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현 전 토요일 (2026.01.03) : 1요한 3,7-10; 요한 1,35-42
오늘 미사의 말씀은 독서와 복음이 모두 사도 요한의 편지와 진술입니다. 그는 우리 믿는 이들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인가? 하고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에 관해 묻는 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자 사도 요한은 먼저 세레자 요한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요르단 강에서 물의 세례로 회개 운동을 펼치던 세례자 요한이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시는 예수님을 눈여겨 보고서는 그 참 모습을 알아 보고,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효한 1,36) 하고 고백하자, 그의 제자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안드레아였는데, 예수님께 어디에 묵고 계시는지, 그곳을 보고 싶다고 청하였습니다. 이는 생활양식을 확인하겠다는 뜻으로서, 과연 그들은 예수님께서 묵고 계시는 곳을 보고 그분과 하루 반나절과 하룻밤을 함께 지내며 대화와 교감을 나눈 끝에, 과연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확인한 듯 합니다.
그러기에, 안드레아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 하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가 형 시몬을 예수님께 데리고 가자 예수님께서도 시몬을 눈여겨보시고 단박에 그가 교회의 반석이 될 만한 인물임을 알아 보시고 케파, 즉 베드로라는 새 이름까지 지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세례자 요한이나 안드레아, 예수님 모두 서로가 서로를 한 눈에 알아 보는 안목을 보여준 셈인데 이는 세상사에서 매우 드문 일입니다. 우리는 대개 한 눈에 누군가의 참 모습을 알아보기보다는 한동안 겪어봐야 겨우 알 수 있습니다. 겪고 나서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우리의 차이입니다.
안드레아와 함께 예수님을 찾아갔던 또 다른 제자는 요한임이 분명합니다. 동행하고 목격하지 않고서는 그 정황과 대화를 이토록 상세하게 기록할 수 없을 것이 때문입니다. 교부 테오도루스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요한은 젊은 시절에 만나 예수님의 공생활 내내 제자로서 가르침을 받고 나서 말년에 쓴 자신의 서한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는 행실로 구분되는데, 의로운 일을 실천하고 사랑을 행하지 않는 자는 악마의 자녀요 의로운 일을 실천하고 사랑을 행하는 이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단순하고 명쾌한 진술이야말로 다른 복음사가들과도 구분되는 사도 요한의 통찰입니다.
안드레아와 요한이 예수님께서 묵고 계시는 곳을 보고 싶다고 청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아라.”(요한 1,39) 하고 순순히 허락하셨습니다. 1981년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에서 한국 천주교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온 겨레에게 전하는 표어로 삼았었습니다: “와서 보시오.”

천주교가 이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여온 후 근 2백여 년 만에 공개적으로 한민족을 초대한 메시지였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로 백 년 동안 박해를 받아 2만여 명이 치명을 해야 했고, 종교의 자유를 얻은 후에도 일제 식민통치를 받게 된 데다가 조선총독부에 협조적인 정교분리의 노선을 걷고자 했던 프랑스 선교사 출신의 교구장 탓으로 드러내 놓고 신앙을 증거할 수 없었던 한국 천주교인들이, 드디어 2백여 년 만에 공개적으로 신앙을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그 신앙대화의 미사가 시작될 무렵에 하늘에 십자가가 나타나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 후 1984년에는 천주교 200주년 기념 신앙대회 겸 시성식이 같은 자리, 여의도 광장에서 열렸는데, 이 자리에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직접 와서 기적 심사도 관면한 채 103위의 순교 복자를 성인품에 올렸습니다. 뒤이어 1989년에는 세계 성체대회까지 열려 전 세계의 주교들을 서울에 불러 모아서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를 주제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전 세계 교회가 함께 기도하는 경사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대한민국에는 그야말로 ‘가톨릭 붐’이 불었습니다.
1980년 초에 겨우 백만 명 남짓하던 전국 교세는 80년 말부터 90년대 후반까지 무려 다섯 배 가까이 늘었고, 특히 지식인들과 젊은이들 그리고 노동자들의 입교 행렬이 눈에 띠었습니다. 여기에는 같은 시기인 80년대 한국 정치를 지배한 유신 독재에 항거한 정의구현사제단의 활약과 영향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한국 천주교회는 순교자들의 거룩함과 더불어 사회적인 의로움을 온 겨레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1980년대의 화려했던 ‘가톨릭 붐’은 과거의 추억이 되어 버렸고, 지금은 코로나 19 사태 이후 정반대의 침체 현상이 암울하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5백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던 교세는 냉담자의 급증, 예비자의 급감, 성소자 부족 현상에다가 신앙 열기와 사목 활동의 침체 현상으로 나타나서, 본당마다 새 영세자를 모집하기가 어렵고 신학교에서 사제 지망자를 채우기 어려우며 수도회마다 성소자를 찾기가 어려운 실정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에서 매년 발표하는 교세 통계에 의하면, 주일미사에서 영성체를 하는 신자들의 수는 고작 영세자의 1/10 수준입니다.
유럽이나 남북 아메리카 등 서구의 천주교회에는 벌써 백여 년 전부터 이런 신앙의 침체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한국의 천주교회도 이런 추세를 따라가는 것이라고 비관적으로 보는 종교학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천주교회의 향후 전망도 비관적으로 볼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쉽게 달구어 지는 냄비는 쉽게 식게 마련이듯이, 지금은 1980년 이후의 거품이 꺼지는 중입니다. 이제 진짜만 남았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 말씀의 메시지가 빛을 발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사람의 진면목을 알아보는 안목, 의로움과 사랑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증거하는 삶이라면 개인의 신앙이나 전체 교회의 활력은 얼마든지 피어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우리 한국 천주교회에는 희망이 살아 있습니다. 유럽이나 아메리카는 물론 아시아의 다른 교회들에 비해서는 그래도 자발적으로 복음을 들여와서 신앙의 깃발을 세웠던 한국 교회의 역량이 상대적으로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박해 속에서도 진리를 향한 열정을 불태웠던 선각자들을 본받아서 사회의 복음화에 눈을 뜨고, 민족의 복음화에 앞장 서며,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해 힘을 모으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이 교황청의 오랜 여망이기도 합니다. 특히 요한 바오로 2세와 프란치스코 교황은 방한 메시지를 통해, 지구상 마지막 남은 냉전 지대인 한반도의 평화는 한국 교회가 신앙 쇄신과 민족 복음화 그리고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해 노력할 때 덤으로 얻어질 하느님의 선물임을 강력하게 암시한 바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의 진면목을 한 눈에 알아 보고 사람들과 자신의 제자들 앞에서 증언한 발언이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 였습니다. 종교적 거룩함과 사회적 의로움의 가치를 위해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존재가 바로 메시아의 진면목이요, 메시아적 백성의 진면목입니다.
한국의 천주교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아야 하는 뿌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들의 근본적인 차이였던 바는 우리도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을 본받음으로써 근본적인 동질성으로 도약합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도 세례자 요한처럼 예수님의 참모습을 알아보고, 안드레아처럼 그분을 찾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메시아를 만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