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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의사소통”
  • 김기환 수사
  • 등록 2015-05-25 11:36:27
  • 수정 2015-05-29 14: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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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책(생태영성, 르웰린 보간리 엮음)을 전반적으로 한번 읽어 본 소감은 굳이 딱 정할 수는 없지만 한가지의 주제를 정한다면 그것은 “의사소통”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쉽게 말해서 의사소통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의사소통을 말하는 것보다는 전체적으로 통틀어서 자연과의 의사소통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자연과 의사소통이라고 해서 자연 피조물들을 사람처럼 대화를 주고 받는다 라기 보다는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을 깨닫고 우리는 그 선물을 알아보게 됨으로써 자연의 숭고함과 신비스러움과 더불어 경외스러움을 우리 자신의 영안에서 몸과 마음으로 깨닫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선 8장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웬델 베리가 쓴 글을 읽고서 여기서도 핵심주제는 자연과의사소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웬델 베리가 쓴 글이 다른 저자들의 책 내용들에 비해서 자기 독백형식으로 글을 썼기 때문에 그것을 요약한다는 것이 저는 솔직히 정리가 잘되지 않았습니다.


“이걸 어떻게 정리하고 요약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 내용의 핵심주제가 “자연과의 의사소통”이기에 조금은 정리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글 내용의 첫 번째 부분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글 쓰는 목적은 그 선물들에 대해 감사와 공경을 표하고, 사람들의 혀가 그럴듯한 거짓말들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라오” 라고 말하는 것처럼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들을 알아보고 그 대자연이 말하는 소리를 우리 마음과 영안에서 알아듣는다면 그것이 바로 “자연과의 의사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러한 의사소통을 잃은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자연은 분리가 되었습니다. 자연은 자연이고 우리는 우리라는 생각으로 자연과의 소통이 깨어졌고, 우리도 자연과 한 일부분이라는 생각보다는 인류를 개척하고 개발하고 발전을 이루어야하는 터전으로 인간의 편안함과 편리성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갈아엎어야 하는 터전으로 변한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웬델 베리는 말합니다. “세상이 쓸데없는 소리들로 산산조각 나는 것은 사물들이 그 이름들과 이혼한 이후부터라오”(108p하단부분) 라고 말한 것처럼 “그 이름들과 이혼한 이후부터”라고 하는 이 말은 곧 자연과의 의사소통에서 깨어지고 사람들의 편리성에 의해서 자연을 단지 갈아엎어야 하는 터전으로 생각하는 또 다른 말의 표현인 것입니다.


우리가 자연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다시금 되찾고 깨닫게 될 때에는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수 많은 것들을 보게 될 것이며, 듣지 못했던 수 많은 것들도 또한 듣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위에서 말한 자연과의 의사소통을 체험했던 바를 여기서 잠깐 나누고자 합니다.


작년 이맘때쯤 밀양 송전탑이 들어서기 전이였고, 저는 밀양 평밭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저는 경찰들의 동향을 살펴보기 위해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고, 그때 찰나에 갑자기 아주 작고 예쁜 새 한 마리가 컨테이너박스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새는 자기가 들어온 출구를 찾지 못해 계속 돌기만 했고, 결국에는 지쳐 창문턱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지쳤던지 제가 손으로 만져보고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도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듯했습니다.


자연과의 의사소통 1

▲ 처음에 들어와 창문틀에 앉은 모습
▲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저앉은 모습



그때에 갑자기 창문 반대편 쪽에서 또 다른 같은 새 한 마리가 주저앉은 새를 마주보고 자기를 보란 듯이 날아다니며 왔다갔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주저앉은 그 새는 다시 일어서 날더니 출구를 찾아 밖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전 이 모든 광경들을 제 눈으로 보면서 한 가지 크게 깨닫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였습니다. 그 새들은 저에게 가난한 이들, 어려운이들, 억압받는 이들과 연대를 왜 하는지, 어떻게 하는지를 가르쳐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고통 중에 있고, 절망 속에 있고,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에 있었던 그 새에게 힘이 되어 준 것은 바로 그 와 똑같은 다른 새 한 마리였습니다. 그 새가 주저앉은 새와 함께 하지 않았더라면 함께 있어주지 않았더라면 절망 속에서 컨테이너 박스에 나오지 못한 체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 창문 밖 새를 보고 다시 일어선 모습
▲ 새가 날아간 컨테이너 출입구


