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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교회 정성학 목사 인터뷰 : “교회 갱신은 곧 목회자의 갱신”
  • 김근수
  • 등록 2016-03-07 10:5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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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근수 편집장) 오늘은 제주시 기적의교회(기독교대한감리회) 정성학 목사님과 만나고 있습니다. 목사님 반갑습니다. 예배에서 어떤 것을 가장 중점을 두시는지요. 


 (정성학 목사) 어느 목사나 마찬가지지만 신앙의 최고 가치를 예배에 두고 있습니다. 인생과 신앙의 성공이 예배의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대한민국 약 10만 개 정도의 개신교회 예배형식이 교파마다 다른데, 저는 예배를 다섯 개의 무대로 나누어 바치고 있습니다. <열린 마당>과 <올림 마당>, <내림 마당>, <드림 마당>,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눔 마당>으로 진행합니다. 


먼저 <열림 마당>은 하느님께로 향한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러 왔는데 하느님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먼저 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올림 마당>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 찬양을 바치는 것입니다. <내림 마당>은 저희의 기도와 찬양을 바친 후에 하느님께서 하늘을 여시고 저희에게 당신의 말씀을 주시는 시간입니다. 그것을 듣고 하느님께 감사의 마음을 올리는 것이 <드림 마당>입니다. 드림 마당에는 헌금 봉헌과 헌금 찬송이 들어있습니다. 또한, 예배는 하느님과 인간의 수직적인 관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 간의 수평적 소통이 필요하므로 <나눔 마당>으로 예배를 마치는데, 여기에는 성도와의 교제와 사랑의 친교가 있습니다. 


- 최근의 개신교에서는 현대문화에 맞게 예배를 쇄신하자는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특별히 어떤 부분에 대해 변화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예배 갱신과 변화에 대한 생각들은 이미 한 세대 전부터 있어 왔고, 그동안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목회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전환할 수 있는 열쇠를 가진 목회자들이 기성세대이기 때문에, 필요는 알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구호는 요란했지만 실제로는 변화와 개혁의 모습을 찾기 힘듭니다. 그러나 요즈음 많은 교회들이 이런 요구들을 수용하여 많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배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당신의 권세로 이 땅에 계시하시는 것이 말씀이고, 말씀은 강단 사역자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므로 이것은 설교자, 목회자, 결국 목사로 귀착됩니다. 예배 갱신, 교회 갱신은 설교가 갱신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설교 갱신이란 설교자의 갱신이 전제되는 것이지요.  


설교를 갱신하고 변화하는 것은 설교하는 시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설교자의 삶에 얼마나 강력한 하느님의 임재와 역사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학교에서 배우는 설교의 테크닉이 아니라, 목회자 개인의 ‘하느님 앞의 무릎 꿇음의 영성’이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의 깊은 이해와 탐구, 그리고 기도가 함께 이뤄져야 가능하므로 예배 갱신은 말씀 갱신이고, 말씀 갱신은 말씀 선포자의 갱신입니다. 그리고 이 갱신은 깊은 성경 연구와 기도, 그리고 성도들이 요구하고 바라는 깊은 영성의 삶이 기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간단한 일은 아니지요. 


- 예배갱신에서 말씀 선포자의 갱신이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목사님이 보시기에는 한국 교회는 그 부분이 만족스럽게 갱신 되었습니까? 


 제가 자신을 돌아볼 때에, 아직 요원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 갱신은 영원한 우리의 과제라고 봅니다. 개신교가 가톨릭에서 변화를 추구하며 일어선지 500년이 다 됐습니다. 1년만 지나면 500주년이 되는데, 어쩌면 이 시간 동안 우리 개신교는 그 때 루터가 교황이나 교황청을 향해 외치던 외침을 우리 신도들에게 듣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목사가 이야기해도 신도들이 신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직분이 올라갈수록 불신을 받고 있습니다. 


아시는 대로, 예전에는 교회가 사회를 견인했지만, 이제는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고 교회를 지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개신교가 보편적으로 복음 사역에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개혁의 대상을 늘 외부에서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갱신과 변화는 누룩이 술을 발효하듯 안에서부터 조용히 시작돼야 하는데, 매번 세상을 향해 개혁 기구를 조직하고 개혁을 외쳤습니다. 기구에 소속된 사람들 자신이 스스로 개혁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없습니다. 


