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3주간 금요일 (2025.07.04) : 창세 23,1-4.19;24,1-8.62-67; 마태 9,1-8
해방과 분단, 전쟁과 휴전 이후 냉전 구도가 지속되어 오던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평화 통일에 대한 민족적 열망을 고조시켰던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되었던 오늘, 우리는 양심과 신앙의 문제를 생각케 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양심을 자기 마음 속에 지니게 됩니다. 이는 사람이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입니다. 선행을 하면 기쁨을, 죄악을 저지르면 가책을 느끼게 하는 심적 장치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지니고 있는 이 양심의 반응이 제각각입니다. 그 이유는 양심의 소리를 성찰하는 태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양심을 성찰하는 데 게으르면 양심이 무디어집니다. 심지어 마비될 수도 있습니다. 무디어지거나 마비된 양심을 다시 생기있게 하는 영적인 힘이 바로 신앙입니다.
신앙으로 양심을 바로 세우면, 사람은 비로소 인간이 됩니다. 하느님과 소통하고, 하느님을 닮을 수 있게 하는 존재로 거듭 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신앙으로 양심이 바로 섰을 때 가능합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사가 자신이 예수님께로부터 제자로 부르심을 받게 된 경위를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그가 이 대목을 기록함에 있어서 작지 않은 용기를 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부끄럽게도 유다인 사회에서 공적 기피인물이었을 만큼 부도덕했던 세리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기술하고 있으며, 심지어 자신이 부르심을 받던 자리에는 율법상으로 문제가 많았던 다른 죄인들도 많이 끼어 있었다는 사실까지 밝히고 있습니다. 이로써 마태오는 세리 시절에 감추어 두었던 양심을 회복시켰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마르코나 루카 같은 복음사가들이 같은 내용의 기사를 보도하면서, 동료인 마태오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그저 레위라는 세리가 제자로 부름 받았다고만 드러내고 있는 것과 대조적입니다(마르 2,13-17; 루카 5,27-32 참조). 이로써 우리는 마태오가 세리로 활약하던 당시에 지니고 있었을 세속적 영민함이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이후 영적인 지혜로 승화되어 복음적 영민함으로 변화되어 있음을 확인합니다.
반면에 같은 사안을 두고 바리사이 유다인들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그들은 율법을 대단히 중시하던 자들이었으므로 율법을 잘 지키지 않는 세리와 죄인들을 멀리 하고 있었고, 예수님께서도 멀리 하기를 바랐을 터인데 느닷없이 세리와 죄인들을 불러 잔치를 벌이고 있으니 궁금해서 질문을 한 것이 아니라 반공개적으로 험담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를 눈치 채신 예수님께서 해학성 답변을 하신 겁니다.
“당신네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하고 있으니 내가 당신네 편을 들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세리와 죄인들은 당신네 기준으로 볼 때 율법상 죄인들이니, 나 같은 영적 의사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들 바리사이 유다인이 마태오처럼 복음적 영민함을 갖추었더라면, 그렇게 말고 이렇게 물어야 했습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가난한 이들을 친구로 삼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라는 기준에서 보면, 가난한 이들과 고통 받는 이들을 죄인으로 취급하던 바리사이들은 '율법'이라는 또 다른 우상을 숭배하던 셈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볼 때, 사람이 자기라는 기준을 벗어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자기의 정서와 감정을 감추고 말하거나 억지 표정을 짓기 어렵고, 자기자신은 물론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입장을 견지하기 어려우며, 이로운 방향으로 생각하고 움직이면서 해로운 방향으로는 가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바로 잡아 주는 나침반이 양심이요 이 양심을 살아있게 해 주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각자의 양심이 신앙을 통해 하느님을 반영하고 가리키면 자기의 정서와 감정과 이해관계가 하느님의 관심사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바리사이들이 지녔던 한 조각 남은 양심을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 주도하신 자리인 줄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은 그분에게 대놓고 따지지는 못하고, 제자들에게 묻는 형식으로 항의하였습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이렇듯 초라해 보이는 바리사이들의 양심보다, 오늘 독서인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양심이 훨씬 크고 살아있었습니다. 그는 우상숭배 풍조가 판 치던 칼데아 우르에서 자기 양심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었던 수메르 문명권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양심에는 흠도 있었으니, 자손을 주시겠다시던 하느님의 약속을 기다리다 못해 하가르를 첩으로 들였던 것입니다(창세 16,2). 그의 의중을 꿰뚫어본 아내 사라가 권했다고는 하나, 그는 거절하지 않고 고민도 하지 않은 채 이스마엘을 첫 아들로 얻었습니다. 이런 행동이 사라와 하가르, 이사악과 이스마엘, 더 크게는 셈족과 헴족 사이에 부족간 갈등의 씨를 뿌린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아브라함의 미덥지 못함을 시험하시려 하셨는지, 그의 나이 백 살, 아내 나이 아흔 살에 가까스로 주신 아들 이사악을 당신께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브라함이 주저함이 없이 그 외아들을 바치려고 들었습니다. 그러자 칼을 들어 찌르려던 찰나에 천사를 시켜 막으셨습니다. 아마 이 행동으로 그는 하가르와 이스마엘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양심 점수를 만회했을 것입니다. 몸종 하가르를 남편에게 맡겨놓을 때는 언제고, 막상 하가르가 아들을 낳고 그 아들 이스마엘을 남편 아브라함이 이뻐하는 눈치가 보이자 하가르를 구박하던 모순적인 행태를 보인 사람은 사라였는데, 그렇게 너무도 인간적이었던 사라가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자 아브라함은 정성껏 장례를 치러주었습니다. 원주민인 히타이트 사람들에게 가서 좋은 묘지터를 잡아서 안장해 주었던 아브라함의 양심이 돋보입니다.
