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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정치적으로만 접근해서는 얻을 수 없다 [글로벌인문학] 9 평화의 인문학 : 평화는 정의의 결과 이기상 2020-12-14 11: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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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지구상에 전쟁이 없었던 적이 한 순간이라도 있었던가. 온갖 명분과 구실로 전쟁은 자행되어 왔고 지금도 평화의 이름으로 전쟁이 준비되거나 치러지고 있다. 가자 지구 사태가 그렇고 우크라이나 사태가 그렇다. 이라크와 리비아의 내전도 묵과할 수 없는 사례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살폭탄테러 사건들과 그것을 막자고 전개되는 반테러 대응이 불안과 공포를 조성하여 준전시상태를 방불케 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학자들은 전쟁을 일종의 ‘필요악’이라고 규정하기조차 한다. 인간의 탐욕이 존재하는 한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전쟁이 인간의 본성과 뗄 수 없는 연관 속에 있다고 생각하다 보니 평화 역시 이러한 전쟁의 관점에서 고찰되어 온 것은 어찌 보아 아주 당연한 셈이다. 그리스 사상가들은 평화를 위한 수단으로서 전쟁을 용인한다. 플라톤은 평화를 전쟁의 승리나 방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보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전쟁의 목적은 평화라고 천명할 정도다. 



평화, 우리 시대의 염원


그러나 이렇게 평화를 전쟁의 대립개념으로 보는 것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해준 사건이 이른바 1차, 2차 세계대전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무기 산업은 무섭게 발전했고, 그 파괴력과 살상력은 상상을 초월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선진국들은 경쟁적으로 자국의 안정과 국제질서 그리고 세계평화를 위한답시고 무기개발과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겁을 주어 공포심을 조장해 상대방이 아예 전쟁도발의 생각을 못하도록 그 싹을 원천부터 봉쇄한다는 일종의 공갈작전이다. 그렇지만 이런 공포조장과 협박도 생존이 걸리고 정치이념이 걸리고 종교교리가 도전받아 삶의 질서가 위협받으면 오히려 극단적인 반응을 유발하고 만다. 신의 이름으로 자기 한 목숨을 던져 신적 질서를 회복하려는 성스러운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온갖 전쟁을 겪고 인류공멸의 위기를 느낀 세계 정치지도자들은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1981년 < 세계평화의 날 >을 제정하여, 해마다 9월 셋째 주 화요일을 그 날로 기념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이후로도 지구상에는 온갖 명분과 구실 아래 전쟁이 끊이지 않고 계속돼왔다. 가장 무서운 전쟁은 신의 이름으로 펼쳐지는 종교전쟁이다. 중동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전쟁들은 그 속을 들여다보면 종교적 교리에 바탕한 이념의 갈등이 주된 원인임을 알 수 있다. 미국은 이 종교적 이념에 민주화라는 정치이념을 내세워 맞불 작전으로 맞서고 있다. 의로운 전쟁이든, 신이 원하는 전쟁이든 폭력과 살상, 파괴가 난무하는 전쟁이라면 이미 그 자체가 인간이 원하는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이제 우리는 평화를 전쟁과 연관지어 소극적으로 규정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평화를 인류가 원하고 바라는 목적으로 추구하는 그런 사상적 기조를 마련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평화문제에 대해 많이 고심해온, 독일의 핵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바이체커(Carl-Friedrich von Weizsäcker)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과 같은 과학 기술 시대에 평화는 곧 삶의 조건이다.” 


이제 평화문제는 지구가 파멸하지 않고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 꼭 필요하고 가장 절박한 삶의 조건이 되었다. 핵무기 사용의 위험은 개별국가나 민족의 존립과 생존뿐 아니라, 전체 인류와 지구 생태계까지도 위협하고 있다. 평화문제는 인류가 풀어야 할 가장 시급한 현안이 되었으며, 평화는 이제 인류가 추구해야 할 최종가치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한반도 평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큰 전쟁인 한국전쟁을 치른 한반도는 휴전 상태로서 남북이 갈라져 아직도 적대적인 상태로 남아 있는 유일한 지역이다. 이러한 불안정한 상태는 평화의 사절인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방문에서도 잘 드러났다. 


