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장 기능을 잃어 투석환자가 된 후로 처음 추석 명절을 쇠었다. 매일같이 복막투석을 하면서도 명절 음식을 잘 먹으며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노상 자리보전을 하는 신세는 아니므로 몸도 마음도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비록 제한적이긴 하지만 비교적 자유롭게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에 늘 감사하는 마음이다.
복막투석 환자로 살다가 작고하신 분들에 대한 애틋한 기억
가끔 몇 해 전 작고하신 소설가 오찬식 선생을 떠올리곤 한다. 오찬식 선생은 노년에 신장 기능을 잃어 복막투석을 하며 어렵게 사시다가 병원에서 이승의 삶을 마감하신 분이다. 나는 선생이 별세하실 즈음에야 복막투석을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병원에 계시다는 말을 듣고 소설가 황원갑 선배를 통해 성금을 한 번 보내드렸는데, 그때 처음 오 선생이 복막투석 환자라는 것을 알았다.
복막투석의 내용을 제대로 알 수는 없었다. 그저 복막투석이라는 이름만을 들었을 뿐 어떻게 하는 것인지, 시간은 얼마나 걸리고 공력은 얼마나 드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일찍이 복막투석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실체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찬식 선생은 1980년대 초중반 여러 해 동안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부문 예심위원을 했던 분이다. 선생은 내 소설을 세 번이나 본심에 올려주셨다. 세 번째 예심 통과는 당선으로 연결되었고…. 그런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면서도, 선생이 병상에 계실 때도 한 번 찾아뵙지도 않았으니, 그 생각을 하면 죄스러운 마음 크다.
선생 별세 후 선생께서 노년기에 상처를 하시고 홀로 오래 투병을 하셨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따님은 얻지 못하고 아들 형제만 두었는데, 결혼 후 따로 사는 두 아들 모두 제 살기 바빠 아버지를 돌볼 여유가 없는 것 같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 결국 짝 잃은 외기러기 신세가 된 선생은 홀로 복막투석으로 투병을 하시다가 외롭게 눈을 감으셨다고 한다.
생각하면 마음 아프다. 노년에 혼자되어 혼자 손으로만 매일매일 복막투석을 했다니 얼마나 외롭고 힘이 들었을까. 끼니는 제대로 챙겨 드셨을까. 식사를 라면 따위로 아무렇게 하다가 신장에 병을 얻게 된 것은 아닐지….
내가 막상 복막투석 환자가 되고 보니, 상처(喪妻)를 한 사람은 절대로 투석환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또 투석환자 신세가 된 처지에서는 절대로 아내를 먼저 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절로 든다. 환자 아닌 사람에게도 배우자는 절대 버팀목일 텐데, 환자 처지로는 오죽하랴. 물론 배우자도 나름이겠지만….
독신생활을 하시는 천주교 사제나 불교 스님들도 투석환자 신세가 되어서는 안 된다. 천주교 대전교구 은퇴사제 중에 몇 해 전 선종하신 윤 모 신부님은 투석환자였다. 은퇴 후 노년기를 쓸쓸히 사시던 중 신장 기능을 잃어 투석환자가 됐다. 혈액투석을 피하고 복막투석을 하시다가 어느 날 투석이 진행되는 도중 선종하시고 말았다.
그 신부님을 생각하면, 요즘엔 더욱 마음 아프다. 은퇴 후에는 독신생활이 더욱 쓸쓸하기 마련인데, 혼자 매일 밤 복막투석을 하다가 기계의 에러 상태를 겪고, 아무도 없는 가운데 돌연 선종하셨으니, 하느님 안에 전 생애를 맡기신 분이라 해도 애처롭지 않을 수 없다.
복막투석과 혈액투석의 차이
올 추석명절 전에는 가족 온천목욕 행사를 갖지 못했다. 해마다 명절 전에는 가족 온천목욕 행사를 즐기곤 했는데…. 내가 복막투석 환자가 되면서 우리 가족의 온천목욕 행사도 끝이 난 셈이다.
내가 처음 자동차를 갖게 된 1989년부터 가족 온천목욕 행사가 시작됐다. 한 달에 한두 번씩 덕산온천을 가곤 했다. 태안에서 덕산까지 처음엔 50분가량 걸렸으나 점점 길이 좋아지면서 이제는 35분이면 충분하다. 주로 새벽에 목욕을 가곤 했다. 새벽 5시쯤에 가서 목욕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해미읍성 앞에서 아침식사를 하며 행복감을 만끽하곤 했다.
