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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자 김경집 선생 인터뷰 : “복음을 인문정신으로 바라보아야 할 때”
  • 김근수
  • 등록 2016-05-25 10:22:47
  • 수정 2016-05-25 11: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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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교보문고)



- (김근수 편집장) 오늘 인터뷰는 인문학자 김경집 선생님입니다. 선생님의 저서 「생각의 융합」도 그렇고, 자주 쓰시는 단어 중 하나가 ‘융합’인데요. ‘융합’이란 무엇인가요?


▶ (김경집 선생) 융합은 물리적 용어입니다. 20세기는 속도와 효율로만 살았어요. 그런데 그것이 무너진 게 97년 체제라고 봅니다. 우리는 (97년의 위기를) IMF 외환위기로만 생각하지만, 속도와 효율로는 더 이상 안 된다는 분기점 때문에 생긴 붕괴인거죠. 그렇다면 속도와 효율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미래 가치 개념·방향성은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교육이 텍스트(Text) 중심이었다면 이젠 텍스트를 벗어나 컨텍스트(Context)를 읽어내고 생산하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컨텍스트로 가는 방법의 핵심은 ‘융합’이라고 생각합니다. 


- 성서학에서도 오랫동안 텍스트만 보다가 컨텍스트를 보기 시작한 것이 19세기로 알고 있는데, 우리는 그보다 좀 늦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왜 융합을 놓쳤는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수직적인 사고 속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의 경우 하이어라키(계급, Hierarchy)라는 것이 정해져 있었고 이념적인 체계도 성리학 밖에 없었습니다. 후반기에 실학도 있었지만 주류도 아니었고, 살아날 만했을 때는 국가가 망했죠. 그렇게 되면서 가정과 사회, 모든 부분에서 가부장적인 수직적 체계였습니다. 누군가가 텍스트를 정해주고 답을 가르쳐주면 추종하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는데 그것이 21세기에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 하이어라키가 가장 강한 곳이 가톨릭교회 아닙니까?


▶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순명’은 주교에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복음에 순명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잘 관리·운영하는 것이 교회 수장이라고 생각하니까 주교에 순명하는 것이라고 착각하죠. 교회가 로마시대의 교회로 들어서면서 로마시대의 하이어라키로 전이된 경우도 있었죠. 교회 자신이 교회개혁운동을 겪으면서도 하이어라키에 관련된 것을 포기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 그런데 ‘하이어라키’는 성서에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성서에 나오지 않는 단어를 지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수직적인 사회구성방식에 익숙해져있고 신자들이 공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부를 하지 않으니 왜 그런 것인지, 꼭 그래야 하는 것인지 따지지 않고 순종하는 거죠. 성직자들은 영성적인 인도자가 아니라 전체적인 운영자, 통치자로 작동합니다. 신자들은 이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안정적이라고 여깁니다. 


- 교회 안에서 많은 교육을 하셨는데 가톨릭 성직자들은 공부를 많이 하는 편입니까?


▶ 상대적으로 많이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학교로 강의를 하러 갈 때 사실 부담감도 있어요. 그럼에도 강의를 하러 가는 이유 중 하나는, 교회 밖의 목소리를 누군가는 들려주어야 신학생들이 자극을 받고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이 신학교 안에 있을 때는 보수적으로 배우세요. 진보적인 생각을 하면 쫓겨나니까. 하지만 사제가 된 이후에는 진보적으로 살아가세요. 그것이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제사장을 탐하려 하지 말고 예언자를 추구 하세요” 이런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갑니다. 


- 초대교회에서 ‘예언자’ 예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초대교회는 왜 예수에게 ‘예언자’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을까요?


