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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예수 2
  • 김근수 편집장
  • 등록 2015-06-03 12:18:11
  • 수정 2015-08-20 12: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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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유다 임금 헤로데 시대에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로서 즈카르야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으로서 이름은 엘리사벳이었다. 6 이 둘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7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둘 다 나이가 많았다. 8 즈카르야가 자기 조 차례가 되어 하느님 앞에서 사제 직무를 수행할 때의 일이다. 9 사제직의 관례에 따라 제비를 뽑았는데, 그가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기로 결정되었다. 10 그가 분향하는 동안에 밖에서는 온 백성의 무리가 기도하고 있었다. 11 그때에 주님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분향 제단 오른쪽에 섰다. 12 즈카르야는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13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즈카르야여. 당신의 청원이 받아들여졌습니다. 당신의 아내 엘리사벳이 당신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시오. 14 당신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입니다. 15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16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 17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입니다.”


18 즈카르야가 천사에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하고 말하자, 19 천사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 당신에게 이야기하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파견되었습니다. 20 보시오,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당신은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입니다.”


21 한편 즈카르야를 기다리던 백성은 그가 성소 안에서 너무 지체하므로 이상하게 여겼다. 22 그런데 그가 밖으로 나와서 말도 하지 못하자, 사람들은 그가 성소 안에서 어떤 환시를 보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몸짓만 할 뿐 줄곧 벙어리로 지냈다. 23 그러다가 봉직 기간이 차자 집으로 돌아갔다. 24 그 뒤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였다. 엘리사벳은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25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 (루가 1,5-25)





세례자 요한의 출생, 세례, 사명, 죽음에 대한 전설이 많이 퍼져있었던 것 같다. 공동성서(구약성서)에서 왕의 집권 시기에 따라 시기를 밝히곤 했다.(사무엘하 21,1; 역대기상 4,41) 헤로데왕은 유다인의 왕으로 소개되었다. ‘유다’라는 지명에서 루가는 이스라엘 12부족중 하나인 유다족이 살던 지역, 또는 옛날 남쪽 왕국뿐 아니라 유다인이 거주하던 지역 모두를, 즉, 갈릴래아와 페레아를 포함한, 가리키고 있다.


사제는 24등급으로 나뉘었다.(역대기상 24,7-18; 느헤미야 12,1-7. 12-21) 사제는 제비뽑기에 따라 순서를 정해 일 년에 두 차례씩 일주간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다. 즈카르야는 8등급에 속한 평범한 사제였다.(역대기상 24,10) 대사제의 임무는 제비뽑기로 정해지진 않는다.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아론의 자손으로서 사제가문 출신이다. 사제의 아내는 사제계급 출신이어야 했다.


즈카르야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의로운enantion 사람으로 소개되었다. 사제나 사제의 아내는 당연히 의롭다는 뜻은 아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의로운 삶 덕분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인물로 등장한다.(레위 26,3-; 신명기 7,11-14) 그런 그들에게 아이가 없다는 사실이 7절에서 놀랍게 말해지고 있다. 처벌받은 탓이 아니라는 뜻이다.


'kathoti아이를 못 낳는'이라는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루가에서만 보인다.(루가 19,9; 사도행전 2,24; 4,35) 엘리사벳의 아픔에서 독자들은 사라(창세 11,30), 레베카(창세기 25,21), 라헬(창세기 29,31), 한나(사무엘상 1,2) 등 같은 운명의 여인을 떠올렸을 것이다.


8절에서 장면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바뀌었다. 아침과 오후 두 차례 향을 피우는 제사는 그 절차가 자세히 정해져 있다. 사제들만 출입 가능한 안쪽 제단에 일곱 가지 모양의 촛대와 빵을 올려놓는 책상이 있다. 이곳과 지성소 사이에는 커튼이 쳐져 있어서 하느님이 계신다는 지성소와 구분되었다.


제사에 언제나 여러 사제가 참여하였다. 사제 단독으로 그곳에 들어가는 일은 금지되었다. 즈가리야에게 천사가 나타나는 장면에서 백성은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데, 루가는 왜 10절에서 백성이 기도하는 모습을 소개했을까. 20절에서 말을 못하게 된 즈가리야를 루가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이다.


제비뽑기, 성전에 입장, 제물 봉헌으로 진행되는 제사 순서를 루가는 알고 있다. 11절에서 천사는 제단의 오른쪽에 선다. 오른쪽은 귀하고 높음을(시편 110,1) 뜻한다. 천사는 언제나 서 있다. 재판관이나 스승은 앉는 자세를 취한다. 12절에서 천사가 나타날 때 ‘놀라 두려워’하는 것은 그런 장면에서 흔하다.(토빝 12,16; 다니엘 8,17)


천사가 말하는 모습은 고대 문학에서 자주 보인다. 천사가 즈가리야에게 아들의 탄생을 예고하는 장면에서 독자들은 이스마엘(창세기 16,11-; 이사악(창세기 17,15-19), 등 공동성서에서 비슷한 역사를 생각했을 것이다.