저는 위에서 말한 새들을 만난 이후로 가난하고 억압받고 고통 중에 있는 이들과의 연대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하고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변화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깨달음이 책에서 배운것도 아니고 그 어떤 누구로부터 보고 배운 것이 아니라 바로 말 못하는 새들을 통해서 배우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위에서 말한 “자연과의 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새들은 저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들을 수가 있었고, 보여주지 않았지만 볼 수가 있었고,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저는 배웠습니다. 그 새들이 저에게 큰 스승이 되어주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저는 밀양, 쌍용, 강정, 세월호 등 여러 어려움 중에 있는 이들과 함께 연대하면서 항상 제 마음속에는 그 새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8장의 마지막문단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동물들을 각각 그 참된 모습으로 만든 천재성을 생각해봐요. 딱정벌레, 여우, 잉어, 제비는 각각 빛을 만들어 그 속에서 빛을 뿜어내지요. 그 동물들은 자기들이 사는 곳에서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지를 (우리보다)더 잘 알지요. 그래서 독자들이여, 나는 참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오.”


제가 위해서 언급하였지만 연대가 무엇이고, 왜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준 것은 책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작은 새들이었습니다.


그 새들은 우리보다 더 연대를 할 줄 알았고, 함께 있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으며, 그러한 진리들은 새들 속에서 뿜어내는 찬란한 빛이며, 저는 그 새들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연의 가르침들은 제게 연대가 무엇인지, 참 사람이 무엇인지 더욱더 일깨워주었습니다.



제 9장 성스러운 장소들의 시대에는 


이번에 발제를 하게 되는 「제 9장 성스러운 장소들의 시대에는」 이라는 주제와 내용도 8장의 발제내용의 연장이라고 봐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번 9장에서도 마찬가지로 핵심주제는 “성스러운 존재와 장소와의 의사소통”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장에서의 내용들을 하나로 묶어서 몇 마디의 문장으로 표현을 하자면 9장의 첫 부분에 나오는 문장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곳은 모든 것이 한 장소에 있는 교회와는 다르다. 우리는 성스러운 장소들이 어떻게 스승의 역할을 하는가를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아메리칸 드림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하는 바위들을 원한다.” 


위에서 말한 문장에서처럼 성스러운 장소는 곧 자연이 있는 곳이며 살아있는 생태가 있는 곳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스러운 장소라고 하는 곳은 따로 정해져있는 것이 아니라, 대자연과 소통이 되는 그곳이 바로 성스러운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장소와 대자연은 우리들을 가르쳐 주는 스승이 되기에, 우리는 대자연 안에 속해 있는 작은 존재들도 하찮게 여기지 않고 대자연의 한 존재로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장에서는 인디언의 여러 부족들이 대자연과 소통을 하면서 그들의 스승이 되어준 대자연과의 관계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먼저 첫 번째 얘기로서는 연어족과 원투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누르연어들은 원투족 인디언들에게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누르연어들이 사라지면 원투족 자신들도 곧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배워왔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원투족들이 배운 노래소리는 사람이 아닌 연어들이 사람처럼 말을 해서 노래를 가르쳐주고 목소리를 주었다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연어와 원투족과의 관계 안에서 마음과 영안에서 내적으로 들려온 소리를 듣고 그것을 연어들에게 배워서 후손대대로 전해준 것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그래서 연어가 성스러우니 연어가 살아가는 곳은 또한 당연이 성스러운 장소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이익과 편리함을 위해서 과감하게 대자연을 파괴시켰습니다. 1941년에 샤스타 댐은 맥클라우드 강 하류의 26마일이상 수몰시켜서 성스러운 구역들, 마을들과 역사를 깊은 호수 속에 삼켜버렸는데, 그 호수는 멀리 떨어진 도시들에 이익을 안겨주고, 돈 많은 관광객들을 위해 건설된 것입니다. 그리고 물고기 바위라고 하는 성스러운 바위는 1914년에 철로를 깔기 위해 폭파되었으며,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샤스타 호수 속에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이밖에도 인디언 부족들 사이에서는 대자연과 깊은 관계를 맺고 또한 소통을 하면서 자연의 존재를 단지 인간보다 하위에 있는 존재, 그래서 인간이 마음대로 휘젖고 다녀도 되는 그러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인디언부족들이 존경하고 공경하며 스승으로 섬기던 존재가 바로 대자연이었고, 성스러운 장소였던 것이었습니다. 


