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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칼럼] 죽음을 생각하는 11월
  • 김근수 편집장
  • 등록 2015-11-03 10:07:10
  • 수정 2015-11-03 1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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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에 지구 북반구에 위치한 나라는 늦가을에 접어든다. 여름을 향해 달려가는 남반구에서 11월에 죽음이란 주제는 기후상 조금 걸맞지 않다. 좌우간 달력은 어느덧 얇아졌다. 일 년을 서서히 마감하면서 교회는 위령성월을 지낸다. 특히 죽음을 생각하는 시절이다.


선조들과 순교자들을 생각하며 우리 자신의 죽음을 묵상하는 시절이다. 죽음은 인생의 마지막이 아니다, 죽음은 인생에서 끝이 아니라 끝에서 두 번째다. 그리스도교에서 삶의 마지막은 부활이니 말이다.


삶도 죽음으로 다가서지만, 삶 속에 이미 죽음이 포함되어 있다. 죽음은 생각의 대상이지만 삶의 일부이기도 하다. 생물학적으로 심리적으로 우리 삶은 죽음의 그림자에 이미 감싸여 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곧 삶을 생각하는 것이다. 언제나 죽음은 우리 가까이 있다. 위령성월을 맞아 죽음을 주제로 보자. 


그래도 죽은 이를 ‘자연적 죽음’과 ‘사회적 죽음’으로 나누고 싶다. 질병, 나이 등으로 비교적 자연스레 받아들여지는 죽음이 있다. 그것을 ‘자연적 죽음’이라 부르자. 자살, 사고, 전쟁, 굶주림 등으로 생긴 탓에 억울하고 안타깝게 여겨지는 죽음도 있다. 그것을 ‘사회적 죽음’이라 부르자.


보통 ‘자연적 죽음’을 죽음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생각하여 왔다. 그러나 숫자로나 충격으로 보아 ‘사회적 죽음’도 무거운 주제다. 우리 신앙에는 ‘자연적 죽음’보다 ‘사회적 죽음’이 더 진지하게 다가온다. 나의 죽음도 중요하지만 이웃의 죽음도 중요하다. 죽음을 보는 눈에서 삶이 달라진다. 이런 죽음의 모습은 또 어떤가. 


“대주교님, 이러다 살해당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중 누가 로메로 대주교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정부가 제안하는 어떤 경호도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하지만 조심스럽게 행동하시고, 최소한 다른 민중조직 지도자들이 하는 수준의 경호는 취하셔야 합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행동을 하시면 안 됩니다. 일정을 다양하게 조정하셔야 합니다. 매번 같은 시간에 미사 강론을 하시면 안 됩니다. 강론 시간을 바꿔가면서 하십시오. 혼자서 운전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로메로 대주교는 작은 차를 손수 몰고 산살바도르 거리를 다녔다. 사람들이 “대주교님, 대체 왜 혼자 운전하고 다니십니까?”라고 따지듯 묻자 “나는 혼자 다니는 게 편합니다. 나에게 어떤 불행한 일이 닥친다면, 그때 나 혼자였으면 합니다. 나만 당했으면 합니다. 나로 인해 다른 누군가 다치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로메로 대주교가 살해되기 얼마 전 일화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생각하고 그에 맞추어 행동한 것이다. 로메로 대주교처럼 사는 주교가 얼마나 될까. 우리는 로메로 대주교처럼 죽음을 생각하는가.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라. 그러면 지금 우리 삶이 크게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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