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2024.1.21.) : 요한 2,22-28; 요한 1,19-28
올해도 어김없이 밝아온 새 해는 창조주 하느님께서 지으신 별들의 운행 질서를 기준으로 정해진 인간의 시간 질서에 따른 것입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별들의 움직임은 일정합니다. 그렇듯이 새 전례력에서 기리는 성인들 역시 일정하게 메시아이신 예수님 생애에 계시된 강생과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향해 살아간 인물들로서, 후대의 신앙인인 우리에게는 교회의 별 같은 분들입니다.
특히 교회가 새 해 첫 날 천주의 모친이신 성 마리아의 대축일을 지낸 데 이어 새 해 벽두에 기리는 성 대 바실리오(330~379)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330~390) 역시 아시아 대륙의 서쪽에 속하면서 일찍이 ‘소아시아’로 불렸던 카파도키아에서 태어나 카이사리아 교구의 주교로서나 콘스탄티노플 대교구의 총대주교로서 활약하면서, 그리스도교의 믿을 교리를 신앙 신조로서 확립해야 했던 초기 공의회에서도 정통 신앙의 수호자로서 지대한 역할을 해냈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메시아 신앙을 중심으로 사신 것처럼, 이들 역시 강생과 십자가와 부활의 계시 진리를 학문적으로 관상하고 탐구하는 한편 기도로써 하느님과 일치하는 수도 생활을 선구적으로 개척한 동방 수도생활의 선구자들입니다.
이 두 성인이 모범을 보여준 바 세상 피조물들에 관한 진리를 추구하는 관상적 자세와 창조주 하느님과 일치하고 통공하려는 기도 생활의 전통은 동방정교회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으며, 이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닦은 것처럼 서방 가톨릭교회가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도 계승해야 할 선교의 전통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해 연말 예수님의 소년 시절에 대한 복음이 선포된 성탄 팔일 축제 제6일(12.30)에 공생활에 나타난 관상과 기도의 균형과 조화에 대해 상기시켜 드린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나 꽃이나 산과 호수 등 자연의 여러 피조물들과 동시대 민중의 고달픈 생활상은 물론 민족의 역사에 대해서까지도 관상적으로 사색하시는 한편, 성령의 이끄심으로 하느님 아버지와 통공하는 기도의 삶을 보여 주심으로써 우리가 그분의 성장 과정을 능히 유추해 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강조한 바 아시아 복음화에 반드시 필요한 토착화의 영성에 대해서도 인용해 드렸는데, 바로 기도와 관상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이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한 가르침도 이런 맥락에서 새롭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교는 관상적인 활동인 동시에 활동적인 관상입니다. 개인과 민족들 전체가 신적인 것에 갈증을 느끼고 있는 위대한 종교들의 고향인 아시아에서, 교회는 긴박한 인간적 사회적 관심사에 투신할 때에도 영적으로 깊이 있게 기도하는 교회가 되도록 부름 받은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기도와 관상으로 이루어진 참된 선교 영성이 필요합니다”(‘아시아 교회’, 23항).