이밖에도 인디언 부족들과 대자연의 관계 안에서 마음과 영안에서 가르침을 들으면서 대자연을 스승으로 섬겼던 부족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구리와 철을 신령으로 섬기고, 야생벼와 물을 대자연이 주는 가장 성스러운 선물로 여겼으며, 심지어 우리가 생각하기에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늑대들조차도 그들은 성스러운 존재로 받아들이고 섬겼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통틀어서 대자연과의 의사소통, 즉 성스러운 장소와의 의사소통인 것입니다. 저도 사실 대자연과의 의사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러한 체험들이 간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서 다시금 저의 체험에 대해서 얘기해 볼까 합니다. 


그 체험은 다름 아닌 가을날 수 많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들에 대한 체험이었습니다. 전 서울 수유동으로 소임 오기 전 대전 수련소에서 소임을 맡고 있었습니다. 대전에 있는 수사님들이 다 그렇지만 각자 자기의 청소 담당구역이 있었는데 저의 청소 담당구역은 텃밭이 있는 뒷마당이었고, 더군다나 가을날 뒷마당에 있는 나무에서 낙엽이 떨어질 때에는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 되곤 하였습니다. 대부분 저 혼자서 마당을 쓸었는데 양이 워낙 많다 보니 이걸 언제 다 치우나 싶기도 하고,  차라리 나무들을 다 베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었습니다.


그때에 전 쓴 낙엽들을 모두 모아 텃밭에 거름으로 뿌리고, 여러 곳에 무더기로 쌓아 놓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에 한 자락의 바람이 불어 쓸어 모아 놓은 낙엽들이 바람을 타고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낙엽들을 바라보면서 귓가에 들리지 않는 제 마음 속 내면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낙엽들에게 얻게 된 지혜와 가르침들은 저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큰 것들이었고, 그 순간 낙엽들은 제 스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들은 낙엽의 지혜는 이러한 것들이었습니다. 


첫번째, 

“쓸어 모은 낙엽들을 거름으로 주기 위해서 밭에 뿌릴 때 낙엽들은 땅에서 썩고 죽지만 다시 그 땅에서 새로운 생명들로 태어나 자라게 됩니다. 썩어서 죽은 낙엽에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는 것입니다. 땅에서 거름으로 썩는 낙엽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죽고 부활하여 우리들에게 새 생명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낙엽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두번째,

“쓸어 모은 낙엽들을 모두 모아 쓰레받기에 담아 버릴 뜻이 있을 때에는 낙엽들은 온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만약 낙엽들이 바람에 불어 이리저리 날아다닌다면 낙엽을 쓸어 담아 뜻대로 버릴 수 없는 것처럼, 우리들도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머물러 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을 당신의 도구로서 당신의 뜻대로 이 세상에서 쓰임새 있게 활용을 하실 것입니다. 낙엽은 하느님께 온전히 내어맡기는 믿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세번째,

“바람이 불어 쓸어 모은 낙엽들이 날아갈 때에 큰 낙엽들은 날아가지 않고 바닥에서 뒹굴고 작은 낙엽들은 바람을 타고 올라가 하늘을 향해 저 멀리 날아가게 됩니다. 하느님을 믿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안에서 소유한 것이 많아 마음이 무거울 때에는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도 하늘나라를 향해 저 높이 날아가지 못하고 세상의 기준과 가치 안에서 뒹굴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가진 것이 없어 무소유한 이들은 성령의 바람에 의해 손쉽게 하늘나라를 향해 저 높이, 저 멀리 하느님께 날아갈 것입니다. 낙엽은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한 무소유의 마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네번째,

