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2025.07.26) : 탈출 24,3-8; 마태 13,24-30;
사람이 귀하다고 하지만, 사람이 정작 귀한 까닭은 몸이 생명체 중에 가장 진화한 덕분이고, 더군다나 인간을 사람과 구분 지어 더욱 귀하다고 하는 이유는 그가 영혼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영혼을 의식한다고 말하는 근본은 하느님을 의식한다는 데 있습니다. 천주교의 전통 교리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문답이 이것이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태어났느뇨?” “사람이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태어났느니라.”
피조물인 사람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의식한다는 것은 우리 존재의 근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하느님의 영과 소통하며 자신의 혼을 생기있게 한다는 것은 인생의 기본 리듬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자연히 터득해서 얻는 지혜일 수 없고 부모로부터 배워서만 터득되는 지혜입니다. 신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이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이들을 ‘아나빔’이라고 합니다. 실로 신구약 성경은 아나빔들이 이룩한 문명의 소산입니다.
이들의 안목에 의하면,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우주를 질서 있고 조화롭게 만드셨습니다. 그 안에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별, 지구도 조성하셨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하느님께서는 찬양과 찬송을 받아 마땅한 분이십니다. 생명체가 출현할 무렵, 하느님께서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당신을 알고 믿으며 당신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백성도 창조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안에서 특별히 이끄신 사람들이 바로 아나빔입니다. 이 아나빔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고귀한 사람들을 지켜 내셨는데, 오늘 우리 교회가 기리는 요아킴과 안나 부부가 그 고귀한 사람들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요아킴과 안나는 다윗 가문의 유다 지파에서 태어났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으나, 요아킴이 유다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단식한 뒤 하느님의 섭리로 아이를 잉태하였다고 합니다. 이러니 늦은 나이에 얻은 마리아는 요아킴과 안나 부부에게 무척이나 귀하디 귀한 아이였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성전에 가서 하느님께 봉헌하였음은 물론 성장 과정에서 자신들이 물려 받은 신앙을 고스란히 전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 안에서도 드물고도 귀한 아나빔의 전통이었습니다.
같은 마을에서 살던 요셉은 이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 보았고, 마리아가 정혼할 나이가 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요셉은 서른 살 즈음에 열다섯 살이 된 마리아와 정혼하였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요셉은 자신이 혼인할 수 있는 연령을 훨씬 넘어서, 열다섯 해를 기다려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한 셈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들으신 대로,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실행하는”(탈출 24,3) 아나빔의 정통 신앙을 요아킴과 안나는 마리아에게 전해 주었고, 이는 다윗 가문의 유다 지파에서 자라란 요셉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비단 혈통으로뿐만 아니라 신앙의 전통에서도 요셉과 마리아가 구세주를 낳아 기를 수 있을 만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던 배경은 요아킴과 안나가 이스라엘 백성 안에서도 정통 아나빔이었던 덕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맞이한 운명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아들 예수가 태어나자마자 헤로데의 칼날이 들이닥쳤고, 낯선 이집트로 피신하여 동굴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장성하기 전에 요셉은 세상을 떠났고, 마리아는 홀로 아들을 키워야 했습니다. 서른 살이 된 아들 예수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겠다고 출가한 후에도 시련과 고난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역경을 잘 말해 주는 것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요아킴과 안나 부부를 통해 마리아에게 전해 지고 다시 예수님께 전해진 아나빔의 신앙은 이 역정에서 빛을 발합니다. 예수님께서 일구시려던 복음의 밭에 생겨난 수많은 가라지들은 함부로 뽑지 않으셨던 그분의 땔감이었습니다. 그 가라지 같은 자들을 상대하시는 과정에서 복음의 매력이 빛을 발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이후 이어진 교회의 역사에서도 가라지들은 숱하게 자라났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이단 사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위대하시지만 성부 하느님과 같을 수는 없으니 성부와 성자 사이에 서열을 두자는 ‘입양설’ 내지 ‘양자설’이 유다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호응을 받았는가 하면, 인간 예수님이 특별한 신적 권능을 발휘하여 숱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노시스’라는 특출한 영지를 받았기 때문이라던 영지주의 사상이 합리주의를 신봉하던 그리스계 그리스도인들에게 호응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단 사상들과 사상적 논쟁을 거쳐 가까스로 정통 신앙이 확립되기에 이르렀으나 정작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셨던 예수님의 노선이 역사적으로 진면목을 드러낼 수 있었던 시점은 19세기에 이르러서 였습니다. 중세 말기에 페스트균이 전 유럽에 퍼져서 농노들이 죽어 나가자 노동력이 없어진 상황에서 증기기관으로 새로운 노동력을 발명하게 된 자본가 계층이 농민들을 흡수하여 도시 노동자로 착취하면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1891년에 레오 13세 교황은 그 전까지 행해 오던 관행에 따라서 회칙을 반포했는데, 사회 문제로 주제를 삼아 반포한 일은 처음이었습니다. 그 회칙이 바로, ‘새로운 사태’였습니다. 다행히도 후임 교황들도 이 노선을 따라서, ‘사십 주년’(비오 11세), ‘어머니요 스승’과 ‘지상의 평화’(요한 23세) 등을 반포하자 교회의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모인 교부들이 ‘사목헌장’을 반포하며 가톨릭교회의 쇄신을 결의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교회 쇄신의 노선은 ‘전례헌장’, ‘계시헌장’, ‘교회헌장’ 등에서도 나타났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 밖에도 교령 아홉 개와 선언문 세 개, 하나의 메시지를 반포했는데, 그 중에서도 압권은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이었습니다.
"평신도는 사도직 수행의 권리와 의무를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일치에서 받는다. (...) 사도직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실현되는 것이며, 이 신망애 삼덕은 성령께서 교회의 모든 지체들 마음속에 부어 주신다. (...) 평신도는 현세 질서의 쇄신을 고유한 임무로 알고, 현세 질서 안에서 복음의 빛과 교회 정신의 인도를 받아 그리스도교적 사항으로써 구체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 이와 같은 사도직 활동 중에서 가장 중대한 것은 신자들의 사회 운동이라 하겠다. 공의회는 이런 신자들의 사회 운동이 현세 생활 모든 분야에 파급되기를 바란다."(평신도 사도직 교령, 3,5, 7항)
교우 여러분!
요아킴과 안나 부부처럼 귀하디 귀한 아나빔의 전통이 한국 천주교인들 안에서도 출현하기를 바라며 이 강론을 썼습니다. 또한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은 요아킴과 안나의 기념일을 기해 '조부모와 노인의날'을 지내자고 권고한 바 있습니다. 아나빔의 전통이 노년 신자들 안에서 퍼져 나가기를 기원하는 뜻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