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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 이기우
  • 등록 2025-07-17 18:4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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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6주일 (2025.07.20) : 창세 18,1-10ㄴ; 콜로 1,24-28; 루카 10,38-42




현 시기 대한민국에 필요한 일은 민생을 회복하고 내란 세력을 척결하며 검찰을 개혁하고 사법부가 제 자리를 찾게 해 주는 등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국 사회의 공동선 질서를 최소한으로 정상화시키고 나면,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이 공동선을 증진시키기 위한 헌법 질서를 확고하게 수립하는 것인데 그것이 사회권 선진국으로 가기 위한 개헌 작업입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을 개정하면 그것이 제7공화국 헌법이 됩니다.


재헌 헌법 이래 대한민국 헌법의 일관된 지향은 평화 통일이었습니다. 역대 대통령들은 취임 선서에서 이를 위한 성실한 의무를 준수할 것을 온 민족 앞에서 선서해 왔습니다. 북한 내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탈북하는 현 추세만 보더라도 통일의 상대인 북한이 경제는 물론 정치와 외교 안보에서도 궁지로 몰려 있는 지금, 통일의 주도권은 남한 즉 대한민국에 있습니다.


통일의 관건은 북한이 보유하고 있다는 핵무기나 미국 대통령의 대북 정책이 아니라, 남한이 북한 정치 주도층을 어덯게 설득하여 평화적으로 이 국면을 해결해 나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북한 주민들의 여론을 감안함과 동시에 북한 체제의 안전을 염려하는 지도부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주도면밀한 외교 전략이 필요한 때입니다. 지금처럼 대한민국의 남북 관계와 통일 전략이 중요한 때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한국 사회에 필요한 최대한의 공동선 질서입니다.


그런데 지난 7월 7일, 교황청 성직자성 장관 유흥식 추기경이 교황 특사 자격으로 방한하여 대통령을 접견한 자리에서, 이 대통령을 교황청에 초대했습니다. 그러자 이 대통령은 2027년에 서울에서 열리는 세계 청년 대회에 참석하게 될 교황이 북한 김정은 위원장도 만날 것을 요청했습니다. 아마 올해 안에 이재명 대통령의 교황청 방문이 성사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내후년 세계 청년 대회 기간을 전후해서 레오 교황이 평양이나 판문점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여 선종한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이 염원했던 한반도 평화를 후임 레오 교황이 실현하게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지금 우리 앞에 열리고 있습니다. 이는 대단히 희망적인 시대의 징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교회로서는 지구상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냉전 지역인 한반도에서 그리스도의 평화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지향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며 지켜 보기만 하면서 손 놓고 있어야 하는 처지는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민족의 파스카를 위해 움직이는 일입니다. 민족의 파스카 과업은 우리 사회의 복음화를 통해 민족 복음화를 위한 역량과 활력을 충전하여 통일 한국이 파스카 과업을 아시아 대륙으로 확산시켜 나갈 수 있는 준비를 하는 중차대한 일입니다.


전례의 취지와 말씀의 흐름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묵상하는 사순 시기와 부활 시기가 그분의 삶에서 이루어진 파스카의 신비를 묵상하는 시기라면, 지금 우리가 16주째 지내고 있는 연중 시기는 성령을 받아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으로 파스카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시기입니다. ‘파스카’라는 말을 성경에서나 전례에서만 듣던 우리가 직접 우리네 삶의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 그런 시기입니다.


제1독서인 창세기 18장의 말씀은 젊은 시절에 오로지 하느님의 부르심만 믿고 길을 떠나 낯선 땅에서 살다가 이미 늙은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천사들을 맞이하고서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나리라는 소식을 전해들은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루카 복음 10장의 말씀은 부활의 신비가 지닌 일상적인 측면을 묵상하기에 더 없이 좋은 내용입니다. 절친한 벗으로서 가깝게 지내던 라자로의 집은 베타니아에 있었고, 복음선포 활동에서 지치실 때마다 이 집에 들르곤 하던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두 동생인 마르타와 마리아의 시중을 받곤 하셨는데 마르타의 음식 시중도 필요하고 고맙지만 마리아의 말씀 시중도 필요하다고 일깨워 주신 내용입니다.


