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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길을 따르는 사람들 [이신부의 세·빛]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이기우 2024-04-19 09:5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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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3주간 금요일(2024.4.19) : 사도 9,1-20; 요한 6,52-59


‘새로운 길을 따르는 사람들’(사도 9,2)


이 표현은 박해자 사울이 스테파노로 인해 일어난 박해를 피해 시리아 북쪽으로 흩어지려던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려 했던 때 나온 말이었습니다. 아마도 유다교를 신봉하던 세상 사람들이 부르던 이름인 듯합니다. 이들이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 자리를 잡고 공동체를 세운 뒤에 세상 사람들이 그 ‘새로운 길’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는 길이라는 대답을 듣고 나서는 ‘그리스도인’(사도 11,26)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새로운 길’이란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었고, 이들은 모일 때마다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예식’(요한 6,56)을 치르며 예수님의 삶을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빵의 기적을 통해 배불리 먹게 된 체험한 군중이 쫓아와서 임금으로 모시겠다고 억지를 부리자, 예수님께서는 먹고 나서 다시 배고프게 될 빵을 얻으려 하지 말고 영원히 배부르게 해 줄 생명의 빵을 구하라고 타이르셨습니다. 


그러자 군중은 그 생명의 빵을 달라고 또 졸라댔고, 그제서야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담고 계시던 계시를 드디어 밝히셨습니다: “내가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다.”(요한 6,41) 이 말씀을 듣고 너무나 뜻밖이었던 유다인들은 수근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한술 더 떠서, 당신의 살을 먹고 당신의 피를 마시는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되리라고 장담하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6,54)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요한 6,52) 사태가 점점 더 심각해지자 군중 가운데 많은 유다인들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을 따라 다니지 않게 되었습니다.(요한 6,66)


그러나 스테파노를 비롯한 소수의 신자들은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삶’을 지속하며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하는 일을 계속하였고, 이들은 스스로 ‘새로운 길’을 따르고 있다고 자부하였습니다. 스테파노가 순교한 뒤에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열성적인 바리사이였던 사울은 자진해서 수석 사제들을 졸라 체포 영장까지 발부받아서 가장 많이 흩어진 것으로 보이던 북쪽 방향으로 제자들을 쫓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눈부신 빛과 커다란 천둥소리로 나타나셨습니다. 번쩍이는 빛에 눈이 부시다 못해 보지 못하는 가운데 사울은 천둥소리 속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사도 9,3-5) 이로 인해 박해자였던 사울이 인생 방향을 180도로 바꾸게 되었는데, 아마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기지은을 자유자재로 발휘하시어 당신 제자들을 사도로서 믿음을 심어주는 한편 복음을 전할 사명감도 심어주고자 발현하신 가운데에서 가장 돋보이는 장면일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창조와 부활에 관한 하느님의 계시에 따라서 생겨났습니다. 부활은 창조를 완성합니다. 인류가 창조주 하느님을 모른 채로 세상에 숨겨진 창조의 신비를 밝혀내고자 자연과학을 비롯한 인간 이성으로 그 이치의 일부를 알아내고 오늘날의 물질문명을 이룩했다면, 부활의 신비를 선포하고자 하는 교회는 신학으로 하느님의 계시를 알아듣고 그 이치로 신앙인들의 영성을 키워서 물질문명과는 대조적인 공동체들을 세워서 커다란 모순과 많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물질문명을 사랑의 문명으로 완성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 바 있습니다: “인류의 빛(Lumen gentium)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 모인 이 거룩한 공의회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며(마르 16,15 참조), 모든 사람을 교회의 얼굴에서 빛나는 그리스도의 빛으로 비추어 주기를 간절히 염원한다.”(교회헌장, 1항) 