이 선교 영성은 향후 전개될 아시아 복음화 과업에 있어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가르침입니다. 특히 바실리오와 그레고리오의 모범을 계승했던 동방교회의 전통을 배워야 하는 서방 가톨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두 요한이 등장합니다.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세례 운동을 펼치면서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회개로써 준비시키고 있으며, 독서에서는 사도 요한이 정통 신앙을 거스르는 ‘그리스도의 적’들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초대교회에서 시작되었지만 고대교회에서도 지속된 신앙 정통성에 대한 혼돈상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활약으로 초대 교회는 소아시아에서 로마제국에 의한 박해 속에서도 성장한 끝에, 서기 313년에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으로 공인되어서 박해는 멈추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가 교회 안에 생겼습니다. 배교자, 밀고자는 물론 박해자까지 교회에 밀려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는 죽기를 각오하고 믿어야 했지만 이제는 믿지 않으면 로마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불이익을 당하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검증할 사이도 없이 물밀 듯이 들어오는 신자들 때문에 교세는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미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거나 숙고할 겨를도 없이 세례 받은 신자들이 늘어났기 때문에 교회의 전반적인 신앙 열기가 식고 신앙 수준도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또 하나, 박해가 종식되어서 본격적으로 선교활동에 나서야 했는데, 바닥으로 떨어진 신앙 수준으로는 선교는커녕 신앙생활을 유지하기도 힘들어진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박해와는 또 다른 교회의 위기가 닥친 이 황당한 상황에서 바실리오와 그레고리오를 비롯한 선각자들은 이집트 북부와 소아시아 카파도키아의 황량한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황량한 광야에서 최소한도로 음식을 먹고 거친 잠자리에서 은수생활로 목숨 걸고 기도생활에 정진했습니다. 오로지 하느님만이 교회를 살리고 선교를 이끄실 수 있다는 희망에서였습니다. 수도규칙도 아직 없었고 가르침을 줄 스승도 없었지만 이 뜻에 동감한 이들이 생겨나서 수도회 운동으로 발전하여 오늘날 동방 교회 수도회들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이 당시에 바실리오와 그레고리오의 은수 생활에서 그들 주위에 모인 수도자들이 택한 언어는 침묵이었습니다. 은수자들이 늘어나면서 흩어져서 가까이 지내되 홀로 살아가는 공주생활(共住生活) 형태가 생겨났는데 이는 공동생활 형태를 지향하는 수도생활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공주생활에서도 은수생활의 본질인 침묵이 깨지지 않도록 대화는 최소한도로 줄이면서도 꼭 필요한 경우에는 수화나 눈빛으로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오늘날 수도생활 규칙의 일부인 소침묵이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소침묵의 대전제는 대침묵입니다.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이들이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는 최소한도로 줄이려는 뜻도 있었겠지만, 사실은 굳이 미주알고주알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웬만한 사정은 다 알고 있고 또 이해할만한 처지에서 살아갔기 때문에 은수자들의 공주생활에 편리했던 겁니다. 그래서 소침묵은 눈빛대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서로 통해야만 가능한 대화방식입니다. 이상이 보편 초대교회와 고대교회 시대에 생겨난 혼돈상 속에서도 피어난 관상과 기도, 그리고 진리 추구의 구도생활로 이루어진 역사입니다.
이제 한국의 초대교회 사정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면서도 조상제사만을 최고로 치던 조선 사회에서 신앙을 대체하던 종교는 성리학을 종교로까지 떠받들던 유교였습니다. 유교의 우상숭배적 요소들은 우선 인간 존엄성에 어긋나는 신분제도를 들 수 있으니, 백성을 신분으로 나누어 차별하고, 특히 최하층 신분인 노비들은 사고 파는 짐승으로 취급하며 온갖 허드렛일을 시키며 부려먹었습니다. 조선 중기에는 이 노비들이 하도 늘어나서 온 백성의 절반 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나라가 타락해 가고 있었습니다. 사방이, 그리고 도처에 하느님을 부인하고 구세주를 적대시하던 ‘그리스도의 적’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던 셈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경직된 사상 통제를 들 수 있는데, 송시열이 틀을 잡은 이래로 이후에 양반 선비들 사이에서도 주자의 해석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사문난적으로 몰아서 멸문지화를 가했기 때문에 조선 사회는 사상의 감옥과도 같았습니다. 또한 사대주의와 쇄국 및 우민화 정책을 들 수 있는데, 나라의 국경을 육지에서나 바다에서나 닫아버리는 쇄국정책과 유학이라는 학문만을 숭상하려던 나머지 상공업은 물론 국방을 소홀히 하는 정책을 펴면서 폈기 때문에 오로지 중국의 명 왕조만을 쳐다보다가 명(明)이 망하자 이 왕조를 대신하여 ‘소중화(小中華)’로 자처하고자 했습니다.