교우 여러분!
복음적 영민함으로 양심을 회복시킨 마태오와, 조강지처(糟糠之妻)에 대한 의리를 지킴으로써 양심을 회복한 아브라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리이건 가난한 이들이건 죄다 죄인으로 낙인찍고서는 차마 예수님께 대놓고 따질 수 없어서 애먼 제자들에게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라고 묻던 바리사이들의 알량한 양심은 반면교사로만 삼으십시오.
또한 오늘은 남북한의 두 정상이 분단 이후 처음으로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지 53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대한민국 제3공화국의 박정희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이 합의한 이 공동성명은 국제정세가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 화해하는 분위기 속에서 분단 이후 남북이 처음으로 ‘자주(自主), 평화(平和), 민족 대단결(民族 大團結)’이라는 평화 통일 3대 원칙을 설정함으로써 대화를 통한 통일 원칙에 합의했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 남북한 양쪽에서 전개된 정세는 대화와 통일을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각 체제의 통치를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박정희는 이 해 10월 17일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정당 및 정치단체들의 활동을 중지시켰으며 국회를 해산하였으니, 이것이 박정희의 영구 집권을 도모했던 유신 독재 체제입니다. 김일성도 조선로동당의 우월적 지위를 명시하고 주체사상을 명문화한 사회주의 헌법을 채택했으며 영구적으로 통치하려는 주석 직위를 신설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남북 수뇌는 국제정세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셈이고, 실제로 그 이후 남북한 정부는 적대적 공생 관계를 이어 나갔습니다. 즉, 민족 앞에 두 수뇌는 대화하는 척 했을 뿐, 자기 양심을 속였음은 물론이고 온 겨레와 전 세계인들의 눈을 속였던 위선적인 정치 행위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남과 북 두 체제에서 독재자들의 이러한 반민족적 행태에도 불구하고, 7.4 남북공동성명으로 남북한 겨레 사이에서 촉발된 통일 염원은 끊임없이 통일과 민족 화해를 위한 정치권의 노력을 이어지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991년에는 남북기본합의서가, 2000년에는 6.15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된 바 있으며, 2007년에는 10.4 남북공동선언 그리고 2018년에는 판문점 선언이 발표되었는데, 이 모든 남북 대화는 7.4 남북공동성명의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이라는 평화 통일 원칙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나무위키, ‘7.4 남북공동성명’ 항목 참조]
교우 여러분!
특히 다가오는 8월 15일은 광복 8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날이니만큼, 이를 계기로 남북 두 정상의 대화와 민족 화해 및 경제 교류 노력이 가시화되기를 염원합니다. 윤석열 정권 시절에 남북 관계는 전쟁 직전까지 갔을 정도로 악화되었고 심지어 북한을 도발하여 계엄령의 명분으로 삼으려고까지 했었기 때문에, 이 염원은 절박합니다.
계엄령으로 발생한 내란 사태 속에서 어렵사리 출범한 대한민국의 새 정부가 남북간 평화를 회복하는 노력을 기울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마비된 양심을 다시 생기있는 양심으로 회복시키는 힘은 신앙뿐입니다. 민족이 화해하고 한반도에 평화가 실현되도록 우리 믿는 이들의 기도와 노력이 그래서 반드시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