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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을'의 은밀한 반전
  • 김혜경
  • 등록 2015-11-04 11:38:05
  • 수정 2016-01-12 11: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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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슴도치의 우아함 /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 아르테 / 482쪽


깊은 밤, 부쩍 쌀쌀해진 바람에 옷깃을 여미다 올려다본 하늘. 창백한 보름달이 덩그러니 박혀있다. 오늘도 애썼다. 내일도 오늘 같겠지. 짧은 한숨을 내쉰다. 뜨거운 오뎅 국물과 소주 한잔 생각에 마른 입술을 핥는다.


문득, 뭐 좀 다른 건 없나? 좀 다르게 사는 사람은 없을까? 이게 말이 되나 싶지만, 나처럼 분명 ‘을’인데, 충분히 ‘을’이면서, 소위 ‘갑’에게 한방 먹이며 사는 그런 이는 없나? 혹시 ‘갑’ 같지 않은 ‘갑’은 없을까? 상상해본다. 

 

그러다 만난《고슴도치의 우아함》.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고등학교 철학 선생인 뮈리엘 바르베리(Muriel Barbery)가 썼다. 프랑스에서 113주에 걸쳐 베스트셀러가 되면서《해리포터》보다 더 많이 읽히기도 했던 책. 그 인기를 힘입어 영화화되기도 했다. 


저자는 한 마리씩 따로따로 생활하면서 조용하고 어두운, 구석진 곳을 좋아하는 고슴도치에게서 은밀한 우아함의 이미지를 보았던 것일까. 어쩌면 고슴도치들은 지금 어느 곳에선가 은은한 조명아래 음악을 들으며 차를 마시거나《독일이데올로기》나《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 주인공 ‘르네’와 ‘팔로마’처럼 말이다. 


《고슴도치의 우아함》은 두 주인공의 일기를 번갈아 배치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기마다 제목이 붙어 있는 두 권의 일기장이 엇갈리며 섞여있는 셈인데, 그런 독특한 배합을 통해 묘하게도 고독한 두 사람의 지적이면서도 따뜻한 정서적 교감을 느끼게 해준다.


쉰네 살의 르네는 최고급아파트에서 수위로 일하고 있는 과부아줌마다. 어린 시절 그녀의 언니는 빼어난 미모 덕에 부잣집의 하녀로 일하다 임신한 채 돌아왔고 출산 후 곧 죽고 만다. 이를 본 어린 르네는 큰 충격을 받는다. 부당한 줄 알면서도 대책 없이 당하기만 하는 약자들의 고통스러운 삶, 세상의 잔인한 부조리를 어린 나이에 너무 일찍 알아 버린 거다. 그래서 자기도 언니처럼 될까봐 두려워, 가난하지만 명석하고 똑똑한 자신을 철저히 감추고 살기로 한다. 당연히 허위로 가득 찬 고급아파트 사람들 대부분은 수위에 불과한 르네의 참모습을 알지 못한다.


“…이십년 동안 내게 단 한 번도 인사를 하지 않았고, 내가 그 앞에 있어도 내가 존재하지 않는 듯 행동했다. 다른 이들의 의식엔 나타나지만 어떤 사람들의 의식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의 근거를 탐구하는 것은 흥미로운 현상학적 경험이 될 것이다. 내 이미지가 애완견 넵튠의 뇌 속에는 찍히는데 개의 주인 샤브로의 뇌 속에서는 건너뛴다는 것은 아주 재밌는 문제다…” (르네의 일기, <동백꽃>, ‘그레비스라는 이름의 고양이’ 중에서)


아파트 사람들은, 수위들이란 그저 지저분하고 뚱뚱한 고양이와 냄새나는 싸구려 스튜나 먹으며 살고 하루 종일 낡은 텔레비전이나 멀거니 쳐다보며 시간을 죽인다고 여긴다. 나 역시 ‘을’인 주제에 그런 그림이 쉽게 그려진다. 


그러나 르네는 다르다. 달라도 완전히 다르다. 오, 이런 유쾌한 반전이라니. 미셸 부인 르네는 어려서부터 엄청나게 책을 많이 읽어서 아주 박식하다. 문학은 물론, 철학에다 음악, 미술, 애니메이션까지 모르는 분야가 없을 만큼 지적 수준도 매우 높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읽고, 칸트의 관념론과 훗설(Husserl)의 현상학을 논한다. 클라어스의 정물화를 즐기고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듣는다. 레옹 톨스토이의 이름을 따서 자기 고양이를 ‘레옹’이라 부를 만큼 톨스토이를 좋아한다. 정말 멋지고 대단한 수위아줌마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참으로 아름다운 건 드러나게 마련이고 제대로인 사람들은 또 그것을 볼 줄 안다. 그렇게 영민한 이들이 바로 팔로마와 가쿠로 오즈다. 팔로마는 겨우 열두 살이지만 아주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천재소녀다. 삶이란 결국 누구나 어항 속에 갇힌 금붕어 꼴임을 알아채고는 진지하게 자살을 준비할 정도다. 현실을 간파하는 눈이 보통 아니다. 


