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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기념사업회 월례미사 강론
  • 김근수 편집장
  • 등록 2015-06-09 10:5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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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현충일이자 성체성혈대축일입니다. 지금 우리는 안중근 기념사업회에서 월례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셋을 연결하는 공통 단어는 '피' 같습니다. 국가를 위해 피를 바친 피, 교회를 위해 흘린 피, 인류를 위해 흘린 피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피의 의미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한국천주교회는 평신도가 세운 교회라고 우리는 알고 있고 교황님도 작년에 말씀하셨습니다. 한국천주교회는 교회 조직보다 성서를 먼저 만났습니다. 성직자보다 평신도를 먼저 만났습니다. 침략을 통한 선교가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신분차별에 저항했고 순교라는 놀라운 모범을 보여줬습니다. 이렇게 세계적으로 드문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천주교회는 평신도가 세운 교회입니다. 이 대의명분에 가장 적절한 인물로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요? 이름 없이 신앙을 실천한 많은 분이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분들만 꼽더라도 윤지충, 정약용, 김대건 신부, 안중근, 김수환 추기경, 장일순선생 등 여러 이름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과 가장 가깝게 죽은 분을 꼽으라면 우선 안중근 의사를 꼽고 싶습니다.



안중근 의사도 순교하셨고, 예수도 순교했고, 얼마 전 시복된 로메로 대주교도 순교하셨습니다. 그분들의 순교에서 한자로 '교'는 그리스도교 ‘종파’를 가리키는 뜻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을 뜻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안중근 토마스는 왜 시복이나 시성이 되지 않았을까요? 우리 조선교회사, 한국교회사를 해석하고 교회 내 친일파 인사를 처리하는데 고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가톨릭교회가 전통적으로 순교자 개념을 라틴어로 odium fidei(신앙의 미움), 즉 순교한 사람이 갖고 있는 신앙에 대한 미움 때문에 순교했느냐 여부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해석에서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로메로 대주교 시복 때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로메로 대주교는 신앙에 의한 미움으로 돌아가셨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감사한 표현이지만, 순교자 개념을 신앙에 대한 미움뿐 아니라 ‘정의에 대한 미움’으로 확장해야 하지 않을까 신학자들이 제안하고 있습니다. 


서양 신학은 신앙과 이성, 즉 '믿는 내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주된 주제가 되어왔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하느냐가 주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새로운 주제는 신앙과 정의, 즉 ‘불의한 세상에서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라는 것입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의롭지 못한 정치권력에게 저항해서 가난한 사람과 고통 받는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 신앙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주제가 우리 시대에 더 의미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서양신학에서 믿음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주 목적이라면, 해방신학에서 불의한 세상을 어떻게 바꾸느냐가 주제입니다. 이것에 비추면 안중근 의사나 로메로 대주교, 특히 예수님은 신앙과 이성보다는 신앙과 정의에 더 관심을 둔 분으로 생각됩니다.


작년에 한국에 오신 교황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 중에 '고통 앞에 중립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중립은 우리 교회에게 엄청난 악마의 유혹입니다. 중립을 교회 내 어떤 사람은 균형감각이라는 말로 기막히게 포장하기도 합니다. 그 균형감각은 속칭 줄타기입니다. 눈치보기, 하는 시늉만 내기 같은 아주 사악한 뜻을 가진 말입니다. 그것을 교묘한 용어로써 속이는 것입니다. 


중립이나 균형감각은 나쁜 단어입니다. 예수님도, 로메로도, 안중근도 균형감각은 없었습니다. 만일 그분들에게 균형감각이 있었더라면, 그분들은 체포되지도 죽임 당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가난한 사람과 희생자를 확실히 편드는 종교입니다, 균형감각으로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아무런 불평을 듣지 않는, 기막힌 줄타기를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종교적 교리논쟁 탓에 희생된 분이 아닙니다. 확실하게 가난한 사람 편을 들었기 때문에, 확실하게 정치적 갈등에 포함되었고 돌아가셨습니다.


안중근 의사, 로메로, 예수님에게 공통되는 점은 무엇입니까?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나이, 병, 사고로 돌아가신 분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다가 목숨을 바친 분들입니다. 


그동안 우리 가톨릭교회에서 왕직, 사제직은 전통적으로 강조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예언직은 무시되어 왔습니다. 이것을 우리 시대에 다시 살려야 합니다. 안중근 의사나 로메로 대주교가 그런 분입니다.


오늘처럼 불의한 권력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에 교회가 박해를 받고 있지 않다면, 교회가 무엇인가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불의한 세상에서 교회가 박해를 받고 있지 않을까?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정직하게 살펴야 됩니다.


박해받지 않는 줄타기를 균형감각이라는 말로 위장해서는 안 됩니다. 현재 한국천주교회에서는 정말로 순교영성이 부족합니다. 순교자 마케팅은 기막히게 잘 하는데, 순교자 마케팅에 앞장서는 사람 중에 순교하려 애쓰는 준비하는 사람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순교 마케팅은 잘해도 순교하지 않는 한국교회의 현재 흐름에 대해 안중근 의사, 로메로 대주교는 반대할 것입니다.


엘살바도르에 로메로 대주교가 계시다면, 한국에는 안중근 의사가 있다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저희 가톨릭프레스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 로메로 대주교, 안중근 의사를 세 명의 대표적 인물로 강조하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안중근 기념사업회, 안중근 평화연구원과 더 협조하여 안중근 토마스를 신도들에게 효과적으로, 적절하게 알리는 일에 저희 가톨릭프레스가 애쓰고 싶습니다. 


오늘 성체성혈대축일에 안중근 평화연구원에서 그리스도 성체성혈축일을 멋지게 뜻 깊게 지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교의 빨간색 모자는 순교의 색깔입니다. 이번에 로메로 대주교도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주교이자 순교자라는 아름다운 호칭을 얻었습니다. 


주교는 순교하는 사람입니다. 순교하지 않은 주교는 아직 주교가 아닙니다. 빨간 모자만 썼다고 주교가 아니고, 순교하지 않으면 주교가 아닙니다. 이런 교훈을 로메로 대주교 시복식을 보고 한국의 주교들이 깨달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천주교회는 안중근 의사 앞에서 크게 반성해야 됩니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습니다. 또 신앙의 후예들에게 순교라는 아름다운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모범이 한국 천주교회에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열심히 살아보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가 세상에 나왔다 사라졌지만, 종교 창시자가 자기 목숨을 희생한 경우는 예수님 외에 거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순교하는 것이 뼛속 깊이, DNA처럼 박혀있는 종교입니다. 그 사실을 우리는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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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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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mh52502015-06-11 12:43:08

    중립, 중도란 말은 어쩌면 양쪽에 양다리를 걸치고 보험을 들고있는 형국이지요.
    시류에 따라 기울어진 상대를 파악하여 언제든지 붙을수 있다는 논리라 생각합니다.
    리스크 관리인 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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