해안은 산업 집적지이자 세계 최고 수준의 위험 집중지역이다.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고리·신고리·월성 등 원전 단지 반경 30km 내에는 약 380만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 옆으로는 울산의 석유화학·자동차, 포항의 철강 등 국가 경제의 핵심 산업 클러스터가 형성되어 있다.
후쿠시마 사고 당시 반경 30km 내 인구는 약 16만 명이었다. 만약 우리 동남해안에 유사한 사고가 발생할 경우 그 피해는 단순 산술적 비교를 넘어선다. 인명 피해를 넘어 한국산 제품의 공급망 신뢰도가 붕괴되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브랜드 자체가 영구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격언이 이보다 더 절실한 곳은 없다.
'전략적 순환 정지'와 국제 독립 검증을 제안한다
이런 맥락에서 제안되는 것이 바로 '전략적 순환 정지 및 전수 점검'이다.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것부터 6기~8기를 먼저 가동중단하고 안전정비에 완벽을 기하는 것이다.
2023년 기준 우리나라 LNG 발전 설비는 43.2GW이며, 2038년까지 69.2GW로 증가할 예정이다. 원자력 발전 설비는 2024년 기준 약 24기가 가동 중이며, 설비용량은 약 25GW 수준이다. 즉, 정책적 결단만 있다면 원전의 약 1/4에서 1/3 정도를 상시 정지시켜도 LNG 발전으로 충분히 대체 가능하다는 얘기다. 게다가 재생에너지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어서 원전이 줄면 부하추종 위험도 줄어든다.
이재명 정부 4년 반이라는 임기를 기준으로, 매년 원전의 25~30%를 순환하며 정지시키고 정밀 점검을 실시한다면 임기 내에 대한민국 모든 원전의 안전성을 완벽하게 재검토할 수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국내 학계와 산업계의 '셀프 점검'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INRAG(International Nuclear Risk Assessment Group)와 같은 독립적인 국제 원전 전문가 그룹을 초청하여 상주시켜 정비하는 것이 핵심이다. INRAG는 오스트리아에 본부를 둔 독립 원전 전문가 그룹으로, 전 세계 원자력 당국 출신 인사와 전문가 및 엔지니어들로 구성되어 있다.
원전은 본질적으로 국제문제다. 사고가 나면 그 피해가 지구촌으로 퍼져가기 마련이다. 외국의 객관적인 시각으로 활성단층과의 상관관계, 노후 배관의 결함, 내진 설계의 실효성을 가감 없이 검증받아야 한다. 이것이 국민의 불안을 해소하고 국가 리스크를 관리하는 '대국적 상식'이다.
실행 가능한 재원 확보는 숨겨진 기금의 활용
비판자들은 당장 전기료가 오를 것이라 우려한다. 하지만 우리에겐 이미 마련된 재원이 있다. ‘전력산업기반기금’은 우리가 매달 내는 전기요금의 3.7%를 적립해 매년 수조 원씩 쌓여 있다. 정부는 이 비율을 단계적으로 인하할 계획이지만, 위기 상황에서는 기존 적립분과 유지 가능한 적립률을 활용해야 한다. ‘기후위기대응기금’이라는 온실가스 배출권 판매 수익으로 조성된 기금도 있고, ‘에너지 특별회계’라는 정부 내 산재한 에너지 관련 여유 자금이 있다.
정부가 의지만 있다면, 원전을 이와 같이 순환 정지하고 LNG를 가동하면서 발생하는 연료비 차액(원전 대비 LNG가 연료비는 높지만 이미 설비는 구축되어 있음)을 이 기금들로 보전할 수 있다. 전기요금은 상식수준의 인상이 바람직하지만, 설사 인상하지 않아도, 국가적 대재앙을 막기 위한 '안전 보증금'을 기금에서 지불하는 셈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원전 30% 정지 시 고려할 사항들도 있다. 계절별 전력 수요 변동(하계·동계 피크)과 안정적 예비율 확보(15~20% 권장) 그리고 송전망 제약과 지역별 전력 수급 불균형 조정 등을 감안하여 정밀한 전력수급 시뮬레이션이 병행되어야 한다.
이 제안은 LNG만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LNG 역시 화석연료로서 탄소를 배출하며, 국제 가스 가격 변동에 취약하다. 따라서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 비중을 2030년까지 대폭 확대해야 한다. 특히 AI데이터센터용의 급증하는 분산전력 수급과 관련된 지역단위의 재생에너지는 목표치를 실현할 프로그램을 확고히 하는 게 필요하다. 또, 원전 의존도 감소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을 수 있는 원전 산업 종사자와 지역경제를 위한 ‘정의로운 전환’정책도 필수적이다.
가장 싼 전기는 '사고가 나지 않는 전기'다
에너지 정책은 단순히 공학적 데이터나 경제적 수치의 나열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공동체가 어떤 위험을 감수할 것인지, 그리고 미래 세대에게 어떤 환경을 물려줄 것인지를 결정하는 고도의 정치적·윤리적 선택이다.
난카이 트로프의 거대 지진은 '확률'의 문제가 아니라 '시기'의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 임박한 위기 앞에서 단기적 경제성 논리에 매몰되는 것은 대국적인 자세가 아니다.
INRAG 같은 국제 전문가들의 독립적인 검증 아래 원전을 순차적으로 멈추고, 가용한 기금을 총동원해 안전을 보강하며,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가속화하는 것. 그리하여 설령 땅이 흔들리더라도 국민의 생명과 국가의 산업 기반이 무너지지 않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정부에 요구해야 할 '진정한 에너지 안보'의 모습이다.
가장 싼 전기는 생산 단가가 낮은 전기가 아니라, 사고가 나지 않아 천문학적인 복구 비용과 국가 존립의 위기를 초래하지 않는 '안전한 전기'다. 이제 우리는 그 상식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렸습니다.
[필진정보]
이원영 : 시민인권위원회 공동위원장, 국토미래연구소장, 전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