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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희년, 누구를 위한 것일까
  • 염은경
  • 등록 2018-06-22 16:28:45
  • 수정 2018-06-25 12:2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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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설립 50주년을 맞아 ‘평신도 희년’을 지내도록 승인했으며, 교황청 내사원은 한국의 평신도들을 위해 전대사를 수여하는 교령을 보내왔다고 발표했다. <가톨릭프레스>는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 대표 김유철 씨와 천주교 청주교구 신성국 신부, 천주교 인천교구 지성용 신부를 만나 ‘평신도 희년’과 ‘미래 평신도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다. - 편집자 주


Q) 올해는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설립 50주년을 기념해 ‘평신도희년’을 지내고 있습니다. ‘평신도희년’, 어떤 의미일까요?


▲ 제50회 평신도 주일 포스터. (사진출처=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김유철) 2000년에 대희년맞이 평신도선언이란 것이 있었어요. 그런데 매번 이런 행사를 이벤트성으로 하다 보니 아쉬움이 많습니다. ‘휘발유복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일미사는 다녀왔는데 ‘주님의 말씀입니다’하고 돌아서면 잊어버리죠.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행사위주로 선언을 하다 보니 2000년 대희년맞이 평신도 선언이 무엇인지 기억조차 하지 못합니다.


‘평신도 단체결성 50주년 기념’과 ‘평신도희년’은 또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단체결성 몇 주년을 기념하려면, 케이크 자르는 축하 분위기가 아니라 단체가 어떻게 쇄신돼야 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하고 나누어야 하는데 그런 이야기들이 없습니다.  


전대사와 같은 주님의 은총 이야기를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 주듯이 합니다. 다른 종교에 없는 주님의 은총인데 우리가 이걸 어떻게 쓰느냐 고민하기보다 일방적으로 위에서 주고 아래서 받는 식으로 하다 보니 아마 올해도 전례가 끝나고 나면 기억에 남는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평신도가 세운 교회지만, 교회 안에 평신도가 설 자리는 없다

다시 보자, ‘평신도’라는 말은 ‘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선언이다


(신성국) 우선 한국천주교회의 특성중 하나로 꼽는 것이 평신도들에 의해 설립된 역사로 이를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천주교회는 그 어느 나라보다 성직중심주의가 강하고 평신도들은 교구 행사에 동원되는 사람들처럼, 도우미처럼 전락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실상은 평신도들이 설 자리가 없는 수동적인 상태에서 존재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평신도 희년에 이 부분을 재정립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신도 희년에 모든 기획을 평신도들이 한 것이 아니라 성직자들에 의해 계획되고 결정되었습니다. 평신도들이 주체가 되지 못하다 보니 평신도 정신이 반영될 수 없습니다. 평신도는 세상 안에서 복음 선포자로 첫째 자리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평신도 희년의 주제를 ‘세상 속에 평신도’로 잡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김유철) 방금 말씀하신, ‘평신도가 시작한 한국천주교회’에 대해서는 제가 할 말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항상, ‘그래서 어떻게 됐다고?’입니다. ‘그래서 더 성직화가 됐다?’ 이상한 결론이지 않습니까? 


애초에 포인트를 잘 맞춰보면 평신도와 성직자를 이분해서 이야기 하는 것 자체에 모순이 있습니다. 평신도로 시작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주교, 대주교, 아니 교황도 스무 살까지 최소 서른 살까지는 평신도였습니다. 거기서 기능적으로 주님이 주신 카리스마를 받은 것이 특별한 직무를 하고 있는 수도자고, 성직자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평신도 희년은 모두의 잔치입니다. 


