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로메로 대주교 시복이 생각나게 하는 것들
  • 이상호 편집위원
  • 등록 2015-05-31 10:40:45
  • 수정 2015-05-31 10:43:04

기사수정


“영화가 완전히 새롭네. 과연 신은 있는가? 를 재차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게 하네. 무력에 대해 비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이 과연 사랑이고 신의 뜻인가, 아니 예수님 뜻인가, 다른 신들은 그렇지 않지 않았나? 다 죽어 없어지는데 무슨 사랑타령인가. 자신만 아니라 딴 사람들도 모두 죽이는데.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고, 신은 아예 없는 것인가? 그래도 결국 폭력 없는 세상이 사랑이겠지. 영화를 보면서 계속 그런 생각이 들었어.”


잠이 안와 무심코 튼 TV에서 ‘미션’이란 영화를 보고나서 한 친구에게 보낸 핸드폰 문자 메시지다. 발신 메세지함을 열어보니 1년 전인 2014년 5월 4일 새벽 1시 26분에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엘살바도르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마침내’ 시복이 된다는 소식을 접하자 먼저 떠오른 것이 ‘미션’이라는 영화였다. 18세기 스페인 제국주의자들의 남미 침략과 수탈이, 악랄함과 잔혹함을 십자가 뒤에 숨기고 극성을 부릴 시절, 그래도 원주민 편에 섰던 스페인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그린 그 영화가 로메로 주교와 내 머리 속에서 한데 섞였다.


로메로 주교가 자신이 믿는 신의 뜻을 전하려다가 같은 신을 믿는다는 독재자의 총탄에 쓰러지게 만든 그 땅, 그 신을 그 땅에 들여온 선교사들과 그 후손들, 그 종교 때문에 인간 이하의 생활로 떨어졌다가 이제 겨우 그 종교를 붙잡고 다시 최소한의 인간적인 수준으로 올라서려는 그 땅의 사람들... 그런 잡다한 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다음으론 해방신학, 가난한 사람들과 가난한 교회, 그리고 가난한 사제가 뒤를 잇는다. 예수님 얼굴도 떠오른다. ‘이 소식을 듣고 어떤 표정을 하실까?’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이내 사라진다. 로메로 주교 시복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연스럽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로메로 주교가 성당에서 미사 도중 군사독재정권의 총에 쓰러진 때가 1980년 3월 24일. 그로부터 두 달이 채 못돼 지구 반대편에서는 광주민주화항쟁이 일어났고, 군사독재정권의 총에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다.


로메로 주교는 우리 가톨릭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을 다시 한 번 바라보게 한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서울대교구 총대리 조규만 주교가 지난 2월 1일자 ‘서울주보’에 쓴 ‘성령과 악령을 구별하는 법, 겸손’이란 글이다. 조 주교는 “우리 주변에는 악의 세력들이 맴돌고 있습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들 자세를 보이고 있습니다.”고 시작했다.


그러면서 “‘교황님이 다녀가셨는데 왜 한국 교회는 바뀌지 않느냐?’고 외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 정도로 교회가 바뀔 것 같으면, 우리 교회는 수도 없이 탈바꿈해야 했을 것입니다.”고 썼다. 그 다음 대목은 더 나간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수난 받고 죽음을 겪으셨는데도 세상은 그렇게 바뀌지 않았습니다.”라고 했다.


지난해 이 땅을 찾은 교황님은 교회는, 성직자는 어때야 하는 지 그 모범 답안을 몸소 확실히 보여주셨고, 이를 지켜본 우리 교회 성직자들은 어느 정도 따를 것 같이 보였는데, 교황님이 떠나시자 언제 그랬냐는듯 하니까, 조 주교 말대로, 많은 사람들이 외쳤던가 보다. 그 말이 조 주교는 참으로 듣기 싫었고, 그래서 그런 글을 주보에 실었을 것이다.


‘교황, 아니 예수가 와도 우리 교회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를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선언한 이 글을, 오래 교회에 다닌 한 신자는 ‘한국 천주교사에 남을 역사적인 글’이라고 규정했다. 지금까지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우리 교회 지도층과 고위 성직자들은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니, 바꾸자고 주장하는 너희들은 결코 어떤 식으로든지 항의하거나 불만을 말하거나 하지 말고 아예 입을 닫고 있으라, 라는 ‘기득권 절대 수호 선언문’이라는 것이다. 아니 ‘선전포고문’이라는 것이다.


다른 몇몇 신자들의 소감도 비슷했다. 그대로 옮겨본다.


“이해할 수 없군요. 독재자나 할 수 있는 궤변과 강압이란 생각이 듭니다.”

“칼 라너 신부님이 교회의 기둥은 성프란치스코와 같은 성인들이지 교황 주교 추기경이 아니라 했으니, 화는 나지만 기대하지 말아야겠단 생각이 듭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려 오셨습니까?(서울교구 지도자 올림) 이런 말이라고 해야 예수님이 나설 것이 아닐까요?”