그런가 하면 제2독서인 콜로새 편지 1장에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무지무지한 고생을 온 몸으로 겪고 있던 사도 바오로가 자기 자신이 겪고 있던 그 고생의 의미를 깨닫고 고백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고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자기 몸으로 채우고 있다고 깨달았다는 매우 절제된 겸손의 표현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로 인한 부활의 신비를 남김없이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오로의 고백을 들으면서 근현대사의 맥락으로 치환해 보면, 한국 천주교회는 물론 한민족 전체가 예수님의 고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온 겨레가 채우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개입하시고 그분이 보내신 메시지가 부활 신앙의 출발점이라면, 말씀에 대한 집중과 사람에 대한 봉사로 살아가는 리듬이 부활 신앙의 경로일 것이고, 그로 인해 겪게 되는 고통이 주어진다 해도 그 의미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영성이 부활 신앙의 희망이라는 것이 오늘 말씀의 흐름입니다.


하느님의 계시와 인류의 진화


그리스도인들이 계시 받은 신앙의 진리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비와,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부활의 신비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계시인 까닭에, 그 이전의 인류 역사에서는 강생이라든가 부활에 대한 관념조차 없었습니다. 지구상에 생명체가 출현하고 나서 오랜 기간에 걸쳐 진화해 온 인류는 의식이 정점에 달한 신석기 시대에 이르러서야 죽음 이후의 내세와 영혼의 존재를 어렴풋이 깨닫게 됩니다. 그 흔적과 증거가 사람이 죽으면 매장을 하는 풍습이 어느 덧 새로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인간 의식이 언어와 문자를 발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도구와 집단생활양식을 발전시키면서 문명이 생겨나기 시작할 무렵에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하셨으니, 그 첫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인류가 형성한 다양한 종교 풍습 가운데에서 인격적인 존재로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계시는 아브라함 이래 형성되어 온 유다교가 처음입니다.


인격적 유일신의 존재를 믿어 온 유다교에서 하느님께서 온전히 다스리시는 내세의 영원한 생명, 천국과 지옥에 대한 계시 그리고 무엇보다도 메시아에 대한 계시가 예언자들에 의해 어렴풋이 전해져 오다가, 그 내용이 실제로도 온전히 밝혀지게 된 사건이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활 그리고 부활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의해서 밝혀진 신앙 계시 진리를 전해주는 신약성경 특히 복음서들이 전해주는 메시지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고,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공생활은 부활하시기에 이르는 과정으로서의 의미만 지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신 부활의 삶으로서 더 큰 의미를 지닙니다. 그분은 당신이 살아보지 못한 하느님 나라를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살고 계시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보여주시기도 하셨고 초대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봉사와 관상, 실천하는 행동과 말씀에 집중하는 기도이며, 또한 그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부활의 생활양식입니다.


부활의 생활양식


오늘 복음의 본문을 읽으면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두둔하시고 마르타를 야단치신 것처럼 알아들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빠 라자로의 죽음에서 예수님을 맞이하면서 부활 신앙을 고백한 인물은 마리아가 아니라 마르타였습니다(요한 11,24 참조). 마르타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근거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복음선포 활동에서 지치실 때마다 라자로의 집에 들르실 때마다, 혼자서가 아니라 제자들을 동행하여 들르셨을 터이므로 열두 명도 더 넘는 장정들을 대접하는 시중이 마르타 혼자서는 여간 벅찬 일이 아니었으리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고 또한 마르타가 음식 시중을 드는 일에 있어서는 제법 솜씨가 있는 여성이었을 것으로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는 음식 시중만 필요하셨던 것이 아니라 군중을 상대로 복음을 선포하실 때마다 말씀을 알아들을 귀가 없거나 부족한 사람들을 워낙 많이 겪으셨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알아듣는 사람도 절실히 필요로 하셨습니다. 말씀 시중이 마리아에게는 물론 예수님께도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마르타가 보여준 음식 시중을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행동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면 마리아가 보여준 말씀 시중을 하느님께 기도하는 행동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이는 두 자매에게 가르쳐 주시기 이전에 이미 예수님께서도 평소의 생활에서 보여주신 리듬입니다. 그분은 찾아오는 사람들의 요구에 응답하느라 분주하셨지만 때가 되면 어김없이 하느님 앞에 홀로 남아서 기도하시곤 하셨습니다.


