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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우울한 능력자들
  • 김혜경
  • 등록 2016-02-03 13:40:50
  • 수정 2016-02-03 17:3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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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한국 사람이 독일말로 책을 냈단 말이지? 그것도 철학책을? 나오자마자 2주 만에 초판이 매진될 만큼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는 한병철의「피로사회」. 독일의 주요 신문과 방송에서도 이 시대가 처한 핵심적인 문제를 예리하게 파헤친 책이라 격찬했단다.


그래서 한국 사람이 쓴 책을 한국 사람이 번역해 한국에서 출간했고, 역시 큰 인기를 끌었다. 겉보기엔 시집처럼 작고 얇은데, 어떤 책인가 싶어 호기심이 났다. 저자의 이력도 좀 독특하다. 금속공학을 전공한 후 독일로 건너가서는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 교수란다. 


한병철은「피로사회」에서 현대사회의 패러다임을 명료하게 포착해냈다. 그의 말대로 과거에는, 무엇무엇은 해도 된다는 긍정보다 이런저런 걸 ‘해서는 안 된다’는 부정이 많은 사회였다. ‘남자가 그러면 안 된다’거나 ‘여자가 그러면 못 쓴다’ 등 일상에서도 소소하게 부정적인 말들이 다반사인 사회였다. 


이처럼 금지, 강제, 규율, 의무, 결핍, 타자에 대한 거부와 같은 부정의 개념들이 근대를 지배해온 패러다임이었다. 우리 부모세대만 해도 이런 푸코식 규율사회 속에서 살아온 거다. 


그러나 오늘날은 다르다. 능력, 성과, 자기주도, 과잉, 타자성이 소멸된 긍정의 사회다. 한병철은 21세기 들어 긍정의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사회, 그러니까 ‘성과사회’로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진단한다. 그래서 이 사회의 구성원은 더 이상 강제에 의한 ‘복종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가 되었다(p.23)는 거다.


긍정성이 넘치는 현대사회의 성과주체들은 저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가 최상의 가치가 된다. 강제가 아닌 내 자유의지에 따라, 내 선택으로, 나를 개발하고 계발한다. 건강을 위해 운동도 해야겠고, 영어 말고 중국어도 필요하니 부족한 잠시간을 더 줄인다. 그래도 불안하다. 나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더 열심을 내야한다고 스스로를 질책한다.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 나에게, 사회는 연신 따가운 눈총을 보낸다. 


“그게 최선입니까?” 


왜일까? 


사실, 자본주의 경제의 관심은 좋은 삶이 아니다. 자본주의 경제는 더 많은 자본이 더 많은 삶을, 더 많은 삶의 능력을 낳을 거라는 환상을 자양분으로 발전한다.(p.112) 게다가 오늘날은 이런 자본주의 시스템이 극단으로 진화한 신자유주의 시대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이건 기업이건 자유로이 선택하고 경쟁하라는 철저한 자유시장주의가 핵심 키워드다. 


그런데 이 ‘자유’라는 말에 함정이 있다. 자유라는 말을 앞세웠지만, 실은 장삼이사가 자유로이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불평등하게 축적되어온 자본의 거대한 힘과 그 흐름을 국가가 묵인하고 개입하면서 차곡차곡 다져진 경제 체제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보이지 않는 권력이 폭력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거다. 이러한 권력은 ‘경쟁’에다 ‘자유’라는 이름을 덧입혀 도피처 없는 무한 자유경쟁 체제 속으로 사회구성원들을 가차 없이 내몬다. 


또 하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경제 규모가 계속 확장할 수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무언가를 효율적으로 확장시키려면, 물건이나 서비스, 혹은 콘텐츠를 끝도 없이 소비해야 한다. 그래야 만들고 만들고 또 만들어 낼 테니까. 그래서 아끼고 절약하는 건 좀생이 짓이다. 통 큰 소비가 미덕이 되고, 그게 멋진 삶인 양 포장하면서 더 많이 소비하라고 꼬드긴다. 성과사회에는 더 많은 성과를 올리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게, 더 큰 성공이라는 개개인의 욕망을 사회적으로 부추겨 생산성을 극대화하려는 자본의 논리가 숨어 있는 거다. 