▶ ‘예언자’는 기존 체제에 대해 비판과 충돌을 일으킬 수 있어요. 그러니 그런 호칭을 허용함으로써 화를 자초할 까닭이 없었던 거죠. 제도교회로 돌아갔을 때는 제도가 곧 권력인데, 그 속에서 쇄신을 이야기하거나 예언적인 발언을 하면 자기모순에 빠지거나 체제와 충돌을 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 세례를 줬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지만, 개인적으로 요한의 역할은 예언자라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자로서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소크라테스나 공자, 예수의 공통적인 특징은 시대정신을 명확하게 제시했다는 겁니다. 미래 의제를 제시했죠. 예수님은 ‘복음’으로 제시하신 분이에요. 예수를 믿는다 하지만, 동시에 시대정신에 대해 고민하거나 미래 의제를 복음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 선생님 저서인 「고장난 저울」에 ‘왜 보수가 집권하면 자살율이 증가할까’라는 대목이 있는데요. 왜 보수가 집권하면 자살율이 증가합니까?


▶ 정신의학자 제임스 길리건이 미국 자살율 증가에 대한 의뢰를 받고 분석을 하게 됐는데 자살율 증가에 일정한 주기가 있다는 걸 발견합니다. 그런데 이 주기가 어떤 정당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변화되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보수는 부패해도 경제적으로 유능해서 보수를 뽑으면 일자리가 생길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에 자살율도 감소할 거라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반대였습니다. 이를 분석한 책이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입니다. 


보수 정당 지지자들은 기업인, 중산층 기득권인데 이들은 정치후원금을 내겠죠? 그렇다면 자신들이 지지한 사람이 집권을 하면 반대급부를 요구합니다. 그 요구는 해고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거죠. 보수가 집권하는 초기에는 공통적으로 대량 해고 현상이 발생합니다. 정부로부터 법률적인 위임을 받아 마음대로 해고 하고, 해고당한 사람들은 삶을 전환할 방법이 없으니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거죠.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보수는 부패해도 경제는 살린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매일 청년 7명이 자살해요. 자살하는 청년들의 유서를 보면 ‘죄송합니다’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미안하다고 해야 하죠? 저는 미안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분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성세대가 가지고 있는 큰 문제로 두 가지를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젊은 세대에 대한 공감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강연을 하면서 ‘2016년 최저시급이 얼마인지 아는가?’하고 물으면 대답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나’ 그리고 ‘내 가족’이 시급을 받지 않기 때문에 나의 일이 아닌 것이지요. 


두 번째는 퇴행하는 내성이 쌓여있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이 노력하고 희생해서 우리가 이만큼 누리고 살았으면, 이젠 우리 자식들에게 내가 누린 것보다 많은 것들을 줘야 하는데 반에 반도 못 주는 상황인거에요. 그런데 미안해하지도 않고 죄책감도 없고 방법을 모색하지도 않는 상황이지요. 


- 국가폭력이 심한 나라에서는 사회적 약자들이 저항하기 보다는 자신의 몸에 폭력을 가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자학이나 자살로 나타나는데 한국의 자살율을 보면 이러한 문제가 무척 걱정됩니다. 한국 가톨릭교회 성직자들이 자살문제, 젊은이들의 우울증, 좌절과 같은 사회 문제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보십니까?


▶ 이 문제를 방치해서 도미노처럼 일어나면 방법이 없다고 봅니다. ‘헬조선’, ‘흙수저’ 같은 말이 나온 것은 앞으로 그렇게 일이 커질 수 있는 예고편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교들은 이러한 성직자나 수도자들을 품어주고 지원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서울교구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 중 한 사람은 전담해서 일해야 합니다. 또,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사제들은 주교와 한 몸이 되어 그 역할을 하면 좋겠지요. 모든 사제와 수도자가 가난하게 살수는 없겠지만 그런 조직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해야 하겠지요. 


