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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예수 14
  • 김근수 편집장
  • 등록 2015-07-09 11:01:25
  • 수정 2015-08-20 13:2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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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32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3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34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3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시오. 그 사람에게서 나가시오.”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36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37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38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39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40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41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2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4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합니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입니다.” 4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루가 4,31-44)


갈릴래아에서 예수의 마귀 추방(루가 4,31-37), 병자 치유(루가 4,38-41), 방랑 선교(루가 4,42-44) 활동이 대표적으로 소개되는 단락이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에 병자 치유, 마귀 추방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루가는 알려주고 있다.


루가는 마르코복음 1,21-34를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어느 특정한 날에 예수가 이렇게 했다는 것이 아니라, 거의 매일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이렇게 살았다는 보도다. 31절은 예수가 가파르나움에 비교적 오랜 기간 머물렀음을 말한다.


가르치는 메시아 예수는 방랑 설교자였다. 루가는 가파르나움이 나자렛보다 낮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파르나움이 겟네사렛 호수 북서쪽 호숫가 마을임을 독자들이 알고 있다고 루가는 전제한 것 같다.


가파르나움은 예수의 주요 활동 장소라고 언급되었다. (루가 4,23; 7,1; 10,15) 루가는 가파르나움을 도시polis 라고 표현하는데 유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kome마을이라고 했다.


루가에게 나자렛(루가 4,29), 가파르나움(루가 4,31), 나인(루가 7,11)은 모두 도시였다. 루가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 마을에서 왔다고 했다.(루가 5,17) 예수와 그들의 비중을 대비시키는 뜻에서다. 루가는 도시를 중심으로 활동한 도시의 신학자다. 루가 시대에 그리스도교가 주로 도시지역에서 활발했던 배경이 예수 시절 배경인 것처럼 소개되고 있다.


마르코처럼 예수의 가르침을 두고 일어난 예수의 반대자들과 갈등이 이 단락의 주제는 아니겠다. 그런 갈등은 루가 5,17-6,1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나자렛에서 예수의 가르침에 사람들이 그저 놀라워했다면(루가 4,22), 가파르나움에서 사람들은 놀랄 뿐 아니라 권위있는 말씀으로 여겼다는 사실을 루가는 강조하고 싶었다.(루가 4,32)


나자렛에서 예수의 가르침은 반대에 부딪혔지만 갈릴래아에서 병자 치유는 환영받았다. 어쩌면 이 모습이 오늘 그리스도인의 흔한 모습 아닐까. 가르침은 따르기 싫고 기적은 기꺼이 바라는 우리들의 모순 말이다.


선한 영과 악한 영의 이분법적 세계관은 당시 그리스문화에 널리 퍼져 있었다. 루가복음은 그리스어를 이해하는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여진 책이다. 33절에서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은 특이하다. 이 표현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다.


루가가 무슨 의도로 이렇게 언급했는지 알기는 어렵다. 식민지 피지배 백성으로 사는 심리적 정신적 고통이 악령 들린 사람의 사례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또 얼마나 길고 고통스런 밤낮을 지새울까.


34절에서 마귀는 예수의 정체를 알아차렸고, 그 만남이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감하고 두려워했다. 악인은 선한 사람을 금방 알아본다.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독재자들은 예언자를 가장 먼저 알아본다. 그리고 박해할 태세를 갖춘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부패한 종교인은 누가 진짜 예언자인지 금방 알아챈다.


35절에서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는 모습으로 악령의 무기력함이 폭로되고 말았다. 악의 추한 모습은 언젠가 만천하에 드러나고 만다. 악의 세력이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영원히 감출 수는 없다.


‘하느님 나라’라는 단어는 루가복음에서 모두 38번 나타난다. 그 단어는 오늘 단락 4,43에서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하느님 나라는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다는 사실이 오늘 치유와 마귀 추방에서 강조되었다.


38절에서 예수가 시몬의 장모를 방문한 부분은 조금 의아하다. 루가는 5,11-21에 가서야 예수의 12제자 선발을 처음으로 보도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베드로를 제자로 삼기 위해 오래 전부터 눈여겨보았다는 말인가. 마르코는 제자 부르심 이야기를 복음 앞부분에 배치하였다.(마르코 1,16-20) 38절 ‘시몬’은 그리스식 이름이다. 루가복음 6,14까지 시몬으로, 그 후 베드로로 불러졌다.


예수가 치유 받은 여인에게 왜 침묵하라고 명령했는지 루가는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 치유 받은 여인은 곧바로 이웃에 대한 봉사 활동에 들어갔다. 루가에서 예수를 따르는 여인들의 특징은 이웃에 봉사하는 활동에 집중되었다.


40절에서 ‘손을 얹어’ 병을 고치는 사례는 신약성서 외에 문헌에서 드물게 언급된다. 42절에서 ‘날이 새자’라는 표현은 루가에서만 발견된다.(사도행전 12,18; 16,35; 23,12) 앞선 이야기가 밤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44절에서 예수가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쳤다는 표현은 예수의 활동 범위가 갈릴래아를 넘어 더 넓은 곳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뜻이다.


마르코 시절의 그리스도교 공동체 상황과 루가 시대 공동체 사정이 조금 달라졌다. 마르코는 예수의 실천에 크게 영향 받았다. 회당의 역할을 존중하고 가정, 설교, 기적 이야기가 종요하였다. 마르코보다 20 여년 뒤로 추측되는 루가복음 집필 시기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유다교와 사이가 크게 벌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회당의 중요성이 약화되었고, 그리스어를 쓰는 이방인들이 성서를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이 조절되었다. 루가 시대엔 부자 신자들이 공동체에 많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로 인한 문제가 새로 생겼다. 선교에서 농촌보다 도시가 당연히 강조되었다.


떠나지 말아 주십사 예수를 붙드는 군중의 애처로운 모습에서 로메로 대주교를 사랑했던 엘살바도르 가난한 사람들이 떠오른다. 가엾은 한반도에 사는 한국인들은 가파르나움 사람들의 이 심정을 충분히 알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금 서울대교구장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나라에 중심이 없고 정치에도 종교에도 중심이 없이 마구 흔들리는 대한민국, 대체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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