이제 그는 보다 많은 걸 손에 넣기 위해 자신에게 말한다. 박카스나 비타500도 모자라, 레드불이나 몬스터드링크 같은 에너지음료를 마셔가며, “뭐든 할 수 있어. 힘을 내! 힘을!” 누가 시켜서가 아니다. 스스로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다. 그래야 잘사는 거라 느껴진다.


그런데, 이상하다. 몸도 마음도 지치는 기분이다. 점점 더 피로하기만 하다. 자꾸만 자신도 없어지고 초라해진다. 별로 행복하지도 않다. 이런저런 일들로 굉장히 바쁜데, 그럴수록 더 외롭고 고독하다. 솔직히 말해서 뭐든 다 할 수 있는, 내가 내 마음에 쏙 드는 그런 능력자나 슈퍼맨은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더 우울해진다.


성과를 통해서만 존재감이 확인되는 자아는 성공을 위해 자신을 채찍질한다. 자기가 설정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해 스스로 좌절하고 우울감에 빠진다. 심지어 자신을 착취하는 성과사회를 넘어, 스스럼없이 제 몸에 약물을 투여하는 도핑사회(p.63)로 발전하고 있다는 지적에는 머리카락이 쭈뼛 서기도 했다. 이렇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끊임없는 긍정성은 긍정성 ‘과잉’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저자는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아자아자! 파이팅!’ 이런 거 좀 그만하란다. 오히려 성과사회의 과잉활동과 과잉자극에 맞서서 사색적인 삶, 영감을 주는 무위와 심심함, 휴식의 가치를 역설한다. 


긍정의 힘과 함께 니체가 말한 ‘중단하는 본능’같은 부정의 힘을 키워야 활동과잉에 빠지지 않는단다. 그러면서 좀 머뭇거려 보라고, 그리고 생각에도 잠겨보라고 충고한다. ‘피로’를 느끼라는 거다. 피로하고 지쳐서 나른하니 있는 잠깐의 시간, 막간의 시간을 가져야 한단다. 


한트케는 이런 막간의 시간을 ‘평화의 시간’이라 했다. ‘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피로한 사람의 길고 느린 시선 속에 태평함이 자리한다. 막간의 시간은 무차별성의 시간, 우애의 시간이다.’(p.72)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르느라 소진된 몸과 마음에 브레이크 타임이 필요하니, 잠시나마 평화로운 시간을 가져 과잉 활동하려는 욕망을 억제하라는 거다. 지나친 긍정 정신으로 인한 성과주의적 집착을 내려놓고, 나른함을 느끼는 평화로운 시간 속에서 타자와 세계에 자신을 내맡기란다. 그래야 타자와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고 새로운 영감도 얻을 수 있다면서 말이다.


오호라, 그렇군. 멍 때리고 있는 시간을 즐기고, 가끔은 나무늘보가 아닐까 싶을 만큼 한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거 좋아해도 된다는 거지? 나에게 할 수 있는 거 보다 ‘하지 않거나’, ‘할 수 없는’ 게 많아도 괜찮다 말해주는 책. 


그러고 보니, 나는 어려서부터 책을 실컷 볼 수 있음 좋겠다는 거 말고는, 별다르게 되고 싶거나 꿈같은 게 없었다. 그래서 남들이 짱짱한 목소리로 장래를, 희망을 말할 때, 나는 속내를 드러낼 수 없었다. 목표를 향해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매진하며 살아도 모자를 판에, 게으르고 한심하게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런 나에게 한없는 위로를 주었던「피로사회」. 이제는 천천히 심심함을 맘껏 누리면서 어떤 소박한 삶을 꾸려 볼까나.



[필진정보]
김혜경 : 서강대학교를 졸업했다. 너른고을문학회원이며, 광주문화원 편집기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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