- 예배 갱신에서 ‘말씀 선포자’ 부분을 강조하셨는데, 혹시 성도들은 예배 갱신을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이 있을까요? 


 개인적으로는 지도자가 잘 하면 성도들은 본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매일 강단에서 목사가 교인들을 탓하고 나무라지만, 결국은 그들 앞에서 모범이 돼야 할 우리 지도자들이 그것을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세상일에서 벗어날 수 없다 보니, 변명 같지만 기도하는 시간을 확보하기 어렵고, 영성을 유지하기 힘듭니다. 상황적으로 매 순간 저의 삶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채우기 어려우므로, 날카롭고 거칠고 날선 모습들을 보이게 됩니다. 이것을 본 교인들은 목사들을 보며 상처받고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목사님께서 설교가운데 강조하시는 부분은 무엇인지요? 


 저는 복음의 능력, 기도의 능력, 하느님의 약속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각각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있다고 믿기 때문에, 모세에게 하셨던 말씀을 저에게 하시고 갈릴래아에서 베드로에게 했던 말씀을 저에게 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생물학적으로 사람이 부활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 삶 속에서 떠오르는 기적의 사건들이 지금도 일어나는 것으로 믿기에, 말씀에 대한 신뢰, 그것을 향해 끝없이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말씀의 임재가 지금도 동일하게 계속되는 한, 하느님의 역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합니다. 그래서 원론적이지만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경험하는 것은 예수님 시대에는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그 분을 통해서 경험했지만, 지금은 말씀으로 임하시는 하느님을 경험하는 것이 최상의 길이라고 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이 말씀하시도록 하느님과 동질성을 갖는 영성과 깊이 있는 묵상이 말씀의 본질을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세상에 드러내는 <선포되는 하느님>을 말씀으로 믿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십자가’와 ‘하느님 나라’ 중 어느 것을 더 강조하십니까? 


 저는 십자가를 훨씬 더 많이 말합니다. 저는 ‘십자가’와 ‘하느님 나라’는 별개로 볼 수 없고 십자가의 끝이 하느님 나라에 닿아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굳이 분리해서 생각한다면 용어와 주제에서 십자가를 더 많이 언급하고 설명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는 갈라디아서 6장 14절의 말씀은 저의 평생 좌우명일 만큼 십자가에 애정이 많이 갑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는 결국 하느님 나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 공관복음 저자들은 세례자 요한을 언급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한 유일한 사도입니다.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성경의 ‘이 때’는 세례자 요한이 참수를 당한 때입니다. 요한이 참수당하면서 광야 시대는 끝이 났고 예수님 시대가 시작됐습니다. 또한, 예수님 시대가 끝나고 나서 부름을 받은 사도가 바오로 사도이므로 그 이전 세례자 요한을 언급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바오로는 예수님에 광적이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중심이 예수님이었을 뿐, 의도적으로 세례자 요한을 배척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초기교회가 예수님의 좌우편에 있는 사도를 베드로와 요한이라고 생각해 왔다면, 바오로는 그 자리에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직접 부름 받은 사도였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적 생각입니다. 


- 목사님도 가끔 기도가 안 될 때가 있습니까? 


 가끔이 아니라 아주 많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한 가지는 하느님과 거리감이 생기고 세상의 죄와 친밀할 때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세상의 일로 분주할 때입니다. 저는 설교 중에 극단적인 표현으로 ‘바쁜 건 죄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는 일이 많고 사람이 분주해서 마음이 주님께로부터 멀어질수록 마음이 꼬이고 여유를 잃어 기도가 잘 안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마음이 멀어진다는 것은 처리해야 할 일 때문에, 마음이 주님에게만 집중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금식 중에는 따로 기도시간을 내지 않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절실한 기도와 묵상이 이뤄집니다. 그러나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할 때는 부르짖고 악을 써도 기도가 허공에 떠도는 경험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영적 생활이기 때문에 세상과 친밀해지면 저절로 하느님의 응답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이는 현대인의 병을 바쁨병과 피곤병이라고도 지적했습니다.