14절에서 태어날 요한의 역할이 설명되고 있다. 아기는 가족의 기쁨이요 많은 사람의 기쁨이다. 아기가 태어나는 기쁨도 있지만 예언자가 될 인물이 태어나서 민족에게 기쁨을 준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하느님께서 아기뿐 아니라 이름까지 선서하신다. 아버지가 자녀의 이름을 짓곤 하였다.


15절에서 술 마시지 않는 것을 하느님과 특별히 가까운 사람의 표시로 소개한다.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라는 표현은 예언자 운동의 흔적을 보여준다. 1세기에 그 표현은 활발했다.(갈라디아서 1,15) 요한이 그전의 모든 예언자들보다 더 특별한 예언자임을 나타내고 있다. 당시 유다교 개혁운동 흐름에서 마지막 예언자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겠다.


하느님은 개인을 선택하여 큰일을 맡기신다. 요셉, 모세 뿐 아니다. 사실 하느님은 우리에게도 큰 역할을 이미 맡기셨다. 우리가 그것을 모르거나, 알고도 모른 체 하거나, 거절하거나, 배신했는지 모른다. 16절에서 요한은 자기 민족을 하느님께 돌아오게 할 인물로(역대기하 24,19; 느헤미야 9,26) 언급되고 있다.


17절에서 엘리야가 언급되고 있다. 마지막 심판 날에 하느님의 분노를 줄이기 위해 죽음에서 돌아와 하느님을 설득한다는 전설이 예수 시대에 널리 퍼져 있었다.(말라기 3,1; 23-) 현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언제나 막막하다. 가난한 사람들이 구세주를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은 얼마나 절실한지. 그런 기대는 어느 시대나 언제나 있는 것 같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천사에게 질문한 즈카르야는 천사에게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라는 핀잔을 듣는다. 그리고 말 못하는 처벌을 받는다. 이런 경우는 공동성서에 전혀 없었던 일이다.(다니엘서 10,15에서 다른 이유로 처벌이 내려졌다.) 같은 상황에서 비슷하게 질문한 아브라함도, 예수 어머니 마리아도 질문이 불신으로 여겨지지도 않았고, 처벌받지도 않았다.


21절에서 백성들은 왜 이상하게 여겼을까. 지성소 가까이, 즉 하느님 가까이에 있는 시간은 아주 위험하다고 유다인은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적지 않게 낯설고 동의하기 어려운 생각이겠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배울 점도 있다. 교회 안에서 하느님을 아주 가까이 하고 있다고 자부하거나 인정받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잘못 말이다. 하느님은 내게 내 심장보다 더 가까이 계신 분이지만, 하늘보다 더 멀리 계신 분이기도 하다.


즈카르야는 말만 못할 뿐이었다. 그는 글로 써서 사람들에게 천사와 장면을 알릴 수도 있었다. 사제들만 들어가는 곳에서 일어난 사건을 루가는 어찌 알았을까. 어느 사제가 즈가리야와 함께 제사를 드렸는지, 제사 드린 시간은 언제였는지, 그런 상세한 사실에 루가는 관심이 없다. 오늘 단락은 여러 모로 허술하게 꾸며진 이야기다.



여기서 루가의 의도가 드러난다. 루가에게 요한의 장차 역할을 독자들에게 알리려는 생각 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다음다음 문제였다. 성서를 읽을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성서의 메시지는 제대로 알아듣되, 성서에 나온 이야기를 실제 사건으로 여길 필요는 없는 경우도 있다.


루가는 오늘 이야기를 왜 썼을까.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가 하느님과 계속 연관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옛 조상들에게 하신 것과 똑같은 모양으로 지금도 계속 이스라엘 민족에게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하느님이 어디 이스라엘만 신경 쓰실까.


천사가 즈카르야가 아니라 엘리사벳에게 나타나서 아이 탄생 소식을 전했다면, 어땠을까. 꼭 남편에게 나타나서 말하고, 남편만 알거나, 남편이 먼저 알고 그 다음에 아내에게 전해야 했을까. 그런데, 천사는 예수 탄생 예고를 요셉이 아니라 마리아에게 직접 하게 된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를 준비하는 역할로 주로 설명되었고, 불의한 권력에 대한 요한의 비판은 소홀히 다루어졌다. 세례자 요한이 강조한 것은 회개와 정의였다. 회개와 정의를 통해 백성을 하느님에게 돌아가게 하고 백성들을 서로 가까이 하게 하는 역할이었다. 그 역할은 오늘 그리스도교에 필요한 덕목이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에게 회개와 정의의 중요성을 배웠다. 서양신학이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주로 다루었다면, 해방신학은 신앙과 정의의 관계를 주로 다루었다. 세례자 요한은 서양신학자보다 해방신학자에 가깝다. 세례자 요한보다는 예언자 요한이라는 호칭이 내용상 더 적절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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