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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한테 말 한 게 아니구요 나 혼자서 기도했어요"
  • 전순란
  • 등록 2015-04-23 09: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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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22일 수요일, 맑음


“여보, 아침 먹고 나서 잔디밭에 풀 좀 뽑읍시다. 당신은 진디 밭에. 나는 화단에 풀을 뽑는 게 낫겠지? 당신한테는 어떤 게 꽃인지 잡초인지 안 보이지만 잔디와 풀은 구분이 쉬우니까...” 그러나 잔디밭에도 며칠간의 비로 잡초가 훌쩍 자라고 그 중에는 꽃을 피우고 씨주머니를 조랑조랑 달고 있다.


쑥이나 마가렛, 공작꽃, 박하, 참나물까지도 잔디밭과 화단 사이에 몽돌로 박아놓은 경계를 사정없이 무너뜨렸고, 나도 오리궁둥이를 하고 앉아서 사정없이 그것들을 뽑아낸다. 화단에 있으면 화초지만 잔디밭으로 넘어오면 잡초취급을 당하는 게 억울할 게다. ‘지심(地心)을 매는’ 아낙농부에게 왕도가 따로 없어 한 포기 한 포기 호미질 하여 뿌리 채 뽑아내는 길이다.


나는 겨우 잔디밭 풀매기


‘‘개미루’한테 임신 혐의를 씌웠던 기욱이엄마가 농약통을 메고 밭에서 나온다. “뭐 했어?” “타죽는 약 쳤제.” “또 약쳤어?” “행님도 잔디에 풀 뽑드만... 먹을 것도 아니고 걍 약 팍 뿌려삐리제. 쫌 남았는데 내가 쫌 뿌려주까?” “놔둬!”


오후에는 “축복받은 집”을 읽었다. 1967년생 인도출신 여자 줌파 라히리가 33세에 첫 소설집으로 낸 이 책이 오헨리문학상, 헤밍웨이문학상을 수상하고 퓰리처상까지 받았다니 호기심을 잔뜩 돋구었다. “피르자다씨가 식사하러 왔을 때”라는 단편에는 미국 와서 지내는 어느 식물학자, 파키스탄 군대에 침공을 당해 불타고 포격당하는 다카에 아내와 딸들을 두고 온 교수 얘기가 나온다. 


“저 사람은 인도인이 아니란다 우리와 싸우는 파키스탄 사람이란다.”라는 인도인 아빠의 말에 어린 딸이 유심히 살펴보는데 식구들이 ‘인도인이 아닌 사람’을 대하는 것은 여전하다. 그를 기다리고 집에 맞아들이고, 격렬한 전투가 있던 날은 온가족이 그 교수와 함께 마음 졸이고, 전쟁 후 교수의 아내와 딸들이 무사했다는 얘기를 듣고서 축하의 잔을 든다. 귀국한 피르자다씨의 부재를 느끼고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아주 멀리 떨어진 누군가를 그리워하게 된다.



저자는 가족 친구 연인 모든 인간관계에 내재한, 사랑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폭력을 내비치지만 그보다 더 깊은 관계의 세계로 독자를 데려가면서 더 뜨겁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삶을 그려낸다. 정말 아프고 불안하지만 그래도 내치지 못하고 사랑하는 인간관계를 인도인답고 여성적인 필치로 섬세하고 담담하게 풀어간다. 여성적인 눈과 마음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던 괴테의 말이 다시 떠오른다.


저녁을 먹으면서 오늘 읽은 책 얘기를 들려주니까 보스코는 오늘 잡지에서 자기가 읽은 글을 들려준다. 미국 남부지방의 인종차별정책 철폐로 흑인학생이 처음으로 초등학교에 등교하는 날(1960년)! 주일이면 예배당에서 경건하게 찬송가를 부르는 백인어른들이 흑인 감히 학교 온다고 자기네 자녀들의 등교를 거부하고 근 일 년 학교 앞에서 시위를 한다. 혼자서 등교하는 여섯 살 난 흑인소녀에게 온갖 욕설과 협박을 퍼부어 경찰이 소녀의 등교길과 하교길을 호위해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욕설과 고함을 지르는 어느 남자 앞에서 소녀가 걸음을 멈추고 뭔가 종알거리는 것을 보고서 “그 사람한테 뭐라고 했니?”라고 묻는다. “그 사람한테 말한 게 아니구요, 나 혼자서 ‘예수님, 이 사람들 용서해 주세요. 자기들 하는 짓을 모른답니다.’라고 기도했어요.” 소녀의 태도가 흥미로워 그 가족을 찾아갔더니 그 기도를 가르친 할머니도 부모도 글자를 몰라 성경을 읽을 수 없는 문맹이더란다!


보스코는 나치독일에서 문신이 화려한 유대인 살가죽으로 성경을 장정하고 그것을 서로 뽐내며 옆구리에 끼고 예배당에 가던 1940년대의 SS장교부인들, 70년대 군사반란을 일으켜 ‘추악한 전쟁’을 저지르고 무려 3만 명의 진보인사들을 학살하면서도 “하루라도 미사와 영성체를 거르면 제겐 사는 보람이 없어요.”라던 아르헨티나 장군. 작년 8월 교황 방한을 두고 “교황이 세월호 가족을 다섯 번이나 손잡게 한 강우일 주교를 파문하라!”는 식의 현수막을 명동성당 들머리에 걸고서 고함치던 일부천주교신자들을 떠올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개미루'는 왜 휴천재를 찾아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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