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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와 하느님 질문 1부
  • 김근수 편집장
  • 등록 2015-04-21 11:03:40
  • 수정 2015-06-08 17:2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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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와 백성의 고통

이 잔인한 4월에 세월호 참사 1주년이 되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다. 세월호 참사 앞에서 국민들은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 그리스도인과 신학자들은 신앙과 신학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다른 끔찍한 사건도 많은데 왜 그중에서 세월호 참사가 그리스도교에 충격을 주었는가. 세월호 참사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어떤 종류의 질문을 주었는가. 왜 그리스도인과 신학자들은 세월호 참사 앞에서 신앙과 신학을 되돌아보게 되었는가.


세월호 참사는 국가권력의 잔인함을 보여준 사건이다. 실종자를 구조하지 않는 국가권력, 진실을 보도하지 않는 언론, 저항하지 않는 야당, 희생자의 아픔에 무관심한 사람들과 종교 앞에서 세월호 유가족은 크게 절망하였다.


이웃의 고통 앞에서 눈물 흘리지 않는 무관심은 많은 사람들에게 단순한 일상이 되었다. 무관심의 세계화는 우리 시대의 큰 슬픔이다. 종교를 가진 비율이 국민의 절반이 되는 나라에서 말이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대체 무엇을 가르쳤단 말인가. 그리스도교는 가장 먼저 반성문을 제출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과 예수의 길

자기 시대 백성의 아픔 앞에서 예수는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세상에 드러나기 전에 예수는 평범하게 살았을 것이다. 비정규직 계절 실업자로서 예수는 일자리를 찾아 여러 곳으로 돌아다녔을 것이다. 예수의 직업은 백성의 아픔을 아는 계기가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를 찾기 전에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의 사람을 알기 위해 오랜 시간을 보냈다. 당시 바리사이 양대 학파중 하나인 힐렐 학파의 거장 힐렐(Hillel)이 날품팔이로 평생을 산 것과 비슷하다.


예수는 현실을 아는데 우선 집중하였다. 예수는 존재(Being), 본질(Essence)보다 현실(reality)이 우선 탐구 대상이었다. 하나님 존재 여부에 대한 고뇌, 하나님 존재 증명을 예수는 시도해 본 적이 전혀 없다. ‘철학 과잉, 역사 빈곤’이라는 서양 그리스도교의 흐름은 예수에게 아주 낯설다.


여기서 엘살바도르 해방신학자 이냐시오 에야쿠리아를 주목하고 싶다. 그에 따르면, 어떤 종류의 현실참여든 세 과정을 거친다. 1. 현실을 안다(el hacerse cargo de la realidad). 현실을 지성의 인식 차원에서 보는 일이다. 2. 현실의 무게를 내 어깨에 짊어진다(el cargar con la realidad). 현실을 지성의 윤리 차원에서 결단하는 일이다. 3. 현실의 무게를 책임진다(el encargarse de la realidad). 현실을 바꾸려는 지성의 실천 차원의 일이다.


이런 과정을 예수도 거친 것 같다. 길을 만들기 위해 책상에서 지도만 그리는 학자가 있다. 길을 곰곰 생각하지만 길을 걷지 않는 사람이 있다. 걷는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한 채 우선 속도부터 내는 사람도 있다. 직접 길을 걸으며 길을 내는 사람이 있다. 예수는 길을 생각했고 방향을 정했고 스스로 길을 걸었다. 예수는 탁상머리 신학자나 도서관 신학자가 아니라 길 위의 신학자다. 예수는 현실을 아는 방법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세계를 아는 방법을 택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세상이 예수가 걷는 길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세상 밖에서는 예수를 알 수 없다. 예수를 모르면 가난한 사람들의 신학적 가치를 알 수 없다. 예수와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를 드러내고 밝히는 정비례 관계에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아는 그만큼 예수를 알 수 있다. 예수를 아는 그만큼 가난한 사람을 알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 집중할수록 예수를 더 잘 알게 되고, 예수에 집중할수록 가난한 사람들을 더 잘 알게 된다.


이러한 관계를 예수와 하느님 나라 사이에서 볼 수 있다. 예수를 잘 알려면,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지 잘 모르면, 예수가 누구인지 잘 알기 어렵다.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지 잘 알려면, 예수가 누구인지 잘 알아야 한다. 예수가 누구인지 잘 모르면,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지 아는 그만큼 예수를 알 수 있다. 예수가 누구인지 아는 그만큼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성서에서 예수를 아는 두 가지 방법이 제안되었다. 하느님 나라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의 세상을 통해 예수를 아는 방법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 신비라는 단어를 바울은 아홉 번 썼고 초대교회도 즐겨 사용하였다. 그러나 4복음서에 신비라는 단어가 단 한번 밖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마가 4,11) 예수가 신비라는 단어를 썼다고 보기 어렵다. 사실은(마가 4,11) 예사롭지 않다. 현실도 모르는데 왜 신비를 논한단 말인가.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도 모르는 주제에 감히 신비를 논할 수 있는가.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지, 가난한 사람은 누구인지 예수는 정의하거나 설명하지 않았다. 먼저 단어의 개념을 정의하고 논의를 시작하는 일은 그리스 철학이나 서양 철학에는 익숙한 일이지만, 유다인의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예수는 그저 사례를 드는 것으로 충분하다. 죄가 무엇인지, 세상에 왜 악이 존재하는지 예수는 설명한 적 없다. 예수는 악에 저항하고 악을 없애는 노력에 집중할 뿐이었다. 그리스도교와 신학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예수가 보여준 셈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우리가 다시 설명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탁상머리 신학자도 그런 일은 제법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삶을 따르는 일은 쉽지 않다. 십자가를 설명하는 일은 어렵지 않지만,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일은 쉽지 않다. 예수 부활을 이론적으로 해설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수 있다. 그리스도교가 부활의 사람을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사람들이 그리스도교에 실망하는 까닭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설명이 부족하거나 못마땅해서가 아니다. 그리스도교가 예수를 잘 설명하고서 정작 예수를 따르기를 거부하는 모습에 실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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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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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mcho2015-05-08 17:11:40

    궁금해서 여쭙니다. 가톨릭 성경 표현인 (마르 4,11) 이 아닌 (마가 4,11) 로 표시하신 편집장님의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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