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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이신부의 세·빛] 복음 선포자의 생활양식 이기우 2025-09-05 17:0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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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2주간 금요일 (2025.09.05) :  콜로 1,15-20; 루카 5,33-39


하늘을 물리적인 공간이자 정신 수양을 위한 대상으로만 삼았던 성리학 선비들과 달리, 이벽을 비롯하여 정씨 삼형제 같은 신앙 선각자들은 창조주 하느님으로 떠받들었습니다. 특히 조선의 고유 정신 전통에 조예가 깊었던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이 같은 뜻을 ‘주교요지’에 담았고, 박해 시대 교우들은 이를 마치 마른 땅에 물이 스며들듯이 진리로 받아들였습니다. 창조 신앙은 우리 나라 초대교회에서 천주교 교리의 기본이었던 것입니다.



▲ 정약종의 주교요지 (사진 = 행주성당 유물 전시)


“턴쥬 엿새만에 텬지만물을 만드시느리라”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 대하여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비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교우들에게 자신의 생활에 대한 생각을 밝히고 있습니다. 복음과 독서의 공통점은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의 생활양식에 대한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이렇게 비판하였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비록 예수님께 대해 직접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생활양식을 비판하는 말이었지만 우회적으로 그분의 생활양식을 비판하는 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복음을 선포하며 생활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아픔을 위로해주며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분과 그 제자들이 누구를 찾아가서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먹고 마시기만 한다고 비판한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들의 비판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한다면서 이에 빗대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경건하게 사는데, 왜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은 흥청망청 살아가느냐?”하는 비난인 것입니다. 


요한과 그 제자들이 경건하게 살아간 것은 사실입니다. 이는 요한의 메시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요한은 세례자로서 이스라엘의 파국을 경고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강력한 어조로 윤리적인 회개를 요청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회개 요청은 수많은 대중의 호응을 받아 세례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의 이러한 메시지에 동의하시고는 그 뜻으로 요한에게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파국에 이른 이스라엘에게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시고 이 나라의 현실에로 회개하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현실의 한가운데에는 병들고 마귀들려 고통받는 가난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선포는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가져다 주시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찾아가셨고, 그들과 어울리셨으며, 그들을 고쳐 주시고 마귀도 쫓아내 주신 것입니다. 당연히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행동했습니다. 따라서 먹고 마시는 일은 가난한 이들과 먹고 마신 것이고, 이는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고약하게도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행동 목표와 동기는 외면한 채로 겉모습만 주목한 것이고, 그것도 왜곡해서 비난한 것입니다. “먹고 마시기만 한다”고 침소봉대(針小棒大) 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경건하게 처신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그러한 경건한 행실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고, 실제로는 그네들은 가난한 이들을 억누르고 착취한 대가로 부유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네들을 위선자라고 부르셨으며, 제자들에게는 그네들의 가르침은 따르되 그 행실은 따라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이러한 비난은 역설적으로,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전념하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분의 생활양식은 새로운 행동양식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새로운 행동양식이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요, 이를 위한 새로운 생활양식은 가난한 이들과 어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를 새 포도주와 새 부대에 비유하셨습니다. 겉으로만 율법을 지키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생활양식은 낡은 부대요 거기에 담긴 것은 묵은 포도주와도 같은 율법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새로운 복음 선포 양식에 대해서 훨씬 깊은 성찰로 알려주었습니다. 바로, 창조 신앙에 대해 설파한 그리스도 찬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 1,15-20)


이상의 두 가지 사례에서 입증되듯이,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사는 복음을 듣는 이들과 같은 생활양식을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복음을 들어야 하는 이들의 생활 양식과 다른 이질적인 생활양식으로는 효과적인 복음선포를 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으로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도 유다인의 언어와 생활양식을 받아들이셨을 뿐만 아니라 특히 복음을 들어야 할 가난한 이들의 생활양식을 취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가난한 이방인 교우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사도로서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천막 만드는 노동으로 하며 생계비와 활동비를 충당하였습니다. 추위와 굶주림을 겪고 밤샘도 해야 하는 고되고 가난한 생활양식을 견지하였습니다. 이것이 선교의 정석이며, 새 하늘 새 땅을 창조하는 생활 양식입니다.  그러니 교우 여러분,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과 일상의 활동들이 창조적이 되도록 지향을 두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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