중요한 가르침은 제자들에게만 따로 가르치기도 하셨고, 중요한 일을 앞두고서는 반드시 기도하며 하느님의 뜻을 여쭙고 그 기운을 채우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바치신 그 처절한 기도를 상기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해야 할 만큼 처절하셨던 그러나 그로 인해 하느님의 넘치는 기운을 받으셨던 예수님의 봉사와 관상은 부활한 생활양식의 표준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선행이 뜻하는 것


오늘 제1독서에서 아브라함은 우상을 숭배하던 문명의 한복판에서 살다가 그곳을 떠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가나안 땅으로 온 지 수십 년 만에 하느님 천사들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하고서도 추가적인 하느님의 이끄심이 끊어졌다고 여길만한 오랜 세월 동안에도 하느님께 행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끈질기게 기다린 그의 믿음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천사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했습니다. 발을 씻을 물도 주었고, 구운 빵과 부드러운 송아지 고기요리도 내놓았고 우유까지 차려 놓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 아들을 낳으리라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고사(古事)는 부활 신앙으로 봉사와 관상의 생활양식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체성사를 연상시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부활한 삶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남겨 주신 유산인 성체성사는 그분의 삶과 메시지를 기억하여 계승하라는 메시지를 기쁜 소식으로 듣는 기회입니다. 그래서 밀가루로 만들어진 빵과 포도를 빚어 만든 포도주가 부활로 이끄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는 실로 신묘한 영적 잔치가 벌어집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기다려서 천사들을 잔치음식으로 대접하여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듯이, 믿음을 간직하고 성체성사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도 그분의 파스카를 계승하라는 기쁜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전례로 재현되는 하느님의 개입이요 천사의 전갈입니다. 또한 성체성사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십자가 희생을 다짐하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아시아와 그리스 땅에까지 전하느라 온갖 고초를 다 겪어야 했던 사도 바오로가 그러했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이 짊어져야 했고 또 짊어지고 있는 십자가의 의미를 예수님 안에서, 특히 파스카의 사명 안에서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교회를 위하여 몸으로나 마음으로 채우고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부활은 부활대축일이나 부활 시기에만 기념해야 하는 신비가 아니며, 일 년 내내, 더 나아가서는 온 생애 동안에 실천되고 재현되어야 하는 진리입니다. 그런데도 부활한 삶의 양식을 모르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내세를 모르는 듯이 마냥 욕심을 부리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시대와 때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습니다.


그래서도 필요한 것은 부활 신앙에 따라 성체성사에서 하느님의 개입과 파스카의 메시지를 기억하며, 봉사와 관상의 리듬을 지키면서, 주어진 고난을 예수님의 모자란 고난을 채우는 십자가로 받아들일 줄 아는 그리스도인들의 부활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부활 신앙의 증거로 파스카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정의와 평화, 사랑과 진리가 충만한 하느님 나라를 현세에 앞당겨 세워서 우리 민족이 진정한 문명시대를 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파스카를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일은 부활 신앙으로 봉사하며 기도하는 일입니다.





이즈음 폭염이 연일 지속되고 있습니다. 장마철이 끝나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는 소서(小暑. 7월 7일) 절기가 되면 농민들은 뜨거운 뙤약볕 속에서도 논매기와 밭매기를 비롯해서, 퇴비도 마련해야 하고, 그리고 무성하게 자란 논두렁 잡초를 제거하는 등의 작업을 해야 합니다. 특히 하지 무렵에 심은 콩, 팥, 조 등의 밭 작물 김매기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 시기에 수고하며 고생하는 농민들의 희생을 기억하고자 한국 천주교주교회의는 농민 주일을 제정한 바 있습니다. 이에 연중 제16주일에 농민을 위해 발표된 주교회의의 담화문을 인용합니다.