“넓은 마당을 보며 낙엽을 쓸 때에는 끝이 보이지 않고 멀게만 느껴지지만 지금의 자리에서 성실히 조금씩 차근히 낙엽을 쓸면 곧 끝나게 됩니다. 우리들도 삶을 살아갈 때에 크나큰 목표만을 생각하고 바라보며 살아가게 되면,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너무나도 작게 보여 지고 삶의 의욕을 잃을 수 있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차근차근 삶의 목표를 세워나가고 이루어 가면 우리들도 모르는 사이에 큰 목표가 이루어져 있을 것입니다. 낙엽은 처음부터 크나큰 것을 이루려는 욕심을 버리고 지금 이 순간 작은 것부터 실천하라는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다섯번째,

“쓸어 모아 놓은 낙엽이 바람에 날린다고 하여 그것을 애써 잡으려고 할 필요도, 속상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차피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도 않고 모아 둘 수도 없기에 지금 쓸고 있는 그대로를 쓸기만 하면 마음이 평화로운 것처럼, 우리들 삶에도 시련과 아픔의 바람이 불어 올 때 그것을 잡으려고 하거나 속상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련과 아픔의 바람은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면 행복한 것입니다. 낙엽은 삶의 힘겨움을 붙잡지 않고 놓는 법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여섯번째,

“낙엽을 쓸 때 지나치게 깨끗하게 쓸려고 하거나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한 자락의 바람에 또 다시 낙엽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삶을 살아갈 때에도 어떠한 일이나 목표를 이루려고 할 때에 지나친 완벽주의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삶에서 세월의 바람이 불어올 때엔 누구든지 큰 업적을 이루어 놓았다 할지라도 예외 없이 빈손으로 가기 마련이며, 이루어놓은 업적도 다시 무너뜨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낙엽은 사람들에게 지나친 집착에서 벗어나 여유롭게 행복하게 사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낙엽이 저에게 전해준 가르침들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신비스러웠기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대자연과 그 속에 있는 아주 작은 낙엽들에 대한 경외심이 저의 온몸을 휘감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수 많은 책들을 읽고 타종교의 경전들도 한번쯤 다 읽어 보았지만, 수도생활과 인간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명확하게 전해들은 것은 여태까지 한번도 없었습니다. 


행여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까지 제 마음을 움직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놀랍게도 그렇게 제 마음을 움직여 줬던 것이 유명한 성인성현들이 쓴 저서도 아니고, 역사에 길이 남을 신학·영성서적도 아니었으며 외국에서 10년 넘게 공부를 하고 박사학위를 따고 온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손바닥에 올려다 놓고 움켜쥐면 부서져 버리는 작은 낙엽이었습니다. 낙엽은 저에게 가르침을 주었고 낙엽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낙엽은 저에게 있어서 스승이었습니다. 그리고 대자연 안에서 소통한 낙엽과 수련소 뒷마당은 저에게 있어서 “성스러운 장소”였습니다. 


앞서 말한 체험과 같이 낙엽이 사람처럼 말을 해서 저에게 가르침을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제 마음과 성령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라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대자연 속 낙엽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제 안에 현존하시는 성령께서 저에게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생태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대자연과의 의사소통만을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대자연과 나의 관계 안에서 서로서로가 의사소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디언부족들도 대자연과의 의사소통만을 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 안의 정신과 마음과 영안에서 대자연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의사소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 그들도 생태영성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끝으로 이번 장의 첫 부분과 마지막부분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시대를 앞서 말했으며, 과거의 대홍수의 원인들을 설명했으며, 미래의 두 길을 예측했는데, 하나는 바싹 말라죽는 길이며 다른 하나는 녹색의 길이었다."

"이 문제는 경제적 선택, 정치적 선택, 개인의 선택의 문제다. 이런 선택은 궁극적으로 제국과 관계가 있으며, 새로운 프린티어를 찾을 필요성, 그리고 이 땅에서 평화를 만들어가는 것과 직결된 문제다."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시점에 와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대자연의 경외가 우리 마음 속에 들어와야 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800년전 프란치스코가 쓴 태양의 찬가는 프란치스코만의 작품으로만 남겨둬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써야할 때입니다. 이제 우리가 프란치스코가 되어 대자연의 노래를 써야할 때가 왔습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쓴 ”태양의 찬가“는 문학역사 안에서도 훌륭한 작품이지만, 이제 우리는 그것을 바라만 보고 태양의 찬가라고 하는 기도문을 외워서 연구하고 공부만 할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가 프란치스코의 자연을 대하는 정신과 영성을 본받아 성령 안에서 우리가 이제 써야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우리가 경외심을 가지고 대해야 하는 자연이 파괴되어 가고 있고 신음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21세기의 생태는 우리로 하여금 먼발치서 바라만보고 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자연은 우리로 하여금 대자연을 깊이 있게 바라보며 관계 맺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마침기도 