최근 주교들은 모두 신학교 출신들인데, 학문적인 안정성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학교 안에서는 제자들이 떠받들어주니 이런 환경에서 오는 권위의식은 강합니다. 신학교가 아닌 현장에서 사목하는 사람들 중에서 주교가 될 만한 사람들은 없었는지,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얼마나 지원해주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예전 노기남 대주교 당시 김수환 주교를 서울교구로 영입해서 대주교가 되었을 때, 반발이 매우 컸습니다. 요한23세 덕분에 추기경이 처음 생기고, 노 대주교는 제일 젊은 사람을 추기경에 임명하자면서 모든 주교들을 설득했지요. 친일에 대한 논란은 별개로 노 대주교에게 그런 면모가 있었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당시 주교들도 그릇이 컸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 정도의 그릇이 되면서 하이어라키를 따지는 사람은 인정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의 고위계급이 되었습니다. 아량도 안목도 없을뿐더러, 나한테 대들면 이상한 곳으로 보내겠다고 인사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신부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 새 주교나 현역주교의 행동을 보면 가톨릭개혁의 핵심이 주교제도 개혁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주교 선발 방식, 권한 분배, 규제, 소환하는 방법의 개선이 시급하다는 것을 신자들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네, 저도 공감합니다. 특히 서울교구의 경우 주교의 한 자리는 사제들이 추천해서 뽑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 다른 질문입니다. 「엄마 인문학」에서 ‘우울증과 무력감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할 해법은 엄마와 인문학 밖에 없다’고 하셨는데, 엄마들이 어떻게 하면 사회를 구할 수 있을까요?



▶ 많은 경우 엄마 자신의 자존감의 근거는 ‘남편의 지위·소득’, ‘자녀의 진학’이에요. 엄마들이 남편 월급을 더 주게 할 수는 없으니 엄마가 할 수 있는 건 자녀의 진학뿐이에요. 우리 사회가 철저하게 고학력 카르텔 사회인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아이들을 들들볶아서 윗자리에 올려놓으려고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인생의 황금기는 3~7세에요. 7살 이후로는 경쟁이 시작됩니다. 대학을 위해 공부하는 데 일류대학에 들어갈 확률은 10%도 안 됩니다. 또 일류대학 졸업 후 좋은 직장에 들어갈 확률은 40%밖에 안 됩니다. 그럼 전체 4%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그 4% 중 1%는 특목고에서 데려가고 1%는 좋은 학군에서 데려갑니다. 결국 부모가 생각했던 그 확률은 1%도 안 되는 것인데 거기에 돈, 에너지를 다 쏟아 부어요. 그렇게 하면 정말 내 아이가 행복해질까요? 


우리들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엄마들은 남자와 달리 해고에 대한 공포가 없고 자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큰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엄마 자신의 행복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엄마가 바뀌면 세상이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뭘 해야 될지 모르는 경우가 많지요. 그렇다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삶은 어떤 것인지 인문학적으로 성찰해보자는 취지로 나온 프로그램이 ‘엄마의 인문학’입니다.


예를 들면, 보통 어딘가에 적을 두고 있어야 명함을 주고받는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엄마들도 명함을 하나씩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정CEO’라고 쓰고 뒷면에는 좋아하는 문구를 써서 명함을 주고받을 수도 있겠지요.


세상은 엄마 손에 의해서 점점 바뀔 수 있어요. 엄마는 아이를 바꿀 수 있는 주체고 아이를 바꾼다는 것은 미래를 바꾼다는 거니까요.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엉망이면 어떻게 부모로서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럼 엄마들끼리 연대해서 분노할 건 분노하고 실천할 수 있는 건 실천해야 합니다. 이러한 힘이 21세기 대한민국의 힘입니다. 