그래서 인류가 창조의 신비에 바탕하여 자연을 교과서로 삼아 이룩한 물질문명의 결실이 인간 사회라면, 부활의 신비에 바탕하여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교과서로 삼는 영성의 결실은 인간 사회를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도록 완성하는 새로운 인간입니다. 교회에도 가시적인 제도와 조직이 있고 또 필요하지만, 아무래도 교회의 본령은 세상과 대조적인 또 다른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기 보다는, 예수님을 닮은 새로운 인간을 출현시키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을 알아 듣고 그들이 마치 물 속에 녹아 든 소금처럼, 세상에 사는 선의의 모든 사람들과 연대하여 인간 사회를 더 좋고 더 밝게 만드는 데 기여하도록 가르치고 권고하는 일이 더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서 절정에 달하였고, 초대교회의 역사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부활 신앙은 성경에서 ‘하느님 나라’, 또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현실 즉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이룩할 수 있는 힘이요 요체입니다.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며 새로운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 인류의 물질문명을 사랑의 문명으로 완성할 새로운 인간입니다. 그리고 박해자의 길을 걷다가 극적으로 회심하여 사도요 선교사가 된 바오로는 이 ‘새로운 인간’의 전형입니다.


오늘날 인류가 발달시킨 물질문명에서는 놀라운 가능성과 뚜렷한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료기술과 의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질병을 없애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육이 보편화되고 법률이 정교하게 제정되어 있어도 범죄를 막지 못합니다. 언론 환경이 그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좋아졌는데도 거짓과 가짜 뉴스가 판을 쳐서 진실을 가리고 여론을 조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류가 이룩한 물질문명에 대해 그리스도 신앙의 세례를 주는 일은, 다름 아니라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신 양심을 신앙으로 강화시켜 바른 이성과 의지를 갖춘 성숙한 인격자를 출현시키는 일입니다. 거센 세파 속에서 상처를 입고 저항을 받으면서도 양심을 지키며 인간답게 살아가고자 애를 쓰는, 착하고 의로운 개인들에게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는 희망과 위로를 주는 일도 필요합니다. 세상의 죄 때문에 사회가 어지럽고 약자들이 살기 힘들지만, 박해자에서 선교사로 개종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 성숙한 인격으로 복음을 전하는 바오로에게서 하느님의 자비를 봅니다. 그는 자신은 물론, 선교지에서 만난 신자들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되게 하려고 모진 십자가를 마다 하지 않았습니다.(갈라 4,19) 


오늘날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축성되는 미사에 참여하는 우리는 그분의 삶을 기억하고 이에 따라 행하라는 요청을 거듭 거듭 받고 있습니다. 이 기억과 행함을 위해서는 빵과 포도주 같은 물질이 어떻게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할 수 있느냐고 물을 것이 아니라 우리도 어떻게 그분처럼 살과 피를 내어줄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느냐 하고 물어야 합니다.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면서 인간 본성에 따라 양심에 충실하려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과 본성이 이치를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의 이치를 믿을 수 있도록 먼저 믿는 이들이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시면서’ 그분처럼 ‘새로운 길을 걸어가려는 사람들’이 그래서 필요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오로의 사람 됨됨이와 잠재역량을 알아보시고 복음의 일꾼으로 삼으신 덕분에 그리스도 신앙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히브리 문화권을 넘어 그리스 로마 문화권으로 확산되어 나갈 수 있었고, 장차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모든 인류에게로 뻗어 나갈 수 있는 보편적인 지평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자비를 통해 그분의 역사적 섭리를 묵상하다보면, 그 옛날 하느님께서 히브리 노예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시려고 이집트 왕자였던 모세를 먼저 당신의 심부름꾼으로 쓰신 방식도 연상하게 됩니다. 


그 당시 이집트 파라오는 인구가 불어나던 히브리인들이 무서워서 사내 아기들을 모조리 죽이려 들었지만,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친모와 산파 그리고 파라오의 공주로 하여금 아기 모세를 살려내셨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 왕실의 왕자로 자라게 해서 당대 최고의 지도자 훈련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 후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된 마흔 살에 미디안 광야로 불러내시고, 다시 사십 년 동안 양치기로 살게 하시고는 당신의 계획을 불타지 않는 떨기 속에서 소명을 주셨으니 그 때 모세의 나이가 여든 살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사십 년 동안 모세는 히브리인들의 영도자로서 이집트에서 해방시켜 미디안 광야에서 하느님 백성이 되도록 훈련을 시켰습니다. 이렇게, 이집트 왕자였던 모세를 쓰신 하느님의 방식이나 박해자였던 바오로를 돌려세우신 예수님의 방식을 생각하면, 하느님이나 예수님께서는 필요하면 그에 맞는 인물을 선택하시어 필요한 훈련을 시키고 때가 되면 소명을 주어 임무를 수행하게 하신다는 역사의 섭리를 알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 사회에서 바오로의 개종 사건이 커다란 화제가 되었듯이, 해방 직후 한국 사회에서 역시 커다란 화제가 된 개종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벽초 홍명희, 춘원 이광수와 더불어 일제 강점기 시대에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리었던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 1890 ~ 1957)이 불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일이었습니다.