- 교회에서 성령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목사님은 성령을 어떻게 이해하고 체험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예수님을 믿던 해에 예배를 드리면서 천국을 경험했습니다. 교회를 평생 처음 나간 날 저녁에 요한묵시록 1장을 설명하시던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폭포수처럼 주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 후로 기도에 대한 절실함을 느껴 매일 저녁 8시부터 아침 4시까지 기도를 했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이어가던 어느 날 밤, 주님이 저에게 오셨고 밤새도록 주님과 단둘이 대담하듯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교회에 대한 모든 것을 주님께 말씀드리면서 새벽까지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음 날 저녁에도 주님이 오셔서 못 나눴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 후로부터 성경을 보면 하느님께서 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는지 주제와 방향이 보입니다. 이것은 목회해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날의 체험을 통해서입니다. 저는 은퇴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성경을 보는 눈을 하느님께서 열어주셨기 때문에 항상 청년의 마음으로 비전을 꿈꾸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부, 성자, 성령의 하느님에 대해서 제 나름대로 해석을 이렇게 합니다. 구약의 성부 하느님은 ‘뒷모습’입니다. 먼저 구약에서는 하느님 말씀만 전하셨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반면 신약의 하느님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제자들과 이야기를 하고 보이신 하느님의 ‘앞모습’입니다. 성령님은 하느님의 옆모습입니다. 성령의 하느님은 지금도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하느님을 가장 강하게 체험하는 것은 말씀을 선포할 때인데, 이 때는 하느님의 기운이 제게 술 취한 듯이 강하게 옵니다.


- ‘하느님이 자비로우시다’는 표현도 있고 ‘공의로우시다’, ‘의로우시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목사님은 설교하실 때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많이 강조하시는 편입니까?


 저는 기도할 때 사랑이신 하느님이라고 기도하는 대신 ‘전능하신 하느님!’이라고 기도합니다. 하느님은 공의와 자비를 초월하는, 우주와 만물을 지배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제가 전능하신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전능성 안에 사랑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자를 심판하는 공의로우심도 전능하신 하느님 안에 들어있습니다. 또 일부 하느님의 이해에서 공의와 사랑이라는 명제에 편중하다 보니 서로 하느님의 이해에 대한 주장이 대립되어 보수와 진보적 신앙관을 낳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 바오로 사도에 대해서 목사님이 개인적으로 배운 점이나 따르고 싶은 점을 말씀해주십시오. 


촛불에 불이 붙으면 바로 밝아지듯이 바오로는 주님을 경험하고 바로 복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바오로에게서 사목이나 열정이나 헌신도 배울 점이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바오로에게서 겸손을 중요하게 배웠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전통 유대 혈통과 어린 시절부터 지켜왔던 율법 세계관, 그리고 히브리어, 아람어 등 몇 개 국어를 구사했던 명석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스스로를 ‘이 세상의 가장 낮은 자보다도 더 낮은 자’라고 고백합니다. 


이후 그는 겸손과 눈물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며 사목합니다. 감옥에 갇혀서도 교회 공동체에게 항상 그리스도의 낮아짐을 본받으라고 권합니다. 자신을 일컬어 <죄인의 수괴>라거나 <만삭되지 못한 자 같다>는 표현은 그의 겸손을 잘 나타내 준 표현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어찌 바오로 사도를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부단히 조금이라도 겸손해 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물론, 그래도 우리의 몸에는 교만이 습관화 되어 있습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에게서 보신 좋은 점이 있습니까?


저는 그분께서 정말 사람 중에 두려워하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이나 장관, 어느 나라 권력자에게도 말입니다. 교황님이 방한했을 때 한국은 세월호 사건이 큰 이슈였습니다. 그런데도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을 직접 만나고 위로의 말을 전하며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그 분의 말씀을 들으며 ‘개신교 지도자들도 이 정도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도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못하고 삽니다. 


저는 그분의 과거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이 하느님 이외에는 두려워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강력한 권력에도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오직 한 분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만을 두려워한다는 말씀은 없었지만, 두려운 한 분이 없으면 세상이 모두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오래 사셔서 가톨릭교회의 내적 정상화가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근·현대 가톨릭 역사에 우뚝 서는 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 빛은 뒷모습도, 앞모습도, 옆모습도 다 빛 아닙니까?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진실하게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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