평신도로 어떻게 잘해서 성직자가 되고 수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평신도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결정해 누구는 성직자로서 또 누구는 수도자로 살면서 공동의 자산을 어떻게 키워나갈 것인지 고민하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평신도’라는 말은 ‘나는 그리스도인이다’하는 선언입니다. 특수 직책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선언입니다. 그렇게 접근을 하고 앞으로는 기능적인 구분을 기준삼지 말고 모두가 평신도라는 개념으로 이야기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신성국) 지금까지 교회사를 보면 시대의 징표를 제일 정확하게 이야기 했던 것이 평신도들이었습니다. 순교시대에는 사회적 모순 양반체제 안에서 평등사상의 필요성을 제일 절박하게 느껴서 천주교를 도입했던 것이 일반 신자들 이었습니다. 평등사상과 천주교 신앙을 일치시켜서 봤던 것입니다. 일제시대에는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평신도들이 간도지방에서도 독립운동에 뛰어 들고 민족해방을 위해 앞장섰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천주교회의 시대 변화를 제일 먼저 간파하고 활동하는 사람들이 평신도입니다. 교회는 평신도라는 보물과 함께하지 않으면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없다 의미에서 평신도들의 위상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덧 붙이고 싶습니다. 


Q) 사제, 수도자 등 기능적으로 직분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나 각자 맨 처음 신앙인으로서 가졌던 마음자세, 정체성 찾기가 우선되어 한다는 말씀이네요. 그러고 보면 사실 평신도희년 이라는 말 자체가 구분 짓기 입니다. 


▲ 왼쪽부터 신성국 신부, 김유철 대표, 지성용 신부


정체성 찾기, 성직은 ‘봉사의 직무’이지 지배의 직무가 아니다.

제도, 전례, 규율 이전에 본질을 생각하자 


(지성용) 평신도라는 말 자체가 갖고 있는 의미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모두가 평신도로 출발했고, 사제나 수도자로 들어서는 나이가 서른 살 정도 되니까 실제로 인생의 많은 시간을 평신도로 살다 성직이나 직무들을 맡게 되는데 마치 나는 평신도가 아닌 것처럼, 평신도와는 다른 존재인 것처럼 분리된 사고를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성직자와 평신도가 언제부터 이런 식의 구도를 갖게 됐는가 생각해보면 초기교회 박해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박해가 100년 지속됐잖아요. 그러는 사이에 교회 지도자들, 소위 말하는 양반이나 지식인들이 많이 빠져나갔습니다. 병인박해가 있을 즈음에는 교회 초기 지도자들이 거의 사라진 상태입니다. 결국 당시 하층민인 광대, 백정, 천민들이 박해를 피해 고을로 들어가서 여기저기 퍼졌습니다. 실질적으로 신앙이라든지 자성이나 학습이 전처럼 진행되지 않았던 부분이 있었고, 그런 와중에 일제강점기와 해방까지 겪으면서 평신도들이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일제강점기 시대 주교는 조선총독부에 있는 일본 관료들과 대등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주하기 어렵고 권력자들로 인식되다보니 상대적으로 성직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은 그 사람들을 보며 상당히 멀리 있는 사람으로 느끼게 됐습니다. 이런 시기를 40-50년 거치면서 성직은 자연스럽게 지배자 위치에 있고 평신도라 분류되는 성직에 입문하지 않은 교회 대다수 구성원들은 지배자의 세를 과시하는데 도움을 주고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체육관 행사라든지 대규모 성체 현양대회 등의 동원행사를 보면 그 시대의 흔적을 엿 볼수 있습니다. 


최근에 와서 교회 쇄신을 향한 움직임이 조금씩 생기고 공개적으로 문제제기 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교회 조직적인 한계가 시대의 위기와 함께 임계점에 다다라 변화를 향한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실, 2000년도 희년부터 교회의 조직적인 문제가 드러났고 냉담자가 속출하거나 교회 인적 구성이 약해지는 등의 파열음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 더 많은 구체적인 문제들과 사건들이 드러나기 시작했지요. 지금이 중요한 시점입니다. 2017년, 2018년 이 시기, 한국천주교 역사에서 중요한 한 점을 통과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 자리에 부름을 받은 것이 중요한 메시지이고 우리가 함께 치열하게 길 찾기를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김유철) 호칭과 언어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언어가 사람들에게 주는 어감이 있는데, 제 세례명이 스테파노입니다. 성서에서 보면 스테파노는 ‘봉사자’로 분류합니다. 교계제도의 개념으로 보면 ‘부제’라고 이야기 하는데 부제는 우리가 말하는 성직에 들어가잖아요. 성직은 봉사의 직무지, 지배의 직무가 아닙니다. 