“교회 지도층은 절대 변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으로 읽었습니다. 헐!”

“정의로운 변화가 두려운 자들의 몸부림이죠. 하기야 그 사람들이 교황님이, 아니 예수님이 오신들 변하겠어요?”


대충 그랬다. 그런데 백번 양보해서 교황님은 그렇다고 치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도 세상을 그렇게 바꾸지 못했다니, 예비신자 때부터 귀에 못 박히게 들어온 십자가의 의미가 갑자기 엉망진창이 되면서, 그럼 예수님도 헛일을 하셨나? 예수님을 왜 믿는거지? 라는 불경한 생각마저 들었다.


1989년 바티칸의 지원으로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영화 ‘로메로’는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로메로 주교에 대한 많은 것들을 알려준 인상 깊은 영화다. 그 영화를 보면 로메로 주교는 끊임없이 살해 위협을 받으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해 행동한다. 그는 군사정권으로부터 “성직자의 옷은 방탄이 아니다”라는 말까지 들었다. 목숨을 내놓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한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월호 유가족 위문과 노란 리본을 다는 것이 정치적이지 않느냐는 기자 질문(질문 자체가 지극히 한국적이지만)에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는 명쾌한 말로 모든 논란을 일시에 잠재웠다.


갑자기 삶의 터전과 일자리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농성과 이들을 위한 거리 미사, 제주 강정, 밀양, 용산, 두물머리 등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과 평화로운 삶을 위한 그 수많은 투쟁의 현장에 우리 교회 주교들은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염수정 추기경은 한 공식적인 자리에서 신부들의 시국미사 대한 견해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런 것은 홍보 담당에게 물어보라고 답했다. 뚜렷한 주관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어느 한 쪽에서는 비판을 받는 대답은 아예 안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것일까. 초청에 응해 나온 자리에서, 그것도 누구도 예상할 수 있는, 예상했던 질문에 대해 왜 그런 식으로 밖에 대답하지 못했을까?


로메로 주교는 정부 고위 인사가 참석하는 공식적인 자리에는 결코 참석하지 않았다. 혹 그들에게 묵시적으로라도 동의한다고 비칠까 그랬다. 대신 그는 매주 일요일 교구 방송을 통해 지난 일주일동안 얼마나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 그럼에도 왜 희망을 가져야 하는 지 등에 대해 끝없이 설교했다.


살해되지 전날 방송에서는 군인들에게 그들이 형제인 농민들을 죽이고 있다며, 어떤 군인도 하느님의 뜻에 거스르는 명령에 복종해서는 안 되고 양심을 되찾아 죄악으로 가득 찬 명령보다는 양심에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군인들에게 부탁하고 요구하고 명령했다. 탄압을 중지하라고. 그리고는 살해됐다.


미국 카터 대통령에게는 군사독재정권 유지에 악용되는 원조를 즉시 중단할 것을 요구하는 공개 서한을 보내기도 했으며, 교황을 만나서는 엘살바도르의 상황을 자세히 전하기도 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청하지도 않은 자리에서 예상 밖의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우리 교회 지도자들의 행태가 자꾸 겹쳐 떠오른다.


로메로 주교는 남미에서 거세게 불고 있는 해방신학 바람을 잠재우기 위해 교황청이 특별히 신경 써 임명한 보수적이고 내성적인 신부였다. 해방신학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현장보다는 책이 좋은 책벌레였다. 그런 그가 농민들의 협동조합 조직을 돕는다는 이유로 피살된 오랜 친구인 예수회 사제의 죽음을 겪으면서 극적으로 변화했다.


염수정 서울대교구 교구장의 추기경 임명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로메로 대주교의 경우를 떠올리면서 혹시나 했었다.


2009년 11월 7일자 한 신문에 로메로 대주교 피살 현장의 사진이 실렸다. 엘살바도르 정부가 그 범죄의 책임을 인정했다는 사진 설명과 함께였다. 사진 한 가운데 큰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이 그 밑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로메로 대주교를 바라보고 있고, 그 옆에는 수녀 등이 울부짖고 있다.



1980년 3월 31일자 워싱턴포스트는 이렇게 썼다. “로메로 대주교는 군사정권이 오랫동안 지배해온 중미 국가에서 폭력에 올라타고 질주하는 사회가 완전히 내전에 빠져버리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가 죽은 후 엘살바도르는 무려 12년이나 지속된 ‘대량 학살’이라 불리는 내전에 돌입했다.


그가 왜 시복되는지. 그 이유를 좀 더 분명히 알 것 같다. 그런데 갈수록 갈등의 폭과 깊이를 더해가는 우리에게는 그런 신부가 없는 것일까. 세계에서 유일하게 평신도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교회가 세워진 그런 거룩한 땅인데. 로메로 주교의 시복은 참으로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