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9주일 (2025.08.10) : 지혜 18,6-9; 히브 11,1-19; 루카 12,32-48
한국교회는 현재 복음화 제3세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그리스도 현존의 표지로 부각시킨 말씀과 성사 그리고 사도직을 기준 지표로 하여 우리 교회가 지난 230여 년 동안 지나온 발자취를 돌아보면, 말씀의 교회 시기와 성사의 교회 시기 그리고 사도직 교회의 시기가 거의 백 년 단위로 뚜렷한 특색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784년에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생겨난 이후 박해시대를 거쳐 선교의 자유가 허용된 한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때까지를 ‘말씀의 교회 시기’(1784~1886), 그리고 이 때로부터 선교의 자유는 허용됨으로써 성사 생활은 가능해 졌으나 신앙을 사회적으로 증거하는 활동은 정치적 이유로 자유롭지 못했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분단과 전쟁 그리고 독재 치하를 겪고 나서 민주화를 이룩한 시기에 방인사제들이 배출되고 교계제도가 수립되어 교회 자립도를 높였으며 103위 성인들과 124위 복자들이 배출된 시성시복식과 제44차 세계성체대회까지 열었던 ‘성사의 교회 시기’(1887~2014)로 나누고 나서 보면, ‘말씀의 교회 시기’에는 물론 ‘성사의 교회 시기’에도 말씀과 성사의 열매로 나타나야 할 사도직 활동이 현저하게 취약함을 뚜렷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향후에는 ‘사도직 교회 시기’(2015~)가 도래할 것임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사도직 활동에 있어서는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시대의 징표를 보여주시는 데에 따라서 해야 할 사도직 활동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1. 시대의 징표에 깨어 있어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징표를 통하여 나타나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에 만전을 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거룩한 변모를 통해 신성을 드러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시대의 징표가 가리키는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기를 촉구하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구원되는 길이요 시대가 구원되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2.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사람들은 거짓의 문화로부터 받는 유혹에 취약할 뿐만 아니라 살림의 문화를 알아보는 데에도 둔감합니다. 그래서 이들을 예수님께서는 ‘작은 양 떼’라고 부르시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심을 시켜 주셨습니다. 호수 위에 띠워 놓은 배에서 풍랑에 시달리면 위험에 빠진 제자들을 구하러 물 위를 걸어서라도, 아니 더 먼저는 기도 중이라도 그리 하시듯,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보고 유령인 줄로 착각하는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그 ‘작은 양 떼’ 속에는 세상으로부터 보잘것없다고 무시당하고 소외된 모든 이들이 다 포함되어 있었고 이방인 출신이라도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저 하찮게 볼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세상에서 버린 돌이라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일이 필요할 뿐입니다. 과연 십자가는 부활의 과정이자 하느님 나라의 관문이요 심판의 주요 대상입니다. 그래서 악에 대해 짊어지는 의인의 십자가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 함께 짊어지어 주시고 악에 맞서 함께 싸워 주십니다.
3. 거기에 그들이 있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날 무렵 설립된 원주교구에서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지학순 다니엘 주교와 함께 강원도의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장일순 선생과 함께 시대의 풍상을 견디어 내며 자신을 내던져 이 땅의 정의를 살리고 생명 운동과 협동 운동의 소중한 가치를 가꾸고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제자 세 사람(김영주, 이경국, 김상범)이었습니다.
노자 도덕경 38장에 “얄팍하게 살지 아니하고 중후한 삶을 살면서 높은 덕과 두터운 도를 좋아하는 사람"을 '대장부'(大丈夫)라 칭하는 구절이 나옵니다(是以大丈夫處其厚 不居其薄: 시이대장부처기후 불거기박, “그러므로 대장부는 두터움에 머물고 얄팍한 데 거하지 않는다”). 장일순 선생이 노자 사상을 좋아해서 호를 ‘무위당’(無爲堂)이라고 짓고, 이 제자들을 ‘대장부’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원주 캠프’에 모인 사람들은 이 네 사람을 두고 ‘무위당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혹독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시대에 민주화 운동과 협동조합 운동, 생명 운동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했습니다. 이 50년의 발자취를 기록한 책의 제목이 “대장부 – 거기에 그들이 있었다”입니다.
4. 시대의 징표를 묻는다는 것
무위당 사람들의 실천이 지닌 의미는 시대의 징표를 읽을 줄 알았다는 것이고, 마치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실천했다는 데 있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당시의 사제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면서도 정작 “주님께서 어디 계신가?” 하고 묻지 않았다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예레 2,8).
