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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방한 1주년: 추락하는 교회의 영성! 날개는 있는가?
  • 편집국
  • 등록 2015-08-25 10:28:56
  • 수정 2015-08-25 18:5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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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2014년 교황 방한을 얼마 앞두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꽃동네 방문 반대’ 시위가 작은 예수회 수도자들에 의해 불거졌다. 장애인 복지사업을 하고 있는 작은 예수수도회 총원장 박성구 신부가 2014년 5월 20일 청운동 교황청 대사관 기자회견장에서 양심선언을 했다.


그는 이미 이전 3월중에 충북 음성 꽃동네 정문 앞에서 30여 명의 장애인 및 수사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8월 방한 예정인 프란치스코 교황의 꽃동네 방문에 대한 반대의사를 밝힌 바 있다. 박성구 신부는 현재 정직 징계처분을 받은 상황이며, 이 문제를 교황청에 제소하여 교회법원에서 심리 중이다.


수도자들끼리 돈을 가지고 싸움이 났다. 박성구 신부는 ‘교황 성하님! 한국판 마피아 꽃동네 방문은 안 됩니다!’라는 공개서한을 발표하면서, 꽃동네 설립자인 오웅진 신부를 강력히 비판했다.


박 신부는 교황의 방한은 적극 환영하지만, “4백만 평이 넘는 땅, 대한민국 최고의 땅 부자, 유한회사 주식을 개인적으로 30% 소유해 배임횡령 혐의를 받고 있는 한국판 마피아 오웅진 수사가 지배하고 있는 꽃동네 방문은 오웅진 수사에게 면죄부를 주는 결과이기에, 결코 안 된다” 면서 “직책이 높을수록, 최고위 통치자, 최고성직자일수록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을 사랑하셔야 세상은 빛으로 찬란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가평군 내에 21개의 복지단체가 있지만 가평군의 574억 사회복지 예산 가운데 60~80%는 가평 꽃동네로 지원되었다고 발표했다.


수도생활은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박해가 끝나고 제국 로마에 흡수되어 나가면서 설립자의 정신과 영을 잃어버리고 퇴색하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아픔을 보며 사막으로 떠나가기 시작한 것이 기원이 되었다. 그들은 철저한 무소유의 정신과 엄격한 금욕, 고행으로 자신들을 다스려 나갔다.


그리하여 수도생활은 개인이나 혹은 공동체로 분화되며 다양한 수도형태(독수, 혹은 공동정주의 형태)로 발전해 나갔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가난, 정결, 순명을 중요한 삶의 형식으로 간직해 왔고, 다양한 수도회들은 대부분 이러한 무소유와 가난, 정결과 순명을 그들 삶의 존재근거로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 수도자들이 돈을 가지고 싸움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들 삶의 근거와는 무관한 다툼이 일어났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물론 이 두 사람의 사제들로부터 한국 수도자들의 생활을 일반화 할 수는 없겠지만 이 외에도 많은 경우 수도자들의 삶과 영성이 피폐화되어 ‘무늬만 수도자’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그만큼 사람들의 의심을 받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수도원들이 품고 있는 재산은 ‘하느님도 모른다’는 말이 과연 무슨 뜻인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아름다운 삶과 영성으로 귀감이 되는 수도자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지만 많은 평신도들이 수도자들의 가난이나 정결, 순명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고 의혹의 눈으로 지켜보기 시작했음을 모른 척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은 한국사회의 수도자들에게 말하기 시작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 안에서 사랑으로 여러분 모두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이 친교의 시간을 나누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여러분이 대표하는 카리스마와 사도직의 커다란 다양성으로 한국과 그 너머에 있는 교회의 삶이 놀랍도록 풍요로워졌습니다. 이 저녁 기도를 바치며, 우리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선과 자비를 찬미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사랑 받는 나라에서 하느님 나라 건설에 헌신하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친절한 환영 말씀을 해 주신 한국 남녀 수도회와 사도 생활단 장상 협의회 회장이신 황석모 신부님과 이광옥 스콜라스티카 수녀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 몸과 마음 스러질지라도, 하느님은 제 마음의 반석, 영원히 제 몫이옵니다.”(시편 73,26)고 한 시편 말씀은 우리 삶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시편 작가는 하느님께 의지하는 기쁨에 찬 신뢰를 드러냅니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기쁨이란 삶의 모든 순간에, 특히 커다란 어려움이 있을 때에 똑같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기쁨은 “한줄기 빛으로라도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이는 끝없이 사랑 받고 있다는 개인적인 확신에서 생겨납니다.”(복음의 기쁨, 6) 하느님께 사랑 받는다는 굳건한 확신이 여러분 성소의 중심에 있습니다.