제30회 농민 주일 담화


‘주님께서 보살피고 살려 주시어 땅에서 복을 받으리라’(시편 41[40],3 참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994년 춘계 정기 총회에서, 교회가 우리 농민을 살리는 일을 적극 지원하기로 하고, 우리 농산물 나눔터를 설치하는 데 협조하기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그에 따라 ‘농민들의 어려운 처지에 공감하며’ 창조 질서를 보존하고, 땅과 밥상을 살리며, 가족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가톨릭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이하 우리농)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30년 동안 농민은 생명 농업으로 땅을 일구어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고, 소비자는 ‘우리농 나눔터’를 이용하며 생태 환경 운동에 함께해 왔습니다.


농부는 ‘주님께서 보살피고 살려 주시어 땅에서 복을 받으리라.’는(시편 41[40],3 참조) 말씀을 믿고, 하느님께서 주신 땅의 선물을 충실히 돌보는 청지기로 살아왔습니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한마음으로 연대하며 걸어온 이 길은, 다만 먹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을 돌보는 신앙의 여정이었습니다. 제30회 농민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모두 각 본당과 가정에서 ‘생명 지킴이 운동’을 삶 가운데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농촌의 공익적 가치


‘2024년 농업·농촌 국민 의식 조사’(한국 농촌 경제 연구원)에 따르면, 도시민 10명 가운데 7명이 농업과 농촌의 공익적 가치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고 응답하였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안정적 식량 공급’이 대표적인 가치로 손꼽혔습니다.


이러한 가치를 실현하고자 가톨릭 농민회는 화학 비료와 제초제를 쓰지 않는 유기 순환 농업을 실천하며, 농부의 자긍심과 사명감으로 생명 농업에 헌신해 왔습니다. 이들은 오늘날 공동의 집인 지구를 지키는 파수꾼이자 하느님의 정원사로서 그 소임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농 나눔터, 도·농 생명 공동체의 연결 고리


주교회의 1994년 춘계 정기 총회에서, 농업의 위기는 농민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 아래 도시와 농촌이 함께 살아가는 ‘도·농 생명 공동체 운동’이 제안되었습니다. 이 운동의 결실이 바로 ‘우리농 나눔터’입니다.


우리농 나눔터는 유기농산물의 모양이나 가격보다 그 생명 가치를 우선하는 문화를 도시 사회에 심어 왔습니다. 그럼으로써 단순한 거래를 넘어, 생명을 중심에 둔 나눔을 실천하는 생명 운동의 중심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농 운동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참여하는 ‘공유 경제’를 실천하고 있으며, 이는 교회의 생태 사목 안에서 매우 의미 있는 결실입니다.


생태 영성을 생활화합시다


지난 4월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를 반포하신 지 올해로 10년이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이 회칙에서 “현재의 생활 방식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기에”, 이 방식이 계속된다면 “재앙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161항)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지구의 한계를 넘어선 자원 소비 유형이 당연하듯이 보도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속 가능한 삶은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삶의 전환입니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많은 자원과 에너지를 썼으며 지금까지 쓰고 있습니다. 이제는 절제와 절약의 덕을 기르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또한 “‘우리의 개인적 공동체적 활동에 자극과 동기와 용기와 의미를 주는 어떤 내적인 힘’ 없이, 오로지 교리만 가지고 이 위대한 일에 투신하기는 불가능할 것”(216항)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도록 요청하신 것입니다. 영적인 삶은 세속의 현실과 결코 분리되지 않으며, 창조의 아름다움 속에서, 병든 이의 탄식과 고통받는 이의 신음 속에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깊은 인식에서 비롯합니다.


이에 「찬미받으소서」 210항과 211항은, 의미 있는 생태 전환이 이루어지려면 많은 사회 구성원이 내적으로 동의하고, 지속적으로 변화하도록 확고한 덕을 길러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교회는 창조에 기초한 전례를 장려하고, 생태 영성을 위한 교육과 피정과 양성 프로그램을 꾸준히 개발하고 참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올해도 농민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저마다 삶의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생태 사도직을 수행하며 살도록 또다시 부름을 받습니다.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창세 1,29).


우리 모두 공동의 집 지구를 돌보며, 생명을 나누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우리가 물려받은 땅과 바다를 소중히 돌보고 가꾸어 후손에게 물려주는 일은 바로 지금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2025년 7월 20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

위원장 박 현 동 아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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