- 가톨릭교회 내 여성의 위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국 교회는 여성신도가 2/3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사목위원장, 재정위원장 전부 남자입니다. 회계사인 여성신도가 있어도 재정위원장을 시키지는 않더군요. 여자는 자모회장 같은 허드렛일만 시켜요. 왜 여성은 ‘장’을 하면 안 되는지 화가 납니다. 제가 다니던 본당에서는당시 여성 부회장을 세우자고 건의했고, 고맙게도 신부님이 건의를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여성 총회장도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여성 몫의 부회장마저 사라지고 제자리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교회도 변화할 때가 됐습니다. 교회에 이런 마초적인 생각이 오래 박혀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복음서를 읽는지 모르겠습니다. 초대교회 바오로서간을 봐도 중간 중간에 여성들이 나오잖아요. 그렇게 다 써먹다가 제도교회가 되고 로마제국에 편입이 되고 난 후에는 전부 남성이 차지했고 그 후에도 아무 변화가 없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페미니스트이자 휴머니스트였어요. 여성해방은 당대에 매우 큰 충격이었을 겁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말년에 여성에게 사제직을 줄 수 없다고 말했어요. 그때 들고 나온 것이 ‘교황 무류성’ 이었습니다. 당시 교회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비판이 없었습니다. 교회에서 여성해방, 양성평등이 먼저 이뤄져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통해 가정과 사회에서 평등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 현재 우리나라 대학에 인문 관련 학과가 사라지고, 연구자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입니다. 



▶ 대학에서 인문학은 사라져가고 있지만 시장에서는 인문학 강좌들이 장사 진열대처럼 깔려있어요. 「하버드학생들은 더 이상 인문학을 배우지 않는다」라는 책에서 총장인 드루 파우스트는 교양교육을 하는 목적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일생동안 적어도 여섯 개의 서로 다른 직업을 갖는다는 거에요. 여섯 번째 직업을 선택할 때 교양교육이 도움이 되는데 우리는 너무 한편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삶을 여러 단계로 봤을 때 ‘각 단계에서 필요한 무엇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인문학입니다. 삶을 설계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교육이 되어야 하고, (고전적인 방식의 인문학이 아닌) 그런 교육으로써의 인문학이 강화되어야 합니다. 


또한 어떤 주제로 하든지 궁극적인 목적, 대상, 주제가 인간의 문제로 귀결된다면 그것이 바로 인문학입니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는 자연과학이지만 영화 <인터스텔라>는 인문학이라고 봅니다. 상대성이론을 이용해서 시간이 바뀌면 ‘나와 세상’, ‘나와 타자’, ‘나와 자아’의 관계방식이 변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요. 


개별화, 전문화 됐을 때 통합해서 볼 수 있는 안목과 이것으로 내 삶의 로드맵을 짜고 사회에 대한 유기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하는 것, 그래서 보다 나은 세상과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각자의 역할과 소명을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것. 그것이 우리 인문학이 주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어떤 다른 교육으로도 채울 수 없고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복음은 인문정신의 요체인데 복음을 인문정신으로 바라보지 않고 경전과 교조로만 바라보니 삶으로 들어오거나 사회로 연결되는 지점이 없는 것 같습니다. 속도와 효율의 시대는 철저하게 하드웨어, 소프트웨어의 결합만으로 살아가야 하잖아요. 우리 사회는 휴먼웨어에 투자를 안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휴먼웨어는 시간과 비용은 많이 들지만 티도 안 나고, 아주 늦게 결실이 나타납니다. 그러니 아무도 안 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21세기 가치는 휴먼웨어에서 옵니다. 결국 인문학이 휴먼웨어를 키우거나, 키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현재는 그렇게 하고 있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 사제와 수도자들이 인문학 교육을 잘 받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인문학 교육과정이 별로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학’ 같은 것이라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을텐데 그런 것도 없지요. 성당 건물은 그 시대의 영성을 반영하고 상징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배운바가 없으니 ‘보기 좋을 정도’로, 업자들이 설계해주는 대로 성당을 짓습니다. 그러면 5년쯤 지나면 흉물이 되는 경우가 많지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최소한 미학과 건축 교육과정부터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신학교 교과과정은 반은 신학이고 반은 철학입니다. 제가 윤리철학을 가르치는데 신학교 교과과정에 ‘윤리’가 들어가는 과목만 8개입니다. 철학과 학생들도 그렇게는 안 합니다. 사제들이 현장에 가서 신자들에게 듣게 되는 고민의 대부분은 ‘돈’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경제윤리를 공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정의론에서 분배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지, 자본주의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정의론과 복음서를 연결 지어서 공부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존 롤스의 입장에서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공부하게 합니다. 참고자료로 회칙이나 바티칸공의회 문헌 등을 봐도 좋으니 입체적으로 공부한 것을 과제로 제출하라고 요구 합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 나라의 품위는 가난한 사람들을 국가가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인용하자면 ‘한 종교의 품위는 신도들에게 자유와 해방 정신을 얼마나 심어 줬느냐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 외국에 가면 가톨릭은 보수적이고, 개신교는 개혁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가톨릭을 진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가톨릭이 정말 진보적인 것이 아니라 개신교가 지나치게 보수적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렇게 느껴질 뿐입니다. 게다가 이것도 김수환 추기경 시절의 이야기 이지요.