타인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보여 주는 만질 수 있는 표징이며 천국의 영원한 기쁨을 앞당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증거가 기쁨에 찬 것이어야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끌어당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기도 생활과 하느님 말씀 묵상과 성사 거행과 공동체 생활에서 자라나는 선물입니다. 이러한 삶이 부실해지면, 우리 여정의 초창기에 그토록 친밀하게 알았던 그 기쁨을 흐리게 하는 나약함과 어려움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들인 여러분에게 그러한 기쁨은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라는 신비 안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수도회의 카리스마가 관상을 더 지향하든 활동 생활을 더 지향하든, 여러분의 과업은 바로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전문가”가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 생활이 언제나 쉽지는 않다는 것을 저는 체험으로 압니다만, 공동체 생활은 마음의 양성을 위한 섭리적인 토양입니다. 아무런 갈등이 없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입니다. 몰이해가 생기면 그것을 직시하여야 합니다.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바로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자비와 인내와 완전한 사랑 안에서 성장하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기도와 공동체 안에서 키워 가는 하느님 자비의 체험이 여러분의 존재 전체와 활동 전체를 형성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정결과 청빈, 순명은 하느님 자비의 반석 위에 굳건하게 머무는 그만큼 하느님 사랑에 대한 기쁜 증언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증언은 수도자의 순명과 관련하여 특별한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성숙하고 관대한 순명은 종의 모습을 취하셔서 고난을 통하여 순명을 배우신(수도 생활 교령 14항 참조) 그리스도께 기도 안에서 일치하도록 요구합니다. 지름길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온전히 바라십니다. 이는 우리가 언제나 더욱더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또 “우리 자신에게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배려하시는 하느님 자비의 생생한 체험은 또한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완전한 애덕에 도달하려는 갈망을 지탱하여 줍니다. 정결은 우리 마음의 반석이신 하느님 사랑에만 자신을 바치는 여러분의 자기 증여를 표현합니다. 우리 모두 개인적으로 얼마나 힘든 노력이 따라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 분야에서 일어나는 유혹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께 의지하는 겸손한 신뢰와 한결같은 인내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청빈의 복음적 권고를 통하여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비가 힘의 원천일 뿐 아니라 보물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치더라도, 우리는 죄와 나약함으로 무거워진 우리 마음을 그분께 봉헌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나약하게 느껴지는 때에 우리는, 우리가 부유해지도록 가난해지신 그리스도(2코린 8,9 참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수덕 생활에서 많은 진보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용서와 치유를 받아야 하는 우리의 이 근본적인 필요 그 자체가 가난의 한 형태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밖에도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여러분의 생활 양식에서 청빈의 구체적인 표현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저는 특히 여러분의 주의를 흩어버릴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추문과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봉헌 생활에서 청빈은 “방벽”이자 “어머니”입니다. 봉헌 생활을 지켜 주기에 “방벽”이고, 성장하도록 돕고 올바른 길로 이끌기에 “어머니”입니다. 청빈 서원을 하지만 부자로 살아가는 봉헌된 사람들의 위선이 신자들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교회를 해칩니다. 또한 순전히 실용적이고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려는 유혹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는 우리의 희망을 인간적인 수단에만 두도록 이끌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고 우리에게 가르치신 청빈의 증거를 파괴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봉헌 생활이 교회와 세상을 위한 소중한 선물임을 보여 주기 위하여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매우 겸손하게 하십시오. 여러분 자신만을 위하여 봉헌 생활을 간직하지 말고 사랑 받는 이 나라 곳곳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가 봉헌 생활을 나누십시오. 여러분 모두 미래의 봉헌된 사람들을 위한 양성에 기여할 부분이 있음을 깨닫고, 성소자들을 끌어당기고 키워 가는 여러분의 노력 속에서 끊임없이 여러분의 기쁨을 드러내십시오. 여러분이 관상 생활에 전념하든 사도적 생활에 전념하든 여러분은 한국 교회를 위한 사랑에, 그리고 여러분의 고유한 카리스마를 통하여 복음을 선포하고 일치와 성덕과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건설하는 사명에 열정을 지닌 이들이 되십시오.