“대자연의 찬가”

  

모든 대자연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찬미를 받으소서. 세상의 모든 대자연은 우리들에게 진리와 지혜와 깨달음을 전해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모든 대자연은 우리들의 스승이 됩니다. 우리들의 스승이 되는 그들은 우리들에게 이러한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음을 기억하며 당신께 봉헌합니다. 


한 자락의 바람에 수 많은 나무들이 흔들립니다. 나무들이 흔들릴 때  자신 스스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바람에 내어 맡겼을 때 바람이 흔들리게 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온전히 내어 맡기고, 의탁 하며 살아갈 때,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닌 하느님의 힘이 우리를 살게 한다는 진리를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은 가르쳐 주고 있기에 그들은 우리들의 스승이 됩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강물은 흘러갑니다. 물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물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으면 썩고 그 안에 생명들이 살아 갈수가 없듯이 우리도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께로 향하지 않고, 세상과 우리 자신 속에 고여 있을 때 우리의 영혼은 하루하루 생명을 잃어 간다는 진리를 흐르는 강물은 가르쳐 주고 있기에 그들은 우리들의 스승이 됩니다.  


흐르는 강물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하늘의 태양은 빛나고 있습니다. 태양이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태워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사랑의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태우는 희생이 필요하다는 진리를 태양은 가르쳐 주고 있기에 그들은 우리들의 스승이 됩니다. 


빛나는 태양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밤하늘의 달과 별들은 찬란한 빛을 발합니다. 달과 별들이 빛을 내기 위해서는 깜깜한 어두움이 필요하듯이 우리의 삶에서도 하느님의 빛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삶의 어두운 시련과 고통과 아픔이 있어야 한다는 진리를 달과 별들은 가르쳐 주고 있기에 그들은 우리들의 스승이 됩니다.


밤하늘의 달과 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땅은 모든 생명의 피조물들에게 바닥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바닥이 되어주는 땅이 없이는 모든 생명의 피조물들이 존재 할 수가 없고, 살아 갈 수가 없는 것처럼, 우리들도 겸손과 겸허함으로써 바닥이 되지 않는다면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들과 함께 공존 할 수가 없음을 땅은 가르쳐 주고 있기에 그들은 우리들의 스승이 됩니다. 


바닥이 되는 땅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겨울에는 작은 눈이 내립니다. 이 작고 보잘 것 없는 한 송이의 작은 눈은 손바닥 안에서는 녹아버리지만 작은 눈이 일정하게 늘 변함없이 꾸준히 쌓이고 쌓이면 산과들을 덮고 온 세상을 덮어 아름다운 설경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크나큰 일을 이루고 목표를 세울 때에는 지금하고 있는 일이 작고 보잘 것 없을지라도 늘 변함없이 항구하게 성실하게 살아갈 때에 언젠가 크나큰 목표를 이룰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기에 그들은 우리들의 스승이 됩니다.  


겨울에 내리는 작은 눈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대자연의 주인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모든 생명 있는 피조물들은 우리들에게 친구와 형제, 자매, 그리고 진리를 가르쳐 주는 스승으로써의 역할을 해주며, 끊임없이 말을 건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들에게 무엇이 되어주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오히려 우리들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그리고 조금만 더 편해지고자 하는 마음으로 생명의 피조물들을 훼손시키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800년전 프란치스코가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태양의 찬가’를 쓴 것처럼 이제 우리들 또한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들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듣고 대자연속에 크나큰 신비가 깃들어 있음을 깨달아 저희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허락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성호경.


토론1)지금 우리가 생태계보호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가 머리로써는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토론2)우리가 자연과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자.


자연과의 의사소통 2

▲ 나무가지에 달린 낙엽들

▲ 바닥에 떨어진 낙엽들

▲ 쓸어서 모아놓은 낙엽들

▲ 거미줄에 걸린 낙엽 ⓒ 김기환 수사


덧붙이는 글

김기환(베드로 마리아) : 작은 형제회 수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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