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우수수 떨어지는 노란 은행잎 때문에 괜스레 감상에 젖게 되는 이 가을. 마음 맞는 이들을 만나 따뜻한 차도 함께 마시고 담소도 나누면서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기에 더없이 좋을 그런 계절이다.
그런데 요즈음 상식을 뒤엎는 뉴스들로 온 나라가 시끌벅적하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란 사람이 일개 개인에게 휘둘려 공사구별도 못하고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국정까지 샤먼에게 기댔다는 데에는 너무나 기가 막혀 할 말을 잃는다. 한마디로 나라의 모양새가 엉망진창이었던 거다.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진짜 난감하다. 건강한 시민사회가 밝히는 촛불 말고는 대안이 없어 보인다. 국민이 곧 국가임을 모르는 이라면, 민심을 외면하는 이라면, 정(政)‧치(治)를 할 자격이 없다.
18세기 초엽에 쓰여 진 「걸리버여행기」를 봐도 그렇다. 예나 이제나 정치와 권력은 올바른 적이 없었나보다. 물론, 지금 이 나라의 현실은 그때보다 훨씬 더 어처구니없지만 말이다. 많이들 잘못 알고 있는데, 「걸리버여행기」는 절대 어린이를 위한 동화가 아니다. 부정부패한 정치권력을 독설과 풍자로 유쾌하고 신랄하게 꼬집는 풍자소설의 대표적인 고전이다. 출판 당시 인쇄업자가 감옥에 갇힐 걸 각오해야할 만큼 불온한(?) 책이었다. 사실 동화적 상상력과 환상적인 표현들은 스위프트의 재치 있는 아이러니를 드러나도록 해주는 장치다. 그런데 당대의 비평가들이 독설과 풍자부분을 모조리 삭제하거나 편집해 어린이용으로 만들어 버린 거다.
동화로도 많이 알려진 릴리퍼트(소인국)와 브롭딩낵(거인국) 부분을 다시 읽으면서는 인간의 인식이란 게 참 상대적이구나 새삼 느꼈다. 휴이넘이라 불리는 말의 나라는 사랑과 우정이 미덕이다. 부정적인 걸 묘사하는 단어가 하나도 없을 정도다. 온화하게 살고 있는 말들이 오히려 제대로 된 사람 같다. 정작 사람을 닮은 야후들은 야만스럽기 짝이 없다. 아주 거칠다. 빛나는 돌을 차지하려 시도 때도 없이 싸우고 서로를 미워하느라 물고 뜯는다. 야후 같은 내안의 모습이 엿보여 좀 부끄럽기도 했다.
그리고 커다란 자석의 힘을 이용해 자기부양 방식으로 하늘을 날아다니며 발니바르비를 다스리는 섬, 라퓨타. 자연스레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인 ‘천공의 섬, 라퓨타’가 떠올랐다. 내용이 독특하다고 여겼는데, 「걸리버여행기」에서 따온 소재였다. 저자인 조너선 스위프트의 과학적인 상상력이 놀라웠다.
특별히 나의 마음을 끌어당긴 여행지는 럭낵이었다. 그건 바로 스트럴드블럭 때문이다. 럭낵은 걸리버가 발니바르비를 떠나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가기 전 잠깐 방문했던 곳이다. 여기에서 그는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인 스트럴드블럭을 알게 되는데, 럭낵에서만 가끔씩 태어난단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니, 정말로 그럴 수 있다면 죽음에 대한 불안이나 공포도 없겠지. 당연히 뭘 하든 시간이 넉넉하니 여유롭고 행복하겠다 싶었다. 걸리버도 몹시 신기해하며 그들의 삶을 부러워한다. 그러자 럭낵의 국왕이 걸리버더러 만약 스트럴드블럭이 되면 어떻게 살겠느냐고 묻는다.
걸리버는 우선, 저축도 하고 절약도 해서 재산을 잔뜩 불려서는 200년 안에 럭낵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겠단다.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뭐든 끊임없이 할 수 있을 테니 자신의 관심분야인 예술과 과학에서도 일인자가 될 거란다. 또 나라에서 일어났던 여러 사건들을 면밀히 관찰하고 관습이나 언어, 유행, 식사, 오락 등 모든 부분에서 그 변화를 꼼꼼히 기록하고 저장해 살아있는 지식과 지혜의 보고가 되겠단다. 국가의 예언자가 될 수도 있으리라 자신한다.
나이가 들더라도 언제나 친절할거고, 젊은이들에게는 다양한 기억과 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겠단다. 스트럴드블럭들을 초대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도 싶고 그들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훌륭한 가르침도 펼칠 뿐 아니라 부패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기꺼이 일어나 싸우겠다고도 한다.