1919년 삼일 독립만세 운동 당시에 독립선언서를 기초했던 그는 한학과 역사학에 조예가 깊어서 평생 고전을 정리하고 주석하여 다방면에 걸쳐서 국사와 고전 서적을 간행하고 복원하며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해냈습니다. 


또한 1927년에 단군을 시조로 한 고조선이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임을 밝히는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을 발표하여 독립선언서에도 듬뿍 담겨 있는 그의 역사의식에 따라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고취시키고자 노력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남긴 수많은 업적 가운데에서 한국의 문화사적 이해에 있어 가장 두드러진 업적으로서, 동북아시아 문화권 속에서 한국 문화를 고찰하는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그 저술에 담긴 논문 ‘조선을 통하여 보는 동방문화의 연원과 단군을 계기로 한 인류 문화의 일부 측면’에서는 우리 민족 문화의 기원을 제시하고자 하였습니다. 그 요지는 단군은 하느님 신앙으로 고조선을 다스렸는데, 이 신앙은 한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넓은 지역 즉 ‘불함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육당 최남선의 이러한 노력은 이벽 세례자 요한이 일찍이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를 접하고 나서 이 ‘천주’는 우리 민족의 초창기 역사인 단군 시대부터 이미 숭배되고 있었던 바를 알고 천주교 신앙운동을 벌인 노력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해방 후 1946년에 개설된 명동성당 가톨릭교리강좌에서 윤형중 마태오 신부로부터 예비자 교리를 배운 그가 세례를 받고 나서 한국일보(1955.11.17)에 “나는 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나”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였습니다. 


이 글에서 그가 개종의 취지를 밝히면서, 가톨릭의 역사성과 보편성 그리고 진보성을 내세운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강생과 부활이 민족의 역사 안에 뿌리 내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기를 소망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민족의 역사 안에 신앙이 뿌리를 내려야 정체성을 회복하여 민족 복음화는 물론 아시아의 복음화도 가능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미사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앙과 민족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참고로 개종 취지 기고문을 부록에 붙입니다.


<부록: “나는 왜 가톨릭에로 개종했는가”>


인생과 종교의 관계는 마치 인체와 공기와의 관계와 같으니 특히 양자가 잠깐이라도 떠나 있을 수 없는 점에서 그러하니라. 


종교란 무엇이뇨?

우선 일반 학자의 통설을 따라 신과 인간관계라 하여 두자. 그러면 인간은 신이라는 개념을 어디서 얻어 왔겠느뇨? 신학상 철학상 다 어려운 문제려니와 우리는 학자의 구구한 이론을 떠나서 솔직히 말해서 우주에 충만한 신의 광명이 자연히 인간 마음속에 촉발하여 신이라는 계시가 된 자로다. 이렇게 생각하므로 우리에게는 유신론과 무신론의 갈등을 느낄 까닭이 없느니라. 신의 광명이 인간 마음에 들어가서 갖가지의 신앙 형태를 만들어 내나니 이에 인간 세계에는 많은 종교가 병행하느니라. 어느 종교든지 궁극목적은 인생 구제에 있으니 구제란 무엇이뇨? 우주의 대생명과 자기의 소생명이 하나가 되도록 인격을 통일하여 나가는 생활 태도의 확립이니라.