욕탕 안에는 들어가지 말고 집에서 흐르는 물로 샤워 정도 하라는 말을 병원에서 듣는 순간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부터 들었다. 나 때문에 가족 모두 목욕탕에 가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니 미안한 마음이 심해졌다. 나를 두고 가족들만 목욕탕에 가는 것을 가족들은 아무도 원치 않았다.
가족들을 위해 과감히 목욕탕에 갈 생각을 했다. 탕에는 못 들어가더라도 샤워 정도는 할 수 있다니 그 샤워를 온천에서 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보건말건 연결관이 노출되어 있는 내 배를 드러내고 덕산온천에서 샤워를 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병원에 가서 그 얘기를 하니 복막투석실 간호사도, 신장내과 주치의도 얼굴을 저었다. 대중목욕탕에는 세균이 많아서 샤워도 안 된다고 했다. 복막투석 환자에게는 복막염을 경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같은 투석 환자라도 혈액투석을 하는 사람들은 자유롭게 목욕탕 안에 들어갈 수 있다 하니, 차라리 혈액투석 쪽으로 갔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요양원에 들어가기 위해 복막투석을 중단하고 혈액투석으로 전환하는 사람도 보았다.
요양원은 혈액투석 환자는 받아주지만 복막투석 환자는 받아주지 않는다고 한다. 복막투석 환자에게는 딸린 짐이 많아서 그 짐을 들여놓을 공간이 없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나도 먼 훗날 더욱 노쇠해져서 요양원 생활을 해야 할 상황이 된다면 혈액투석으로 전환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내는 내 등 비빌 언덕
현재 내 복막투석 생활은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투석액이 체내에서 노폐물과 잉여수분만 제거하는 게 아니라 단백질도 가지고 나오기 때문에 잘 먹어야 한다고 해서, 아내는 내 음식에 신경을 많이 쓴다. 자연 단백질 섭취도 많이 하게 된다. 그래서 복막투석 환자임에도 나는 체중이 줄지 않고 오히려 점점 불어나는 추세다.
기계투석이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잘 먹고 잘 자고, 일상생활이 순조롭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서 잠을 자는 시간에 투석을 하니, 투석기가 고맙기도 하다. 그 모든 것은 아내 덕이다. 아내는 기계투석과 뒤처리를 거들어주기도 하고, 매일매일 내 복부 도관 부위를 소독해주곤 한다. 아내가 내 복부를 소독하고 멸균거즈를 갈아붙여 줄 때마다 아내가 있어 복막투석을 지속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매일매일 아침저녁으로 혈압을 측정하는 일은 혼자 하기 쉽지만, 혈당 측정은 혼자 하기가 어렵다. 매번 아내 손으로 혈당 체크를 하는데, 투석 환자가 된 후로는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는데도 혈당이 정상 수치를 유지한다.
오후에 장명수 해변에 가서 걷기운동을 할 때는 비록 복막투석을 하고 살망정 이런 생활이 오래 유지되기를 빌곤 한다. 언젠가는 걷기운동도 할 수 없는 진혼의 시기가 오겠지만, 자리보전을 하기 전까지는 걸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지난 6월 20일 중앙보훈병원에서 복강에 도관을 넣는 수술을 하고 다음날부터 복막투석을 시작했으니, 얼추 100일이 되어간다. 그동안 투병을 잘한 덕에 이제는 몸에 기운도 돌고,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내도 지난달 말 정년퇴임을 했으니, 이제는 당일치기 나들이도 자주 할 생각이다.
우선 해마다 가을이면 갖는 아파트 입주민 관광행사에 처음으로 부부가 함께 참가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달 24일 토요일에는 서울 잠실구장에 가서 ‘한화’ 야구 경기를 보고 밤중에 내려오기로 했는데, 오랜만에 야구장에 가는 것을 누구보다도 아내가 좋아한다. 이제 영영 야구장에는 다시 가지 못할 줄 알았는데 갈 수 있다니 천만 다행이라는 말도 한다.
월요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에 가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시국미사에 참례하는 일도 적극 고려하고 있다. 차를 가지고 가서 미사 참례를 한 다음 곧바로 내려오면 0시쯤에는 집에 도착할 수 있고, 그 시간에 기계투석을 시작해도 괜찮을 것 같다. 매주 광화문에 가는 것은 어렵겠지만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갈 수 있을 것 같다.
하루 생활의 마지막을 복막투석으로 장식하고, 또 기계투석 마무리로 하루 생활을 시작하는 내 일상은 정말 안정적이다. 나라꼴이 엉망인 것을 생각하면 내 ‘안정’이 좀 무안해지기도 하지만, 하느님께 더욱 의지하고 감사하는 나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