우연히 팔로마는 르네의 쏟아진 장바구니에서 책 한 권을 보게 된다. 두꺼운 철학 서적이다. 명민한 소녀가 그것을 허투루 보아 넘길 리 없다. 제대로 딱 걸렸다. 그녀가 판에 박힌 수위아줌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미셸 부인…그녀는 지성으로 번득인다. 그런데도 그녀는 노심초사, 수위처럼 연기하려고, 그리고 멍청하게 보이려고 최선을 다 한다…미셸 부인은 고슴도치의 우아함을 지니고 있다. 고슴도치처럼 꾸밈없이 세련됨을 지니고 있다. 겉보기엔 무감각한 듯하지만, 고집스럽게 홀로 있고 지독하게 우아한 작은 짐승 ….” (팔로마의 일기, <문법>, ‘깊은 사색9’ 중에서)

           

르네의 참모습을 알아본 또 한 사람 가쿠로 오즈. 아파트로 새로 이사 온 일본인인데 (일본으로 대표되는 동양문화에 대한 저자의 환상이 조금 불편하지만), 교양 있고 세련된, 그리고 아주 지적인 사람이다. 사회적 지위나 신분 같은 겉모습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 진짜 신사다. 내면의 가치로 사람을 보는 그는 타고난 예지와 섬세한 관찰력으로 르네가 평범한 수위가 아님을 알아본다. 

  

“…가쿠로 오즈 씨는 전혀 다른 눈길로 나를 쳐다봤다…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비슷하지요” 나는 주제를 벗어나려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저마다 다양하지요.” 그가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하는데, 나는 소스라쳤다…《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다. 모든 평범한 수위들처럼 난 이것을 몰랐어야 했고…그것이 톨스토이의 문장이란 것을 몰랐더라면…” (르네의 일기, <문법>, ‘찰나’중에서)


어쩜 그리도 르네와 가쿠로는 문학이면 문학, 미술이면 미술, 영화와 음악,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거의 완벽하리만큼 취향이 같을 수가 있는지. 그 둘은 말하자면, ‘갑’과 ‘을’의 관계로 표면적으로는 정반대의 신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가쿠로는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르네에게 친구가 되자고 제안한다. 르네와 팔로마, 가쿠로에게는 ‘갑’이니 ‘을’이니 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낱말이다. 


누군가를 볼 때, 흔히 나의 시선은 상대방보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을 맴도는 경우가 많다. 입고 있는 차림새와 걸치고 있는 장신구 따위를 힐끗거리며 무슨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지, 직업은 뭔지, 어느 아파트에 사는지 먼저 알려한다. 말하자면, ‘갑’인지 ‘을’인지, 갑이라면 어느 정도 갑인지, 을이라면 또 어느 정도인건지 궁금해 한다. 


이렇게 이런저런 겉치레에 한눈을 파느라 정작 상대를 알 수 있는 진짜 정보에는 집중하지 못한다. 놓치는 게 다반사다. 정말로 마음을 두고 신경 써야할 것들은 예사로 흘려버린다. 나는 얼마나 많은 ‘미셸 부인’들을 만나거나 곁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해 투명인간처럼 대했을까.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아는 팔로마와 가쿠로의 안목과 품위, 예민한 시선, 끈질긴 관찰력들이 부럽다. 


이제는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 그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하는지 잘 살펴야겠다.《토지》나《이방인》,《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문장을 인용하거나 백석 혹은 이상, 마르케스에게서 한 구절을 끌어와 말하는 건 아닌지 꼼꼼히 듣겠다. 혹시 피카소를 좋아하는지, 장한나의 바이올린, 아이유와 자이언티는 어찌 생각하는지. 그리고 막걸리와 와인 중 어느 걸 더 자주 마시는지 눈여겨보겠다. 슬쩍 흘리는 미소라든가 찡긋거리는 콧등, 가벼운 손놀림, 무심히 나오는 말버릇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 


경비실에 택배 물건 찾으러 갔는데 비어 있다. 텔레비전 소리가 왕왕대는 걸 보니 경비 아저씨가 멀리 가신 건 아닐 테고, 혹시 어느 은신처에서 톨스토이를 읽고 계신 건 아닐까? 아니면, 스탕달이나 바쇼의 하이쿠?



[필진정보]
김혜경 : 서강대학교를 졸업했다. 너른고을문학회원이며, 광주문화원 편집기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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