여러분 모두, 특히 여러분 공동체의 연로하고 병든 구성원들을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사랑 가득한 보살핌에 맡겨 드리며,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항구한 은총과 평화의 보증인 저의 강복을 진심으로 여러분에게 드립니다. (주교회의 사무처 번역 / 교황방한준비위원회 제공)



기쁨을 살 수 없는 이들에게서 어떻게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겠는가? 교구 사제들은 그 동안 그래왔다 하더라도 수도자들마저도 관료화 되고, 행정가가 되었으며 중소기업의 오너가 되었다. 이제 별 무리 없이 굴러가게 하면 되는 것이다. 큰 탈 없이, 소리 나지 않고, 임기를 잘 채우면 또 다른 소임지로 이동하고, 그렇게 늙어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전례와 예식들에서는 점차 생명력을 찾아보기 힘들다. 교회운영은 새로운 선교로의 사명이나 복음 선포의 문제가 아니라 유지와 존속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장례식에서 금세 돌아온 사람처럼 보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열정을 다시 찾고 불사릅시다. “우리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을 때조차도 복음을 전하는 것은 즐겁고 위로를 주는 기쁨입니다. 때로는 번뇌하며, 때로는 희망을 갖고 나아갈 길을 찾고 있는 오늘날 이 세상 사람들이 낙심하거나, 의기소침해 있거나, 인내하지 못하는 불안한 복음 전파자로부터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기쁨을 받아들인 복음의 사목자, 열정으로 그 삶이 빛나는 복음의 사목자로부터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복음의 기쁨, 제 10항)



한국사회는 1970-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긴박한 정치, 사회, 문화의 영역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물음과 성취들이 있었다.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군사독재, 유신을 통해 권력을 끊임없이 연장하려는 불의한 권력의 끝을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을 대한민국의 법정에 세워 사면은 있었을지언정 올바른 역사적 판결을 내리고, 그들에게 법적 추징금을 통해 불의하게 모은 재산을 환수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까지 대한민국 사회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삼천 년 기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교회 내부에서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너무 낯설다. ‘교의(신앙의 가르침)는 민주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도식이 교회 내부의 민주주의를 외떨어진 영역으로 밀어 넣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문제, 부당한 고용과 해고의 노동현실에 맞서 투쟁하고 있는 콜트악기,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을 위해 대한문 앞에서는 미사가 거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교회 내부의 노동현실 구체적으로 교구청 직원들과 본당의 사무, 관리 직원들, 식복사, 교회 시설, 학교, 병원 등의 노동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은 도대체 있기는 한 것인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인간의 모든 삶이 사목의 현장’이라고 정의한 바 우리는 사회 민주화와 발맞추어 교회 내부의 문제에 대해서도 함께 말해야 한다. 내 문제는 말하지 않고 타인들의 독재와 불의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독선과 아집으로 흐를 수 있다.


