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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사제였나?
  • 김근수 편집장
  • 등록 2015-08-26 09:57:12
  • 수정 2015-08-26 09:5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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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에 대한 여러 호칭 중에서 복음서는 하느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 그리스도를 특히 강조하였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예수를 대사제로 표현하였다. 우리는 사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사제들은 여기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대사제는 예수의 활동을 언급하기에 적절한 호칭중 하나로 히브리서에 소개되었다, 구원 중재자로서 예수의 역할을 다루기에 특히 선호되는 호칭이었다. 사제는 하느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역할로 구약에서 이야기되었다. 사제 개념을 이해하려면 먼저 하느님을 이해하는 순서가 필요하다.


구약과 신약에서 하느님은 동일한가. 구약의 하느님은 창조주요 해방자로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먼저 알려주셨다. 신약의 하느님은 인간이 되신 선한 분으로서 인간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셨다. 구약의 하느님을 자신을 알려주신 하느님이라면 신약의 하느님은 다가오는 하느님이라고 할까. 같은 하느님이 조금 다른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시는 것이다.


하느님 개념만 변화되었을까. 사제 개념도 달라진 것 같다. 구약에서 사제는 사람들과 분리되었고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겨졌다. 히브리서는 사제와 사람들의 분리를 비판하였다. 사제 예수는 우리 가운데 계시며, 죄를 빼고 우리와 똑같고,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신다.


히브리서가 예수에게 대사제라는 호칭을 선사한 이유는 무엇일까. 히브리서는 예수의 죽음을 제일 근거로 내세웠다.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쳤기 때문에 예수는 사제라는 것이다. 사제는 희생하는 사람이고, 희생하는 사람이 곧 사제다. 히브리서는 예수의 인성에서 사제의 특징을 찾았다. 역사 안에서 사는 연약한 인간이 곧 하느님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역사와 인간은 사제 직분이 비롯되는 바탕이요 펼쳐지는 무대다. 역사와 인간을 외면하는 사제직은 그리스도교에 없다.


예수는 자신을 사제라고 생각했을까. 예수는 유다 지파에서 탄생한 평신도였다. 그러나 신약성서 히브리서는 예수의 사제 직분을 출생 성분에서 논증하진 않았다. 히브리서는 예수의 인성과 인간성에서 그 근거를 찾고 설명하였다. 여성 사제직을 반대하는 근거를 예수의 남성성에서 찾는 가톨릭교회의 태도와 히브리서는 그 접근 방식이 같지 않다.


대사제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었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대사제 예수를 따르는 오늘 사제도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 전례와 성사를 사제 직분을 행하는 주요 모습으로 보는 것은 대사제 예수를 구약의 사제로 오해하는 일이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대사제 예수의 의미를 좁게 해석하는 것이다.


성직자중심주의 문제를 평신도와 권력 관계에서 분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직자중심주의를 먼저 사제와 예수의 연관에서 보는 것이 신학적으로 옳다. 그러면 성직자중심주의가 발붙일 곳이 없다. 예수의 대사제 직분을 제대로 이해한 사제가 성직자중심주의를 내세울 리 없다.


평신도와 다르다는 점에서 사제를 보는 경향이 교회에서 흔한 것 같다. 사제와 평신도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제를 예수와 연관에서 먼저 파악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평신도와 다르기 때문에 사제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기 때문에 사제인 것이다.


사제는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다. 사제는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다. 사제는 지배자가 아니라 희생자다. 아직 그렇게 살지 않는 사제는 대사제 예수에게서 아직 한참 멀다.


사제는 거울 앞에 자주 서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자신의 삶이 대사제 예수의 삶과 얼마나 가까운지 물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을 정확히 보는 제일 기준이다. 자신의 삶이 어떤지 알고 싶으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된다. 평신도가 그 질문에 외교적 발언으로 답할 가능성이 높다.


평신도는 사제가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고 있는지 먼저 보아야 한다. 그것이 사제를 보는 제일 기준이다. 나머지는 다음다음 문제다. 사제를 세속화의 늪으로 유혹하는 평신도는 참 나쁘다. 사제를 성직자중심주의 늪으로 부추기는 평신도는 정신 차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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