그런데 지 주교와 무위당 사람들은 신생 교구와 강원도의 가난한 이들에게 과연 필요한 복음이 무엇인지를 공의회 가르침에 비추어 하느님께 여쭈었습니다. 특히 교구 출범 후 얼마 되지 않은 1972년 8월에 남한강 유역에 집중 호우가 쏟아져서 원주교구가 관할하는 산하 탄광 지대와 제천, 단양 지역 등 남한강 유역의 13개 시군에서 대부분의 농촌 마을이 물에 잠기는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 사태를 그들이 식별한 시대의 징표에 응답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5. 협동조합 운동
지 주교는 독일 가톨릭교회에 도움을 요청했고 미제레올, 카리타스 등으로부터 구호성금이 답지하자, 이 성금의 용도에 대해 무위당과 상의한 결과 무조건적인 시혜가 아니라 스스로 자립하겠다는 노력의 대가로 지원하기로 하였습니다. 구호성금을 재해지원금으로 지급하되 일정 기간 후 분할 상환하는 조건으로 지급하였고, 개인을 통해서는 지급하지 않고 꼭 협동조직을 통해서만 지급함으로써 이 협동조직이 나중에 신용협동조합의 모태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탄광촌에서는 고리대금업이 성행했을 뿐만 아니라 생활필수품이 여러 단계의 유통 단계를 거치면서 시중 가격보다 3배 이상 비싼 경우도 흔했는데, 재해대책 활동으로서 이런 광산 지역에는 고리대금의 폐해를 없앨 수 있는 신협뿐만 아니라 유통을 합리화시킬 수 있는 소비자협동조합까지 만들어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6. 민주화 운동을 거쳐 생명 운동으로
무위당 사람들이 지 주교를 도와 가난한 농민들과 광부들을 협동조합 운동으로 자립을 시키고자 했던 1970년대는 유신독재 시절이었습니다. 이 운동이 확산됨에 따라 자연히 농민들과 광부들도 예전과 달리 의식화가 진행되면서 정치적 감시의 눈초리가 심해지기도 했고, 원주교구가 투자했던 원주문화방송의 부정부패로 투자금을 날리게 되자 이에 항의하는 민주화 운동이 자연스럽게 전개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지 주교와 장일순이 체포, 투옥되는 심각한 사태가 벌어졌고 현직 주교에 대한 정권 탄압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지면서 의분에 찬 전국의 사제들이 시국 미사를 조직한 끝에 정의구현 사제단을 출범시켰습니다.
이러한 원주교구의 행보로 말미암아 유신 정국에 일대 지각 변동이 일어났고 원주가 민주화 운동의 본산으로 떠올랐지만, 무위당 사람들에게 이 민주화 운동은 얼추 자리잡기 시작한 협동 운동에서 더 근본적인 생명 운동으로 전환시키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민주화 운동으로 유신독재에 맞서는 투쟁과정에서 영성과 공동체성이 심히 훼손되었다고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당시의 농업이 농약과 비료를 써서 토지를 산성화시키고 있어서 땅을 살려야 한다는 필요성도 컸으며, 신협 운동과 병행해서 실천했던 소비자 협동조합 운동을 농산물의 생산과 유통과 소비에 두루 적용시켜보자는 실험 정신도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농약과 비료를 써서 농사를 짓는 대신 유기농 방식으로 농산물을 생산하고, 도시의 소비자들도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생산자와 소비자 간에 계약을 맺으면, 농부들은 선불을 받고 재배할 수 있으니까 안심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고, 또 도시 소비자들은 안정된 가격에 믿을 수 있는 먹거리를 얻을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살림’으로 발전했습니다.
7. 공동체 운동의 리더십
협동조합 운동이건, 민주화 운동이건, 생명 운동이건 모두 대동세상을 이루자는 공동체 운동입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지 주교와 무위당 사람들은 신자와 비신자를 가리지 않았으며 종교색을 전혀 띠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운동이 지니는 사회적이고 영성적인 취지는 교세확장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리더십이라는 데 있습니다. 이 리더십은 이미 박해시대에 한과 정과 흥의 조화로써 이룩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 천주교 신자들은 단지 믿는다는 이유로 억울한 희생을 당하면서 생긴 한이 엄청나게 컸었습니다. 하지만 '교우촌'이라는 새로운 대동세상으로 건설하면서 이 한을 풀었고 이 과정에서 '교우'라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특유한 정이 생겨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일과 대축일의 전례는 그들의 한과 정을 흥으로 승화시켜 하느님께 봉헌하는 제사가 되었습니다. 가장 늦게 설정된 꼴찌 교구에서 의기투합한 이들은 농촌과 탄광촌의 가난한 이들을 대상으로 시대의 징표에 응답하면서, 공동체적인 리더십을 재현함으로써 교우촌 전통을 이어 받는 데에서는 첫째가 되었습니다.
8. “기어라, 모셔라, 함께 하라”
이러한 운동이 아무런 갈등 없이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원주교구 사제들이 늘어나고, 독일에서 지원했던 사업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가면서 일어났던 무위당 사람들과 사제들 사이의 갈등은 지 학순 주교가 해소해 주어야 하는 몫이었고, 농촌이든 탄광촌이든 또는 도시에서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운동을 하면서 해야 하는 가장 큰 일은 교육하는 일과 서로 간의 갈등을 조정해 주는 일이었는데 이 일은 무위당 장일순의 몫이었습니다. 그래서 숱하게 진행된 교육에서 무위당 선생이 강조했던 기본 자세가 있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고, 할 수만 있으면 아래로 내려가야 공동체 운동을 할 수 있으니 “기어라!”하고 가르쳤고, 모두의 마음에 하느님을 모시듯이 정성껏 해야 하니 “모셔라!”를 가르쳤으며, 자연과 공생하듯이 사람들이 동참해야 함께 살아갈 수 있으니 제대로 사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과도 공생해야 하기 때문에, “함께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9. 허리에 띠를 매고, 시대의 징표에 깨어 있는 정신으로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되 실천함에 있어서는 긴장감을 늦추지 말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무위당 사람들의 실천은 시대의 징표에 걸맞게 응답함으로써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고 그들 자신과 원주를 비롯한 강원도 사람들, 더 나아가서는 한국교회와 사회를 구원하고자 했던 처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징표에 대한 우리의 반응과 응답 그리고 처신을 대상으로 삼아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바야흐로 임박한 사도직 교회의 시기를 기다리면서 역사 의식과 사회 의식에 깨어 있는 각성된 평신도들이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