헨리 뉴엔(H. Nouwen)신부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상처 입은 몸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었다고 그의 저서 『상처 입은 치유자』 에서 말한다. 상처가 깊은 만큼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도 깊을 수밖에 없고, 그 이해에서 싹튼 측은지심(惻隱之心)은 다른 사람들을 치유하는 영성의 원천이 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상처가 우리들의 상처와는 비교될 수 없지만 바로 그 ‘상처’가 치유의 열쇠가 된다는 통찰은 오늘 우리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깊은 통찰의 실마리가 된다.


최근에 이어지고 있는 인천성모병원 노조와 천주교회 인천교구의 갈등 모습은 이제 추악하기 까지 하다. 고 김수환 추기경은 1987년 민주화 항쟁 당시 명동 성당으로 난입하려는 경찰들을 향해 “경찰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보게 될 것이고, 나를 쓰러뜨리고야 신부님들을 볼 것이고, 신부님들이 쓰러지고 나서야 수녀님들을…” 이렇게 교회의 둥지로 피해온 이들에게 보호막이 되어 주시고 약자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보호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운영했었다. 그러나 이제 교회가 그 반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 2015년 8월, 그 동안 몸살을 앓아온 인천성모병원 문제로 노조가 실질적인 운영자인 천주교 인천교구에 교구장 면담을 요구하고 나섰는데 경찰 병력과 용역업체들이 출입구를 막아서는 황당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더구나 경찰병력이 서 있는 곳에는 천주교 인천교구의 입간판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라는 문구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어찌 이리 교회의 가르침과는 다른 모순된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 이완규 기자



교회란 무엇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성사’,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고백했다. 그런데 그 하느님의 백성, 성사로서 거룩한 교회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자기 설립자의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습을 알아보고, 그들의 궁핍을 덜어 주도록 노력하며,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한다”(교회헌장 8항)는 고백에 맞게 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교회가 어떠한 어두움과 나약함의 시기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그 말씀의 사명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복음의 기쁨, 제 11항)



작고하신 안승길 신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교회와 민주주의라는 내용의 논문이나 학술세미나, 심포지엄을 가톨릭교회의 제도권 내에서 찾아보았지만 나는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감히 이 화두의 문제제기조차도 허락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도권의 권위 때문인가? 아니면 이 문제제기가 교권자들로부터 단죄 내지 이단시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인가? 내가 ‘교회와 민주주의’의 발제를 수용한 이유는 교회 내의 신학자들이나 전문가들이 이 문제를 놓고 고뇌라도 했으면 하는 바람과 교회와 민주주의란 말이 절대 공론화 돼서는 안 된다는 우민적인 고정관념의 집착을 던져버렸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그리고 최소한 사회현상과 역사의 흐름 안에 현주소를 둔 교회를 조명하면 교회 발전과 그 위상 정립에 도움이 되겠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 뉴스 지금여기, 『교회와 민주주의 대한 고민』, 2008년 11월 19일)


교구나 수도회 모두 추락하고 있다. 그리고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날개를 펴야 한다. 하느님께서 주신 날개를 바로 펴지 못하면 이런 끝간 데 없는 추락은 그나마 남은 아시아 교회의 활력과 성장 동력을 무력화 시킬 것이다.


삼천 년 기의 교회는 ‘중국’의 복음화, 아시아 교회의 성장을 통한 새로운 교회의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러한 대격변의 시기에 이렇듯 좁은 안목으로는 교회가 시대와 역사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할 것이다. 마치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무기력과 무력감에 빠져버린 지난 날의 교회처럼 말이다.


덧붙이는 글

'교황방한 1주년을 돌아보며' 시리즈는 총 여섯 편이며 지난 글은 관련기사보기를 통해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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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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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mem2016-07-29 09:11:01

    작은예수회는 힘없고 가난하고 아프고 소외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공동체 입니다.  작은예수회가 현제 많은 빚을 지고 있긴 하지만 장애인들과 가난한 형제들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작은예수회 박성구 신부님의 장애인들에 대한 감각은 봉사자들도 따라가기 힘듭니다.  장애인들과 한결같이 30년을 같이 사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부님은 늘 일반인들보다 장애인들이 영적으로는 맑고 선하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늘 마음이 편하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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