현재 주교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가톨릭교회가 중산층 교회라고 착각하는 데에 있다고 봅니다. 사실 중산층은 없다고 봐야합니다. 설령 현재 중산층이어도 직업이 끝나는 순간 빈민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OECD국가 중 젊은 시절에 뼈 빠지게 일하고, 늙어서 폐지 줍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걸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죠. 나라가 못 한다면 적어도 교회 안에서 우리가 먼저 바꾸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정작 교회가 운영하는 대학과 병원에서는 비정규직을 고용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에 대한 반성이 없는 것 같습니다. ‘가난한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근원적인 공감의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교회는 보수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 인간에 대한 공감, 자유와 평등, 사회 정의 등을 지키기 위해 내 목숨을 바칠 수 있고 만약 그것들이 망가질 경우 비판하고 저항하고 맞설 싸울 수 있다면 보수입니다. 그런데 망가져도 모른 척 하거나 자신의 잇속을 위해 왜곡한다면 그것은 수구입니다. 포도밭 주인 정도 되는 사람이 진정한 보수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21세기판 요한 23세라고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선택했을 때 혁명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가 이전부터 프란치스코 마케팅을 했으면서 (교황 중에) 아무도 ‘프란치스코’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가 뻔히 드러나는 데 그 이름을 선택했다는 것이 혁신적이고 희망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현재 교회가 교종의 메시지를 해석하고 실천하기는커녕, 어떻게 차단할까에 대해서만 고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 시대정신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가우디움(기쁨, Gaudium)은 있지만 스페스(희망, Spes)는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 가톨릭교회의 강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강론은 그날 복음을 되새겨서 삶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체가 영성체이기도 하죠. 저는 신학생들에게 사제가 되면 드라마를 보고 저 드라마가 왜 나왔는지를 생각해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드라마와 오늘의 복음을 연결시켜보라고 권유합니다. 예를 들어, 최근에 먹방(먹는방송)이 유행인데 먹방이 왜 나왔는지, 사회적으로 어떤 현상인지, 복음적으로 어떻게 볼 것인지를 생각하고 오늘의 복음과 연결시켜야 하는 거죠.


또, 강론을 써서 그대로 읽지 말고, 너무 신학적인 얘기만 하지 말라고 조언 합니다. 신학을 배우는 이유는 깊이 있고 살아 움직이는 복음으로 끌어내기 위해서 입니다. 성서에 대해 텍스트적인 이해는 하지만 컨텍스트적 이해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입니다. 


- 마지막 질문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대단한 학자들이 많이 나왔었지요.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  


▶ 뉴먼 추기경은 보수적이었습니다. 보수적인 인물이었지만 당시 젊은이들을 어떻게 미래 교회 리더로 만들까하는 깊은 고민들을 했습니다. 뉴먼 클럽을 만들어서 그것을 퍼뜨렸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보수적인 상황에서도 교회가 유지될 수 있었겠지요. 어려워 보이지만 한국에서도 뉴먼 추기경 같은 안목을 갖춘 사람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네, 오늘 시간 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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