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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종교 죽은 종교 2 (이광수)
  • 이광수
  • 등록 2015-05-22 10:13:35
  • 수정 2015-06-09 17: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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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수


불교는 기독교와는 달리 구원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다. 불교가 추구하는 것은 그것을 대하는 사람마다 모두 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붓다의 길을 따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아미타불을 믿고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바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주문이나 진언 혹은 부적과 같은 미신적 신앙 행위를 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이성과 합리의 길에 따라 신앙의 길을 갈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붓다를 신으로 모실 수도 잇고 어떤 사람은 붓다를 죽일 수도 있다.


속세를 떠나서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것도 허용되고, 결혼해서 가정 생활을 하면서도 무엇인가를 추구할 수도 있다. 붓다가 되고자 하는, 붓다와 관련되는 모든 길은 다 존중받고 허용되는 것이 불교다. 참으로 그 품이 넓고, 그 세계가 관용적이다.


그가 초월 세계를 추구하든, 저잣거리의 막장의 삶을 살든 그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가 설사 막장의 삶을 살면서 추구하는 것이 중생의 삶에 대한 연민이고, 속세를 떠나 초월을 추구하는 것이 거짓임을 말하고자, 깨닫고자, 실천하고자 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될 수는 없다.


황진이 이야기에 나오는 면벽승 지족선사가 황진이의 간곡한 청을 듣고 그와 몸을 섞은 것이 아니고, 그와 몸을 섞음으로써 황진이가 얼마나 허탄한 것에 매달려 있는가를 깨닫게 하는 의도였다면 그것은 지고의 실천 행위일 것이나 자신의 육욕을 못이겨 그와 몸을 섞었다면 그는 속칭 땡초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그 지족선사가 어떤 의도로서 황진이와 몸을 섞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오로지 그만이 안다.


툭하면 터지는 조계종 소속 승려들의 도박도 마찬가지다. 도박에 술과 고기와 계집질까지 하는 승려들이 부지기수라 하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문제일 수는 없다. 남여가 합일이 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 밀교 불교도 엄연한 불교다.


죄를 씻기 위한 가장 좋은 길은 스스로 죄를 지어야 하는 것이라고 믿어, 일부러 강간을 하고, 살인을 하라는 언어가 그 종교의 논리로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그러한 극단적 세계관이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것 여부와는 관계없이 그 길을 추구하는 자는 그 길을 가는 것이 참다운 중의 길이다.


논문을 표절하고, 손에 목탁 대신 화투를 들고, 부처님에게 절을 하기 위해 무릎을 꿇는 게 아니고 여인과 섹스를 하기 위해 무릎을 꿇는 게 속세의 허탄한 삶의 진리를 깨닫고 중생들과 함께 하기 위한 방편으로 했다면 그들은 참다운 중이다.


그들이야말로 진정 붓다를 만나면 붓다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어느 고승의 말씀을 그대로 따른 분들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권력과 돈과 여인의 몸이 탐이나 그 탐진치의 세계에 빠져 그런 일을 했노라면 그들은 중이 아니다. 중이 아닌 자에게 중 대접을 해 줄 필요는 없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죽비가 아니라, 몽둥이다.


덧붙이는 글

이광수 : 부산외국어대학교 불교사 전공 교수이다. 《슬픈 붓다》, 《네루의 세계사편력 다시 읽기》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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