이 시대착오적인 겨레의 어둠을 뚫고 진리의 새벽을 열고자 했던 선각자들이 이벽과 정씨 삼형제 그리고 주어사와 천진암 강학회에 모였던 젊은 선비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한겨레 시초부터 진리와 평화의 가치로 이끄신 하느님을 천주교 교리에서 발견했고, 천주교 교리에 담긴 서양의 그리스도교 신학을 통해 민족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회복하고자 죽기를 각오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신구약성경과 천주교 교리를 섭렵한 ‘성교요지(聖敎要旨)’, 하느님을 모르고 박해를 일삼는 관리들과 선비들에게 천주교를 알리고자 했던 ‘상재상서(上宰上書)’, 백성을 섬기는 참된 목민관의 자세와 영성을 일깨운 ‘목민심서(牧民心書)’, 나라 살림을 하는 근본 이치를 천주학에 비추어 논한 ‘경세유표(經世遺表)’ 등을 지어 겨레의 지성을 각성시키고자 했습니다.
또한 비록 한문과 유학을 모른다 할지라도 우리 민족의 종교적 영성과 문화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던 일반 백성들도 천주교 교리를 배울 수 있도록 한글로 된 교리서 ‘주교요지(主敎要旨)’와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를 비롯한 4·4조 한글가사를 지었습니다.
특히 이 선각자들의 뒤를 이은 사제 최양업은 백 군데가 넘는 전국 교우촌을 순방하며 성사를 베풀면서 수많은 천주가사를 가르쳐서 박해 중에도 전교활동이 이어지게 사목하였습니다. 치명을 각오하고 부르짖었던 선각자들의 이 외침은 반만년 전에 겨레를 이끄신 하느님의 손길을 되찾으려던 겨레의 빛이었습니다. 그들은 출신 신분이 무엇이었든지 박해에도 불구하고 또 치명을 각오하고 자신들이 “처음부터 들을 것을 간직하려던”(1요한 2,24) 아나빔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신앙 토착화의 노력을 두고 박해자들과 방관자들 그리고 후세의 일부 역사가들은 이를 폄훼하기를, 천주교는 서양에서 온 ‘서학’이며 서양인들의 신을 믿는 ‘외래 종교’이고 로마 교황에 위계적으로 종속된 ‘구교(舊敎)’라고 배척하고 경멸했으며 깎아내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현재의 천주교인들도 신앙 토착화의 사명을 까마득히 잊어버렸고, 서구화에 매몰된 나머지 선각자들이 추구하려던 민족의 정신적 정체성조차도 망각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위에 열거한 신앙 토착화의 산물들이 입증하는 저 귀한 빛을 다시 되찾아야 합니다. 시대를 밝히는 진리를 추구한 구도정신은 물론, 이 같은 관상적 사색과 깨달음에 바탕한 치열한 기도의 전통과, 가난과 소외 그리고 박해를 무릅쓰고 이룩한 교우촌 건설의 공동체 정신입니다.
1980년대에 우리 사회에 가톨릭 붐이 일어서 신자 수가 배가되고 그 여세로 500만 명에 이르렀다가 곧 냉담자가 급증하고 코로나 펜데믹까지 불어닥치자 세례받은 입교자의 1/10만 주일미사에 나오고 있는 현 사태는 선교적 활력을 기준으로 보면 중차대한 위기입니다. 마치 박해가 종식되었으나 신앙 수준은 바닥으로 떨어졌던 로마교회의 실상을 방불케 합니다. 신앙의 활력은 찾아보기 어렵고 선교의 열정은 더더욱 찾아보기 어려운 이 시대의 한국교회의 민낯입니다.
따라서 보편 초대교회 시절에 사막으로 나아가서 오로지 하느님만이 교회를 살리고 선교활동을 이끄실 수 있다는 희망에서 기도생활에 정진했던 선구자들 즉 바실리오와 그레고리오처럼, 하느님 신앙과 민족 정체성으로 잠든 겨레를 깨우려던 우리 겨레의 선각자들 즉 이벽과 정씨 삼형제와 교우촌 신자들이 치열하게 벌였던 지성적이면서도 영성적인 노력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리의 새벽을 열어젖힌 이 지성과 영성이 오늘날 다시 한 번 각성해야 할 우리 천주교인들의 귀감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늘의 별들을 일정하게 움직이시는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구세주 예수님을 기준으로 우리의 믿음과 영성과 삶도 일정하게 움직이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성 바실리오와 성 그레고리오를 기리는 오늘 말씀의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이사 40,3; 요한 1,23).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