사람은 자기의 생명이 짧다는 것을 생각할 때 무한한 생명욕을 일으키고, 자기의 미약함을 인식할 때 무한한 권능에 귀의할 욕망이 일어나니 이 생명욕과 권능욕을 합하여 말하면 인간의 향상심(向上心)이니라. 사람이 무한한 생명과 능력을 아무 데서도 찾지 못하다가 마지막 그것을 우주의 신에게서 얻고, 열렬한 희망과 동경으로써 신과 합일되기를 원하고, 이리로 향하여 최대한의 정성을 쏟으면, 신인합일(神人合一)이라는 경지가 종교의 구제력(救濟力)으로서 인간 앞에 나타나느라.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의 무한한 연장과 능력의 무한한 확대를 알아듣게 하는 것이 종교의 구제요 그 작용이 구제력이니, 이 구제력의 크고 작음에 따라 종교의 가치가 달라지느니라. 종교는 이론을 생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구제를 목적으로 하느니라. 세상에는 이론은 좋아도 구제력이 거기 따르지 못하고 또 일찍이 크게 구제력을 발휘한 적도 있으되 그 참 생명이 위축되어 이제 와서는 구제의 기능이 거의 상실된 것도 있느니라. 그런데 구제력 없는 종교는 효력이 없는 약품과도 같으니 다만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왕왕 해독을 끼치는 폐도 없지 아니하니라. 종교의 구제는 진실로 개인적인 것이로되 또 때를 따라서는 국가 민족의 집단적인 요구에 적응해야 할 경우도 있나니 오늘날 우리 대한이 요구하는 종교는 각 개인의 정신적인 미약을 보강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오늘날 우리 대한의 특수한 모든 문제 해결에 가정 유효 적절한 기능을 가져야 하나니 그 기백과 위력과 기구(機構)와 전통이 이러한 역량을 구비하여서 능히 오늘의 부패를 말소하고 무기력을 없이하고 혼란 무절제한 이 세상의 기둥이 될만한 것이어야 오늘 우리 대한의 종교일지니라. 


이상은 내가 가지고 있는 종교관인 바 이러한 정신으로 어려서부터 인생 문제, 신앙 문제에 자못 정신을 기울여 왔으나 겨우 부처의 이상이 이 혼탁한 세상을 구제할까 하여 마음을 불교에 붙여왔으되 여기서는 얻은 바가 하나도 없고, 늙어가는 몸을 껴안고 세상의 어지러움을 보고 한탄만 하는 도다. 그러면 오늘 이 처지에 서서 이 백성을 구제할 만한 정신적인 지주가 무엇일까? 이것을 정확히 판단하는 것이 나의 중대한 과제일 수밖에 없을지니라. 


스스로 돌아볼 때에 한국인이 기대를 가질 만한 종족일까? 한국 민족의 정신 생활사를 검토해 보건대 과거 수천 년 간 두 번 빛난 시기가 있었으니 앞서서는 신라 통일기에 찬연히 발현된 화랑도의 순국 정신이요, 가깝게는 서양문화가 이 땅에 들어올 때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 정신이니라. 전자는 진작 민족 통일의 위대한 성과를 보였거니와 후자는 아직도 진행도상에 있어서 능히 얼마만한 공헌을 이룰지 오히려 미지수에 속하는 것이니라. 


한국 역사의 현 단계는 부패한 인습을 탈피하고 예리한 정신을 진작하여 근대생활의 자각으로써 세계 문화사상에서의 후진성을 극복 지양하고 인류 발전 대로에 당당히 행진하는 능력을 소지함에 있거늘 어떻게 하면 이것이 가능하게 될 것인가? 이 가능 여부는 진실로 민족 생사의 문제요 확고한 정신적 기반 위에서만 기대할 것이니, 이제 한국의 문화가 기계산업에서 뒤지고 항해 발전에서 뒤졌다 하여 무턱대고 기계를 만들고 함정을 만들려고 하여서 이 후진성이 얼른 극복될 것인가? 


