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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에 내리는 봄비
  • 전순란
  • 등록 2015-04-15 17:24:43
  • 수정 2015-04-16 14:3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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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13일 월요일, 비


어느날

썩은 내 가슴을

조금 파보았다

흙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 흙에

꽃씨를 심었다

어느날

꽃씨를 심은 내 가슴이

너무 궁금해서

조금 파보려고 하다가

봄비가 와서

그만두었다

(정호승, ‘봄비’)



엊저녁 남해에서 전갈이 왔다. 봄이라고, 보고 싶다고, 그 긴 겨울엔 꾹꾹 누르고 잘도 참았는데 세상 모든 꽃봉오리들이 터지는 시절엔 더 못 참을 사람들은 서로 만나야 한다고... 당장 오늘 달려가기로 약속한 터라 새벽비를 맞으며 텃밭에 내려가 커다란 다라에 참나물, 부추와 중국부추, 부지깽이나물, 방풍, 신선초를 한줌씩 뜯어 담았다. 이 봄비에 가슴에 한 줌 남은 흙마다 움을 트고 올라올 마음들을 생각하면서...


빗속에 차를 달려 두어 시간 남해로 달렸다. 진주, 사천, 남해, 미조항으로... 이종철 신부님 온 가족이 미조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작년여름 문정공소 전성시대를 만들어준 가족(이종철 신부님이 '본당신부님'으로서 매일 미사를 올려주시고, 막내누이가 본당수녀님으로, 작은 누이 모니카씨가 미사마다 풍금을 쳐주는 성가단장으로, 신부님네 제랑 파스칼 선생이 사무장으로 일해주시던 행복한 여름)에 대한 행복한 추억과 그리움이 이렇게 우리 둘을 남해로 달려가게 만들었다.



그곳 미주항의 ‘바오로횟집’의 멸치회가 이름난 곳인데 이신부님의 제랑 파스칼선생님의 대부가 하시는 횟집이다. 오늘 아침 잡아올린 멸치로 싱싱한 회를 버무려 비린내가 하나도 안 난다. 미조 공소의 회장을 오래 지낸 바오로 회장님은 신구약 필사를 다 해서 강복장을 받아 식당에 걸어놓았다.


호기심이 워낙 많아 성음악을 하신 이종철 신부님께 성가에 대해서 이것저것 묻고 있었다. 늙음이 흔히는 궁금증이 모조리 스러지고 관심의 창을 모조리 닫고서 다른 세상으로 입적하는 준비라는데, 알고 싶은 호기심이 아직도 많은 이들은 지구별에 오래오래 머물 사람들 같다.


남해는 기후가 순하고 따스해서 온갖 채소들이 밭에서 그대로 겨울을 나면서 너울거린다. 군데군데 넘실거리는 보리밭과 하얗게 돋아난 이삭은 요즘은 보기드문 시골풍경이었다.


파스칼 선생 댁에는 탁 트인 바다가 정남향으로 갈리래아 호수처럼 마주 앉았고, 물 빠진 갯벌은 모든 생물들이 참선을 하는 장소여서 소라껍질에서 머리를 내민 방게 한 마리가가 한참이나 내 눈을 올려다보더니 내 쌍까풀 수술이 맘에 안 들었는지 급한 일이 생각났다는 시늉을 하면서 서둘러 달음질친다. 고 작은 발로 지구의 끝이라도 찾아가겠다.


한 사람이 소일 삼아 손질하기에 딱 좋은 마당에는 갖가지 정원수와 화초들이 주인장의 정성어린 손길을 받아 기름기가 듣고, 하느님과 주인에게 나름대로 보은을 하느라 싱싱한 잎과 꽃을 피워 올리고 있다. 이 집에는 제비가 둥지를 만들어 암수가 드나들고 있었고 집주인이 들려주는 제비부부의 집짓기, 제비 육아기, 떠나기 전의 제비 부부의 감사비행 얘기가 참 재미있었다.


파스칼 선생님 댁으로 들어오기 전에 한길가에서 튤립 축제도 둘러보았다. 새깔마다 선정적인 도발을 한껏 뽐대던 꽃들이 오늘은 해님이 안 나오자 꽃잎을 닫고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노랑 튤립은, 바닷가를 돌고 돌면서 딱히 들여다보아줄 사람들도 없을 길목마다 피어있던 유채꽃과 더불어, 노랑색은 작년 4월 이래로 이 땅의 모든 양심에게 슬픈 리봉으로 각인된 색깔이 되어선지, 싸한 설음을 안겨주었다.


이른 저녁으로 모니카 언니가 준비하신 굴파전, 더덕과 엄나무순이 차려졌고, 파스칼 선생이 솜씨 있게 저며낸 자연산 숭어회가 입에서 살살 녹았다. 숭어회처럼 달콤하게 어우러지는 언니와 형부는 맛깔진 노년을 남해의 바닷가에서 보내면서 과년한 막내딸을 시집보내고 안도하게 된 기쁨도 우리에게 나눠주셨다.


남해대교, 진교읍을 거쳐 돌아오는 밤길에서도 남해에 종일 내리던 봄비 속에서 행복한 하루였던 미소가 내 입에서 떠나질 않았다.



덧붙이는 글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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