동족상잔의 한국전쟁과 그로 인한 남북분단의 역사를 잘 아는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한국 방문에서의 최대 관심사는 평화와 화해였다. 서울공항에 영접 나간 박근혜 대통령이 “교황 방한을 계기로 우리 국민에게 따뜻한 위로가 전해지고 분단과 대립의 한반도에 평화와 화해의 시대가 열리길 바란다.”고 말하자,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반도 평화를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왔다.”고 응답하였다. 그리고 교황은 4박 5일의 방문기간 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평화를 강조하며, 그를 위해 회심하고 용서하며 화해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한반도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다시 한 번 기도드리며 여러분 모두에게 신의 축복을 기원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8월 18일 이탈리아 로마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끝까지 한반도의 평화에 관심을 표했다. 그런데 북한은 교황이 한국을 방문한 8월 14일 김정은 제1위원장의 참관 아래 강원도 원산 일대에서 300㎜ 방사포로 추정되는 단거리 발사체 5발을 동해로 발사했다. 교황의 한국 방문에 때 맞춰 한국 천주교가 북한 신자들을 초청한 데 대해 북한은 거부 의사를 밝혔다. 한국 천주교 인사들은 그 해 5월 중국 선양에서 북한 측 천주교 인사들을 만나 8월 18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교황이 집전하는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에 참석해 달라고 초청했다. 그러나 북한은 5.24 제재 조치와 미-한 연합 군사훈련 등으로 긴장 상황이 여전한 가운데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는 미사에 참여해 달라고 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 ⓒ 문미정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에 도착하며 최대 관심사가 한반도의 평화임을 분명히 하고 그를 위해 기도한다고 하였지만, 북한은 그러한 평화의 인사에 예포 대신 방사포를 발사하며 한반도는 아직 준전시 상태임을 상기시켰다.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올리고 한국을 떠난 8월 18일 한미연합군사령부는 “한국과 미국은 18일부터 오는 29일까지 한반도의 안정을 유지하고 역내 방호와 대비태세 향상을 위해 을지 프리덤 가디언(UFG) 연습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북한은 이러한 한미 군사훈련을 비난하며 “선제타격이 우리가 선택한 임의의 시각에 무자비하게 개시된다는 것을 다시금 천명한다.”고 위협했다. 한반도의 평화가 교황이 떠나기 무섭게 시험대에 올랐다.


평화는 정의의 결과


평화는 더 이상 정치외교 또는 군사력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전쟁을 인간의 끝없는 욕망의 결과로 보고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의와 절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욕망의 존재인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는 한 전쟁상태는 계속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예로부터 평화를, 폭력이나 전쟁이 없는 단순한 공존의 상태인 ‘외적 평화’와, 자신의 욕망을 다스려 얻는 마음의 안정과 평온의 상태인 ‘내적 평화’로 구분했다. 


외적 평화가 주어졌다 해서 곧바로 내적 평화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내적 평화 없이 외적 평화는 있을 수가 없다. 인간의 욕망을 다스리는 금욕의 문화가 정착되지 않는 한 평화는 요원한 신기루일 것이다. 인간이 권력지향의 의지를 억제하고 절제와 겸양을 아는 인간으로 거듭나지 않는다면, 이 땅에서 평화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먼저 의식의 전환이 이루어져 새로운 인간관, 세계관, 종교관이 확립되어야 인류는 진정한 평화의 시대를 예비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평화를 정치적으로만 접근해서는 얻을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우선 한반도에서의 평화추구는 한민족이 체험한 역사적 맥락에서부터 실마리를 풀어나가야 한다. 그렇게 볼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난 60년 이상 지속되어 온 남한과 북한 사이의 분열과 갈등의 체험이다. 이것이 어떤 형태로든 치유되지 않는 한 평화를 위한 토대는 마련될 수 없다. (2014년 8월 18일 명동성당 강론)


교황은 평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화해와 연대의 문화를 증진시켜 불신과 증오의 장벽을 허물어 가는 끝없는 도전이라고 말한다. 평화란 상호 비방과 무익한 비판이나 무력시위가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대화를 통해 이뤄질 수 있다는 확고부동한 믿음에 그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이다. 그리고 정의는 하나의 덕목으로서 자제와 관용의 수양을 요구한다. 정의는 우리가 과거의 불의를 잊지는 않되 용서와 관용과 협력을 통하여 그 불의를 극복하라고 요구한다. 정의는 상호 존중과 이해와 화해의 토대를 건설하는 가운데 서로에게 유익한 목표를 세우고 이루어 가겠다는 의지를 요구한다.”(청와대 연설)  


평화를 위한 용서와 대화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는 60년 동안 지속되어 온 의심과 대결의 사고방식을 청산해서 불신과 증오의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과거의 잘잘못에 매달려 미래의 희망을 내던져서는 안 된다. 형제 사이의 잘못은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분열의 간격을 메우고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서 형제적 사랑을 위한 유대를 재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만나서 대화하며 차이점들을 넘어서서 화해하여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교황은 바티칸 귀국 비행기 안에서 남북한이 아직도 형제자매처럼 같은 언어를 쓴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어머니가 같다는 말”이라고 강조했다. 교황은 이어 “한반도에도 언젠가 평화가 찾아와 두 형제·자매는 하나로 뭉칠 것이다. 한 형제, 한 가족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국인의 평화 추구를 이렇게 의미부여 했다.


“한국의 평화 추구는 이 지역 전체와 전쟁에 지친 전 세계의 안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우리 마음에 절실한 대의다.” (청와대 연설)


▶ 지난편 보기





[덧붙이는 글]
< 평화의 인문학 - 평화는 삶의 조건으로서 정의의 결과 >, 『경향잡지』 2014년 10월호에 실린 칼럼을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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