이렇게 간단한 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어리석음을 한번 웃지 않을 수 없을지니라. 얼른 말할진대 서양 근세의 문화는 결코 단순한 물질과 이욕(利慾)의 위에 성립된 것이 아니라 실로 그 기반 위에는 위대한 정신적 바탕이 있음을 알아야 할지니 그 정신적 바탕이란 무엇이뇨? 그 하나는 희랍시대의 정신문화와 과학의 기초 공작이요, 또 문예부흥 이래는 인문정신과 중세기 스콜라 철학의 시작에서부터 생성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며, 그 중에도 2천 년 가까운 가톨릭의 확고한 진리의 힘이 불가사의한 위신력(威信力)으로 말미암았음을 인정하지 않고는 서양 문화의 진상을 파악하였다고 말하지 못할지니라. 이제 서양 문명을 배운다 하면서 그 근본의 바탕을 보지 않고 외형만 본다면 그러한 사람에게는 정당한 성과를 기대할 수 없음은 물론이니, 저 중국의 유교 및 도교사상과 인도의 파라문 및 열반정신에서 근대문화가 산출하지 못한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니라. 


오늘날 우리 한국은 동양의 작은 나라로서 스스로 정신적인 빈곤을 느껴오다가 중국으로부터 천주교가 전래되자 동양인으로서는 알아듣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으나 서학(西學)의 필요성을 모른 체하지 못하고 그 중에 총명한 이익, 이승훈, 남상교, 정다산 삼형제 등 일대의 석학들이 여기에 정신을 쏟아 그리고 소중하게 아는 신주(神主)를 불살라 버리고 제사를 폐기하여 즐겨 덕교상(德敎上) 죄인이 되니 이것이 어찌 그네들의 어리석음에서 되었다 할 것이랴 ! 서학의 박해가 시작된 지 백여 년에 일단 신교의 자유가 생겼으니 그것이 이 국가를 언제나 구제할는지 실로 그 앞날이 요원한 감이 있도다. 이제 한국이 정신적으로 해방을 보았다 하고 역사상으로 신국가를 건설하고 신문화를 창조한다 하나 그 입각점(立脚點)에서 볼 때에 아무 믿을 만한 정신적인 기반이 없음은 오히려 1세기 2세기 이전의 그때와 다름이 없고 아직까지도 국가와 문화가 든든한 정신적 기반 위에서만 건립과 전진이 가능한 것이라는 입문 초보의 지식도 없는 상태에 있음은 실로 통탄할 일이 아닌가? 


설사 이만한 식견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떤 종교와 사상이 우리 건국 정신에 지주가 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드물다고 아니 할 수 없도다. 유교를 그것이라고 할까? 불교를 그것이라고 할까? 프로테스탄트를 그것이라고 할까? 칸트를 데려올까? 마르크스나 레닌을 불러낼까? 그 어느 누구도 이만한 중책을 감당하리라고 믿어지지 아니 하는도다. 유교에서는 이퇴계가 났다. 그러나 이 퇴계가 몇 묶음으로 나온다 할지라도 오늘의 혼란을 다스리라고 기대하겠는가? 불문(佛門)에서는 원효가 났다. 그러나 원효가 떼지어 나온다 할지라도 오늘의 혼탁을 맑게 할 수 있다고 하겠는가? 여기서 우리 눈에는 2천 년래 인류의 정신상 생활상 대지주를 문예부흥, 종교개혁, 과학발흥(發興)의 온갖 풍파를 치르면서 조금도 동요를 보이지 않고 하늘의 기둥처럼 위용을 보이고 있는 가톨릭이 우리의 시선을 끌지 않는가! 


가톨릭은 인류 문화의 종교 분야를 담당한 이스라엘 민족으로 말미암아 계시되고 연마되고 완성된 종교로서, 희랍의 철학과 로마의 조직력과 근세사상의 정화까지 합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가톨릭은 섬세하고 엄격하여 정신생활 원리를 거의 충족한 성능을 구비한 것 외에 다만 종교적인 진리면에서도 화엄의 십현(十玄)과 법화(法華)의 삼주(三周)에서도 오히려 방불치 못하는 우주 인생의 비결을 명쾌히 설파한 점이 부족한 바 없도다. 


