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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한평생 사랑해주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 전순란
  • 등록 2016-12-09 09: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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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8일 목요일, 맑음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라는 기다란 이름이 붙은 축일이다. 아침저녁 성무일도를 하다 보면 성모님 축일이 참 많다. 그 많은 축일의 의미를 모르는 개신교신자라면 우리를 가히 ‘마리아교’라 부를 만하다.


어려서부터 성당 앞을 지날 적마다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마리아상을 보게 됐는데 성당 오는 여신도들이 그 앞에 손을 합장하고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이 영락없이 불상이나 돌탑 앞에서 손 비비며 절하는 불교신자였다! 엄마는 나에게 단호하였다. “저게 바로 우상이다. 저렇게 만들어놓은 물건에 절하는 건 잘못된 신앙이다. 저쪽 저 남자(지금 알고 보니 ‘성 요셉’이나 ‘예수 성심’)도 그렇고.”



4·19 이후로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목에 밧줄이 묶인 채로 사람들한테 끌려 다니는 사진을 신문에서 보고 아버지는 “살아생전 자기 동상 만들고서 하나님께 벌 받았다”고 어린 나한테 설명해 주셨다.


그런데 내가 성모 마리아를 재발견한 것은 보스코를 만나고서였다. 열네 살에 홀로 엄마의 임종을 지키고 네 동생과 남겨져 절망 속에 놓였을 때를 회고하면서 “나를 붙잡아주신 분이 성모님이셨어”라는 고백을 그의 입에서 듣고서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한평생 사랑해주신 분이라면 나도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싶었다. 그리고 십자가의 비극에서 아들이 처형당하는 현장에 까무러치지 않고 당당히 서 있는 여인이라면, 내가 어려움 속에 놓였을 적에 당신처럼 저렇게 이겨낼 힘을 주시리라는 예감이 생겼다. 스님 손에 들린 염주처럼 늘 로사리오를 들고 알을 굴리는 보스코를 보면서 나도 차츰 그분에게 빠져들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나는 이 첫 구절에서 늘 마음이 멈춘다. 저 큰 아픔 속에서 기뻐하시다니? 그리고 나 또한 기뻐할 일이 매일매일 수없이 많다. 특히 오늘은 우리 며느리를 위해 기도했다. 지선이 생일이 오늘이고 걔의 세례명도 ‘마리아’인데 우리 며느린 정말 성모님이 우리 집안에 보내주신 커다란 선물이다.



보스코는 하루 종일 크리스마스카드를 썼다. 해외 친지들에게 50여장. 우선 내가 그걸 들고 우체국 닫는 시간쯤 유림우체국으로 가서 부쳤다. 국장님이랑 여직원이 일일이 무게를 달고 요금을 찾아 처리해주었다. 우리나라 공공기관 중에 제일 친절한 곳이 우체국이리라.


저녁에는 국내 인사들에게 보내는 카드를 쓰는 보스코를 서재에 두고 나와 소담정 도미니카는 jtbc 뉴스를 보았다. 이 가을에 하야시위(‘서하페’라고 불린단다. ‘서울 하야 페스티벌’)와 손석희 뉴스룸을 통해 온 국민이 톡톡히 공부를 해 왔다. 광화문의 ‘일제히 소등’을 두고 “북한 지령에 따라 훈련된 세력”이라고 말하는 꼴통 미치광이들에게 헛웃음이 나오는 건, “북한까지 안 가고 jtbc만 봐도 그만큼은 교육된다, 이 멍충아!”라고 외치고 싶어서다. 


오후에는 책을 읽으며 어제 독서회에서 아우님들이 좋아하고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던 노래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의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혜진). 윤상의 ‘가려진 시간 사이로’(미혜),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미정)를 찾아서 들었다. 특히 희정이의 러브스토리가 담긴, 신승훈의 ‘오랜 이별 뒤에’는 사연만큼 마음을 촉촉하게 했다.


1994년 11월. 무작정 산에 가고 싶어 그니는 남덕유산엘 갔단다. 그 동산로엔 ‘입산금지’ 팻말이 적혀 있더란다. 그걸 모르고 온 남자 하나가 벤치에 앉아 김밥을 먹고 일어서더란다. 자기도 막 돌아서는 참인데 관리공단 직원이 두 사람을 불러 세우더니 입장료 1,100원씩을 받고서는 “둘이 같이 갔다 오시오, 위험하니까”하더라나. 앞서거니 뒷서거니 같이 가다 쌓인 낙엽 때문에 같이 길을 잃고 같이 헤매기도 하다 산을 내려왔더니 이미 해는 기울었더란다. 


남자는 통영으로 간다면서 가는 길이니 함양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차에 태워줬는데 그 차에서 ‘오랜 이별 뒤에’가 나오더란다. 희정이는 국립공원관리공단직원이 그날 맺어준 그 남자와 지금도 인생 등반기를 같이 써내려가는 중이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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