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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예수 10
  • 김근수 편집장
  • 등록 2015-06-25 10:28:47
  • 수정 2015-08-20 12: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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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군중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8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은 아예 혼잣말로라도 꺼내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9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10 군중이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1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시오.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시오.”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자, 13 요한은 그들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시오.” 하고 일렀다. 14 군사들도 그에게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요한은 그들에게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여러분의 봉급으로 만족하시오.” 하고 일렀다. 15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16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줍니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십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17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입니다.” 18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19 그러나 헤로데 영주는 자기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에, 그리고 자기가 저지른 온갖 악행 때문에 요한에게 여러 번 책망을 받고, 20 그 모든 악행에다 한 가지를 더 보태었다. 요한을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이다.

21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가 3,7-22)




군중이 왜 요한에게 몰려들었을까. 험악한 시대를 사는 불쌍한 사람들이 애타게 기다렸던 무엇이 있었다. 그들이 요한에게 무언가 큰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잘못이 지배층에게 더 있었음에도 요한은 왜 불쌍한 백성들을 야단쳤을까. 착한 백성이 무슨 큰 잘못을 했다고 요한은 그럴까. 백성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니, 좀 심하지 않나.


거친 단어를 쓰는 사람을 다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예언자 요한도 예수도 독사의 자식이라는 욕설을 했다. 부드러운 단어를 쓰는 사람이 다 인품이 훌륭하지는 않다. 말은 그 상황, 내용, 대상, 의도에 따라 자세히 분별해야 한다. 독재자에게 거친 단어를 쓰는 사람과 착한 신도에게 거친 단어를 쓰는 사람이 같은 부류의 사람일까.


요한의 설교는 7절과 10절에서 군중okloi에게, 15절과 18절에서 백성laos에게 확대되었다. 마르코복음에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마태오에는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이 요한의 설교 장면에 등장했었다.


마르코는 요한을 세례자로, 루가는 설교자로 소개한다. 사실 요한은 예언자다. 루가가 이 단락을 쓸 당시에는 요한의 경고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루가는 요한의 경고를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자기 공동체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유다인들이 이방인에게 하던 욕설인 ‘독사의 자식’이 이제 유다인에게 되돌아왔다. 요한은 구원 문제에서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열매’는 교육적 의미에서 자주 쓰이던 단어다.(마태 7,16; 로마 6,22; 갈라디아 5,22)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족보 자랑은 하느님 앞에서 소용없다. 세례 받았다고, 성직자라고 특혜를 기대해서도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만 하느님에게 특혜 받는다. 바울도 같은 경고를 한다.(로마 9,6-13; 갈라디아 3,6-29) 8절에서 돌과 자녀 이야기는 그 히브리어 단어들의 철자와 발음이 비슷해서 생긴 비유 같다.


공동성서(구약)에서 돌은 예루살렘 성전과 연결하여 긍정적인 의미로, 이방인의 제단과 연결하여 부정적인 뜻으로 쓰였다.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를 쓰러뜨리는, 익숙한 농촌 풍경이 소개된다. 넘어진 나무를 태우겠다니, 그 경고의 정도가 더 심해진다. 불은 소돔과 고모라 이후 하느님의 심판 도구로 자주 쓰인 표현이다.(창세기 19,24-; 에제키엘 15,6-7)


경고 대상이 백성에서(10-11), 세리(12-13), 군인 모두 세 그룹으로 이어진 까닭은 무엇일까. 가난에 시달리던 백성은 생계형 비리를 범했다. 가장 힘 있고 부패하기 쉬웠던 세리, 즉 공무원과 군인은 대형범죄를 저질렀다.


로마군대와 결탁하던 민족 배신의 죄보다 돈을 갈취하는 경제 범죄를 요한은 세리에게 더 문제 삼았다. 군인, 즉 로마인이나 이방인으로 구성된 점령군에게 요한은 경고를 잊지 않았다.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라는 말이다.


전리품, 전쟁 포로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전시가 아니라 평시에 군인들에게 하는 경고다. 우리나라 어느 종교지도자가 우리 군대나 주한 미군에게 요한처럼 따끔하게 훈계하던가.


요한은 가난을 이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다. 이스라엘에 가난한 사람이 없도록(신명기 15,4) 이웃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요한이 분배정의와 부패 방지를 말했다면, 예수는 더 심한 요구를 했다.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는 것이다.(루가 12,33; 18,22)


요한과 예수의 이 분명한 차이를 그리스도교는 자주 잊어왔다. 교회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똑바로 들으라. 교회는 부패한 헌금을 거절해야 마땅하다. 헌금을 요구하기 전에, 부패하지 말라고 가르쳐야 한다. 그렇게 하고 있는가. 부패의 결과인 헌금을 모른 체 받는다면, 교회는 부패를 부추기는 셈이다.

15절은 근거로 성서학자 Luz는 요한을 메시아로 보는 요한 그룹과 루가가 논쟁하고 있다고 추측하였다. 그러면 역사의 세례자 요한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을 누구라고 생각했을까.


16절은 초대교회가 유다인, 특히 요한 제자들에게 주는 강력한 선언이었다. 신발, 즉 가죽신발 끈은 주인이 식사하러 몸을 비스듬히 눕히기 전에 종이 풀어주었다. 주인과 종은 같은 자리에서 같이 식사하지 않았다.


17절 ‘꺼지지 않는 불’은 지나친 비유다. 탈 것이 사라지면 불도 꺼진다. 18절에서 요한이 전한 기쁜 소식이 무엇인지 루가는 설명하지 않았다. 요한은 구원이 무엇인지 백성들에게 알려준 사람이라면, 예수는 바로 그 구원 자체이다.


마르코는 헤로데 영주의 아내를 헤로디아로 잘못 알았다.(마르코 6,17) 그녀의 이름은 살로메였다. 루가도 그 실수를 그대로 따랐다. 헤로데가 요한을 투옥한 실제 원인은 무엇일까. 백성들에게 높은 인기를 누린 요한은 헤로데에게 정치적 위협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예수의 높은 인기도 로마 총독에게 거슬렸을 것이다. 나쁜 정치인은 좋은 사람을 싫어한다. 요한이 투옥된 상세한 원인은 루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로메로 대주교는 투옥된 적 없지만, 영화 로메로에서 그는 감옥에 갇혔었다.


오늘 단락에서 루가는 예수의 세례 받음와 요한의 투옥이라는 두 사건을 독자들에게 소개하였다. 그런데 왜 루가는 요한의 죽음 사건을 삭제하였을까. 예수는 요한에게 무엇을 배웠을까. 요한의 저항과 희생을 예수는 주목하지 않았을까.


그란데 신부의 죽음 앞에서 자신을 가다듬은 로메로 대주교, 요한의 투옥과 죽음 앞에서 자세를 다진 예수. 요한의 죽음을 이어 예수는 세상에 등장한다.


예수는 물러서지 않았다. 로메로 대주교도 물러서지 않았다. 계속되는 살해 위협에도 그는 해외로 도피하지 않았다. 정부가 그의 신변 안전을 보장한다고 제안했을 때, 백성에게 보장되지 않는 안전을 주교는 바라지 않는다고 그는 답하였다. 백성은 그에게 환호했다.


예수도 십자가 죽음을 향해 묵묵히 걸어갔다. 세상의 주교들이여, 똑바로 들으라. 순교하지 않는 주교는 주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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