지금 계속 평신도 대치점의 용어로 성직자를 얘기하는데 세상 모든 일이 성스럽지 않은 곳이 어디 있습니까. 성당이라고 하는 장소가 거룩해서 성당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가 거룩하기 때문에 성당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작은 공간이 아니라 세상 곳곳에서 만나기 때문에 세상 모든 곳이 성당이 되고 그 일을 하는 모두가 성직에 있는 것입니다. 성직은 특수 직무, 지배 직무를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앞서 초기교회사 이야기를 했지만, 과거 이승훈으로 시작해서 세례를 받고 들어온 사람들이 서로에게 세례를 줬을 때 구배아 주교가 일 년 뒤에 이를 ‘가(假)성직’이라 칭했고 지금도 교회 안에서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과연 아직도 이 용어를 써야 할까요? ‘평신도성직자’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인가요? 평신도 성직자라고 존중하고 우대한다면 개신교가 되나요, 만인 사제직을 실시한 사람들이 되나요? 그렇지 않다면 그분들을 가짜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분들은 한국천주교회를 이끌고 나온 선구자적인 분들입니다. 누가 뭐래도 성직자라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교회법’에 의한 서품을 받지 않았을지라도 용어 자체를 바꿔야 합니다. 그게 초창기 평신도를 바라보는 교회의 눈이 돼야 합니다. 그게 번져서 일상에서 하느님의 일을 해나가는 사람들, 시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믿는 사람들이 하는 일은 성스러운 일이에요. 교회에서 말하는 교계제도를 받아서 지배의 직무를 기준으로 이야기하는 성직이라고 해서는 평신도의 참 의미를 찾을 길이 없습니다. 


(지성용) 현대 교회가 제도로써의 교회에 안착하다 보니 지금 말한 본질적인 내용이나 콘텐츠 자체를 잃어버리고 제도와 형식, 전례와 규율, 규칙 이런 그릇에 관심을 더 갖고 점차 복음은 사라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평신도 희년’ 이라는 말보다, ‘그리스도인의 희년 살기’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Q) 교계제도와 구분 짓기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이 부분은 우리나라의 안보프레임과 같은 맥락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북한에 대해 옹호하는, 다름을 인정하는 말을 하면 ‘종북’이나 ‘빨갱이’라는 말로 몰아세웠죠. 이제 우리는 구분 짓기가 가지고 있는 함정을 성찰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 수도자의 서원기념일을 함께 축하해주는 신앙 선배들 ⓒ 문미정


‘구분 짓기’의 함정을 조심하자

봉사의 직무를 어떻게 해 나가고 있는지 점검하고 소통하자


(김유철) 하느님이 주신 카리스마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각자의 직무가 있을 거예요. 베드로를 보다시피 베드로가 대단한 인물이어서 하늘나라의 열쇠를 최초로 준 것이 아니잖아요. 성경에서 보듯이 아주 덤벙대는 사람이에요. 저보다도 더한 고혈압 환자인 게 분명해요. 나서기 좋아하고, 실수도 많이 해요. 마지막엔 주님을 부정하기까지 합니다. 단지 그분의 카리스마는 그러고 나서 울었다는 것에 방점을 둡니다. 통회할 수 있는 것, 교계 제도 안에서 초대 교황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일상의 모습은 인정을 해야 합니다. 


나서기도 하고 잘못해서 실수도 하고 그럼에도 잘못했다고 회개하기도 하고, 어떤 의미에서든 카리스마라는 주님이 주신, 하느님이 주신 이름 지어 부를 수 없는 각자의 몫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현재 교회 장상들이 갖고 있는 하느님의 선물을 부정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똑같이 인간적인 허물 위에 주신 직무이지 완벽해서 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신성국) ‘성직은 봉사의 직무가 본질이다’, 이것이 핵심인 것 같습니다. 사목이라는 말, 목회라는 말, Ministry(목회)의 본뜻은 다 ‘봉사’입니다. 사목직은 권력이 아니라 봉사직이라는 것이 그 핵심입니다. 성직자들이 흔히 착각하는 것이기도 한데, ‘나는 미사를 집전할 수 있다’, ‘고백성사, 혼인성사를 줄 수 있다’는 것은 엄밀히 말해 모두 봉사행위입니다.