여러 나라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혁명이라든지 고대도시나 시골 마을이 번화해지고 큰 강이 작은 개울이 되고 넓은 바다가 육지가 되는 걸 볼 수도 있을 거란다. 문명이 발달한 나라가 망해가고 원시종족이 문명화되는 걸 본다거나 의학이나 천문학이 발전해가는 모습도 볼 수 있을 거라며 흥에 들떠 이야기한다.
환하게 웃는 걸리버에게 럭낵의 국왕은 통역관을 통해, 누구나 죽음을 피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스트럴드블럭을 보며 사는 럭낵 사람들은 삶에 대한 집착이 그리 강하지 않다고 전한다. 그러면서 걸리버가 말하는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한낱 상상일 뿐이란다. 왜냐면 걸리버식 영원한 삶이란 젊음과 건강, 정력이 언제까지고 남아 있다는 걸 전제로 하기 때문이라는 거다. 늙음이 가져오는 불편과 외로움 속에서 어떻게 생명을 영원히 유지해 나갈는지(p.269) 그거야말로 진짜 심각한 문제란다. 그러고 보니 나도 당연한 듯 걸리버처럼 생각했다. 어째 찜찜하다.
럭낵에는 80세를 사회적으로는 죽은 이나 다름없도록 규정한 법이 있다고 한다. 영원히 사는 스트럴드블럭도 여든 살이 되면 법적으로는 죽은 걸로 처리되어 어떤 권리와 의무도 행사할 수 없이 혼자 살아야 한단다. 대체로 그들은 노망이 나거나 조금씩 어리석어지고 죽지 않음에서 오는 절망을 무섭게 맛본다고 한다. 완고한 고집쟁이에다 욕심쟁이 노인이 되어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괜한 허풍을 떤다는 거다. 쓸데없는 말참견에 배려심도 없고 손자보다 아랫대 후손은 알아보지도 못해 애정을 베풀 줄도 모르게 된단다. 쾌락을 누릴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젊은이를 질투하고, 영원한 안식처로 떠날 수 없는 처지 때문에 나이든 사람의 죽음을 질투한단다. 노망이라도 들어서 아무런 기억도 없어지면 동정이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서 말이다.
90세가 되면 이와 머리털이 죄다 빠져 음식 맛도 식욕도 없단다. 항상 병을 앓고 있지만 더 이상 악화되거나 호전되지도 않는단다. 친구나 가족의 이름도 생각나지 않고 책을 읽어도 앞의 내용을 자꾸 까먹어 재미를 못 느낀다는 거다. 살아있기는 하지만, 즐거움도 오락거리도 없는 삶이다. 거기다 언어는 항상 변하는 게 속성이다. 그 때문에 한 세대의 스트럴드블럭은 다른 세대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200년 쯤 지나고 나면 몇 마디 말고는 사람들과 대화하기도 어렵단다. 천년쯤 지나면 나이 가늠도 안될 뿐더러 늙어있는 모습도 너무 추해서 어쩌다 스트럴드블럭이 태어나면 럭낵인들은 불길한 징조라고 여긴다는 거다.
이쯤 되면 나이를 먹고 적당한 때에 죽을 수 있다는 게 고맙다. 얼토당토않게도 영원한 삶을 상상하면서 으레 지금 이정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사는 걸로 생각하고 있었다. 영원히 산다는 건 계속 나이를 먹으면서 그 나이만큼 늙어 간다는 건데 말이다. 스트럴드블럭처럼 흉하게 쇠락해가면서 천년만년 영원히 죽지 않는다? 그걸 삶이라 할 수 있으려나? 좀 오싹해진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그보다 더한 형벌이 없겠다.
어쩌면 죽음이란 삶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묘하게도 죽음이란 걸 생각하면 오히려 삶이 더 또렷해진다. 어느 틈엔가 삶에 집중하고 있는 나를 본다. 어떤 삶을 살면서 나이를 먹어야 할는지. 어떻게 살아야 잘 늙어갈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부디 나이를 잘 먹으며 잘 늙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헛된 꿈이겠으나 나라를 망가뜨리고 있는 사람들이 「걸리버여행기」를 찬찬히 읽어 봤으면 좋겠다. 차분히 들어앉아 이 책을 읽고 나면, 내 죽음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 그래서 내 삶이 얼마나 진지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텐데. 그러면 물러날 때 물러나고, 사라질 때 사라지고, 죽을 때 죽는 게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잘 알 수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