저 조물주로써 천지 만물의 제일원인(第一原因)을 명시하고, 신의 권능과 섭리로써 만물 창조의 질서와 조화를 설명한 것이 그 일단(一端)이다. 이만할진대 개인의 구령으로나 민족의 부활 지도력으로나 아무 부족함이 없지 아니할까? 


나는 이에 유교, 불교, 모든 종교에서 찾아 얻지 못하던 바를 이제 가톨릭에서 얻은 느낌이 났도다. 그리고 아울러 백여 년 전 선조들이 가톨릭을 도입한 그 정신을 깨달아 못내 기뻐하는 자로다. 가톨릭은 교조(敎祖) 예수의 말씀과 같이 이 세상에 평화를 가지고 오지 않고 칼을 가지고 와서 불의를 없이하고 의(義)를 세우려는 종교이다. 그러므로 그 역사는 투쟁의 기록이요, 의로써 불의를 격멸하는 과정의 기록이며 또 그것이 자연에 맡긴 인간의 사실이 아니라 일대경륜(經綸)의 점차적 발전임을 속이지 못 할지니, 그것이 이스라엘 땅에 발생하여 로마 즉 당시 세계의 주축으로 들어가서 사방으로 선포되어 중세를 거쳐 근대로 내려오면서 교세가 점점 왕성하고 16세기 초에 예수회원의 일파가 동양으로 와서 예수께 지구 어디까지도 내 복음을 전파하라 하신 부탁이 실현되고, 동양의 금단국(禁斷國) 조선은 교세의 침입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문호를 열고 이 복음을 받아들여 세계의 전도사상(傳道史上) 하나의 예외를 이룬 것의 어느 것이고 대섭리의 발현으로 볼 것이지 결코 우연의 역사적인 발전으로 보고 말 것이 아니니라. 


세상에 종교도 많지만 종교가 시작된 그때부터 교리가 조금도 변화됨이 없이 그대로 계속되는 종교가 어디 있으며, 또 사상적으로 문화적으로 항상 통일된 생명력을 가지고 항구 불변의 활동상을 가지고 있는 종교가 몇이나 되느뇨? 이러하기 때문에 가톨릭은 인류 문화의 절대적인 보호 육성자로 유일한 권위의 소유자로서 변함이 없는 것이 아닌가? 오늘날 우리는 동양의 작은 나라로서 숨겨진 존재로부터 어떻게 세계와 통로를 같이 할 수 있겠느뇨? 


또한 밀려드는 아메리카니즘을 어떻게 방지하고 건전한 신흥 국민의 정도를 개척함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에 우리는 일찍이 19세기 초엽 독일의 도덕동맹 같은 것을 모방함이 필요함을 말하면서도 그 구체적인 방법을 언급하지 아니 하였거니와 이제 가톨릭을 거론할진대 따로 이 도덕동맹을 운운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또 가톨릭은 국내에 30만의 경건한 신앙체를 결정하고 있으며 전 세계에는 4억7천만이라는 같은 신앙 단체가 있어 독자적인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였나니 이것이 어찌 일조일석에 가히 될 수 있었으랴? 


한국의 개화를 논함에 모름지기 먼저 정신적인 기반을 논하려면 냉정 공평하게 가톨릭에 눈을 돌려야 하리라. 가톨릭은 허무맹랑한 공중누각이 아니라 아무런 풍파에도 동요를 보이지 아니하는 반석 위에 세워진 큰 건물임이 오랫동안 사실로써 증명이 되고 남음이 있도다. 


오늘날 이 정세에서 한국의 내일을 믿음직하게 맡길 곳이 이 가톨릭을 제하고 또 무엇이 있다하랴! 1955년 11월 17일에 과거 5,60년간의 종교적 체험을 청산하고 가톨릭에 입교하여 영세하니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개인적으로 구령인 동시에 국가 민족에 대하여는 조국 근대화의 밑바탕이라고 생각하노라. 이에 나의 개심을 천하 동료들에게 약술하여 비정(批正)을 청하기로 하노라. 우둔한 나에게 이러한 식견을 열러 주신 천주께 무한한 성총(聖寵)을 감사하면서 이 붓을 놓노라.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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