(김유철) 우리가 매일처럼 봉헌하는 미사 용어 안에 분명히 그 용어가 나옵니다. ‘이렇게 봉사하게 하시니 감사 하나이다’라고. 앉아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집전하더라도 공통의 고백이잖아요. 내가 교회 나와서 봉사하게 해줘 고맙다고 스스로 봉사라고 이야기 하는 것, 봉사의 직책으로 얼마나 아름다운 말입니까.


(신성국) 한 발 더 나아가서 교회라는 예수님의 설립 목적이 ‘너희들은 세상에 나가 봉사하라’인데 그것은 사랑을 위한 봉사, 나눔을 위한 봉사, 사람들 생명을 구하기 위한 봉사, 섬기는 일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선교입니다. 성직자는 성직자로서의 특수한 직책을 가지고 봉사해야 하는 것이고 평신도들은 세상 안에서 각자의 직업을 가지고 봉사하는 게 있는 것입니다. 평신도 희년에는 우리들이 지금 봉사자로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김유철) 평신도 희년과 관련한 기사를 봤는데, 첫 번째가 시대의 요청에 따른 사업, 두 번째가 교회 가르침에 따른 사업, 세 번째가 교구장 사목 방침에 따른 사업 그렇게 내려오는 것입니다. 희년을 맞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봉사’라는 개념으로 접근했어야 했고, 아직 시간이 있으니 얼마든지 그 개념으로 전개할 수 있다고 봅니다. 


Q) 결국 평신도 희년의 핵심은, 기능적 직무로 구분하지 말고 모두가 신앙인으로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네요. 사실, 정체성을 찾으면 행동강령이니 뭐니 필요 없어집니다. 내가 누구였나를 생각하다보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 가톨릭프레스 DB


미래 평신도 공동체, 미래는 현재가 결정한다

하느님 나라는 현재 진행형, I.N.G


(김유철)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현재 여러 평신도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런 활동들을 많이 알리고 참여를 이끌 필요가 있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언론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전례적으로 홍보주일을 만들고, 교황 회칙에도 매스미디어의 활용에 대해 언급할 만큼 관심이 많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평신도 또는 단체들은 언론을 잘 활용하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이런 일을 하더라’, ‘평신도들은 이런 일을 하더라’, 알리면서 관심과 참여를 유도하는데 언론이라는 도구를 활용하는 일. 개인이나 단체들이 효과적으로 자신들이 하는 일을 알리고 확대하는 방법일 뿐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적으로 예수의 뜻대로 움직이는 모습들을 자연스럽게 전파하는 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단순히 단체를 키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효과적인 선교까지 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지성용)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잖아요. 성령강림 대축일은 ‘소통’이고, 아무리 진보적이고 훌륭한 콘텐츠가 있어도 소통하는 길이 없으면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소통을 위한 노력과 연대가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유철) 오늘의 주제가 평신도 희년과 미래 평신도 공동체였는데, 미래는 현재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미래는 현재에 하는 일을 그대로 답습할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각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하는 봉사 직무를 효과적으로 전파하고 공유하고 연대하고 함께 나아가는 길이 무엇일지 같이 시작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신학적으로든 신앙적으로든 우리는 ‘이미 와 있는’, ‘아직 오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고 있는 ‘진행형, ING’입니다. 저는 ING를 이렇게 풀이하고 싶습니다. ‘IDENTITY’, 정체성을 생각하고 ‘NETWORK’, 연대를 이루고 ‘GROUP’,그룹으로 가야한다. 이것이 바로 ING의 개념 아닌가 생각 합니다. 향해 가되 정체성을 생각하고 연대하고 그룹을 이루어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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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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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mem2018-06-22 18:44:38

    별 내용이 없는 것 같아서 아쉽네요... 중간에 갑자기 안보프레임이 나오고 종북 빨갱이 단어가 나오고 연결되지도 않고... 이상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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