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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구약성서의 대량학살 1 - 어떤 살인 (출애굽기 2:11-15) 대량학살을 보는 기본적인 관점 2016-04-11
곽건용 목사 edit@catholicpress.kr


편집자 주) 구약성서의 대량학살을 어떻게 읽을것인가라는 주제로 곽건용 목사가 6회에 걸쳐 설교했던 내용을 원고로 나누어 올립니다.



대량학살이란?


여섯 번에 걸쳐서 ‘구약성서의 대량학살(genocide)’을 주제로 설교하겠습니다. 주로 출애굽기와 여호수아 본문을 읽겠지만 강해설교 식으로 한 장씩 읽어가려는 건 아닙니다. 그랬다가는 일 년 내내 이 주제로 설교해야 할 겁니다. 또한 읽을 본문이 거기에만 국한되지도 않습니다. 구약성서에는 출애굽기와 여호수아 말고도 대량학살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얘기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다룰 내용은 구약성서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대량학살에 대한 얘기를 어떻게 읽고 이해해야 하는지, 왜 야훼는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그런 명령을 내린 야훼는 어떤 신인지를 알아보려 합니다. 


우선 ‘대량학살’이 무슨 뜻인지 잠정적으로나마 정의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것은 흔히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가 생각해보려는 대량학살은 도덕이나 윤리, 또는 범죄 유무 여부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사람을 대량 학살한 경우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억울하게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경우입니다. 가장 비근한 예가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입니다. 나치는 유대인들을 단지 유대인이란 이유로 대량학살했습니다. 나치는 이런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질렀기에 지금껏 욕먹고 비난받는 겁니다. 이후 독일 정치인들이 여러 번 사과했지만 그 죄는 쉽게 잊히지 않을 겁니다. 


구약성서에도 이런 경우가 여러 번 등장합니다. 이런 짓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불리는 ‘이스라엘’에 의해서 저질러졌습니다. 더욱이 하느님이 직접 대량학살을 저지른 경우도 있고 또 이스라엘더러 그렇게 하라고 명령한 적도 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이 야훼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서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말입니다. 




시대 상황에 맞게 이해해야


본격적으로 대량학살 얘기를 하기 전에 좀 다른 얘기를 하겠습니다. ‘동형보복법’(Lex Talionis)이란 것이 있습니다. ‘같은 형태로 보복하는 법’이라고 풀 수 있겠습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란 말을 들어보셨지요? 이 법은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조문입니다. 구약성서에도 거의 똑같은 문장의 조문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1장 23-25절의 “목숨은 목숨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라는 조항이 그것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조문과 문자적으로 거의 똑같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은 기원전 18세기의 법전이고 출애굽기는 기껏해야 기원전 12세기 문서이므로 후자가 전자를 참조했다고 보는 게 순리입니다. 이 사실이, 곧 출애굽기의 법이 고대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에서 가져온 것이란 사실이 오랫동안 성서학자들을 괴롭혔습니다. 야훼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친히 주신 법이 어떻게 기존 법의 복사판일 수 있냐는 겁니다. 하지만 ‘신념’과 ‘사실’은 구별돼야 합니다. 신념이 사실에 기반을 둬야지, 그 반대여서는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조문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상대방이 내 눈을 상하게 했다고 나도 상대방의 눈을 상하게 하고 이빨 두 개를 부러뜨렸다고 해서 나도 그 사람 이빨 두 개를 부러뜨리라는 얘기니 말입니다. 요즘 이런 짓은 조직폭력배나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사실 이 법은 과잉보복을 금하는 취지로 제정됐습니다. 상대방이 한 쪽 눈을 상하게 했다면 한 쪽 눈만 상하게 보복해야지 그 이상으로 보복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양쪽 눈을 모두 상하게 하거나 그 이상의 보복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법은 끝없이 반복되는 보복의 악순환을 막으려는 취지로 제정됐습니다.


이것만 봐도 고대사회와 오늘날 사회는 통용되는 생각과 관습이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사회의 법정신과 지금의 법정신은 크게 다릅니다. 그러니까 고대사회의 법과 전통, 관습을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방식대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구약성서의 대량학살을 어떻게 이해할까?


대량학살이 고대세계에서만 벌어진 것은 아닙니다. 현대에도 고대 못지않게 대량학살이 벌어졌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시기에 나치에 의해 행해진 유대인 학살은 유대인들이 열심히 알린 덕분에 현대 대량학살의 대명사가 됐지만 그 외에도 많은 예가 있습니다. 터키인들에 의한 아르메니아인 학살과 일본인에 의한 난징 학살 및 일본군 성노예 학살은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보다 덜 알려졌지만 참혹하긴 매 한 가지입니다. 


또한 돌아보기엔 무척 아프지만 파월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양민 학살도 있었습니다. 한 겨레 안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 이승만 정권 때 벌어진 보도연맹 학살과 제주 4·3 학살이 그런 경우입니다. 이런 짓을 저지른 자들은 모두 비난을 받았습니다. 씻기 어려운 범죄를 저지른 역사의 죄인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여러 번 사과를 해도, 그 어떤 액수의 보상을 해도 부족한 짓을 저지른 겁니다. 



이런 대량학살이 구약성서에도 여러 번 등장합니다. 노아 시대에 홍수로 땅 위에서 숨 쉬는 모든 생물을 몰살한 사건이 성서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대량학살의 예입니다(창세기 6-9장). 거기서 하느님은 온 세상이 패역했다며 사람을 창조하신 걸 후회했습니다. 그래서 땅 위의 모든 생명을 몰살했던 겁니다. 땅 위의 모든 생명은 사람들의 패역 때문에 몰살당했습니다. 


히브리 노예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했을 때 이집트 장자들이 몰살당한 것도 대량학살의 예입니다. 이때도 이집트의 모든 장자들이 죽었습니다. 단지 이집트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말입니다.


이를 성서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한밤중에 야훼께서 이집트 땅에 있는 처음 난 것들을 모두 치셨다. 임금 자리에 앉은 바로의 맏아들을 비롯하여 감옥에 있는 포로의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까지 모두 치시니 바로와 그의 신하와 백성이 그 날 한밤중에 모두 깨어 일어났다. 이집트에 큰 통곡소리가 났는데 초상을 당하지 않은 집이 한 집도 없었다(출애굽기 12:29-30).


다음으로 이스라엘이 40년 광야 유랑을 끝낼 즈음에 야훼 하느님이 그들에게 내린 명령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거기에는 일곱 부족이 살고 있는데 야훼는 그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가장 충격적인 야훼의 명령이 이것일 겁니다. 사람들이 야훼와 구약성서가 비윤리적이라고 비난하는 가장 큰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가나안에 살던 사람들을 모두 죽이라고 했습니다. 남녀노소 상관없이 모두 죽이라는 겁니다. 게다가 이 명령은 여러 번 내려졌습니다. 대표적인 것 하나만 인용해봅니다.


야훼 당신들의 하느님이 당신들이 들어가 차지할 땅으로 당신들을 이끌어 들이시고 당신들 앞에서 여러 민족 곧 당신들보다 강하고 수가 많은 일곱 민족인 헷 족과 기르가스 족과 아모리 족과 가나안 족과 브리스 족과 히위 족과 여부스 족을 다 쫓아내실 것입니다. 야훼 당신들의 하느님은 그들을 당신들의 손에 넘겨주셔서 당신들이 그들을 치게 하실 것이니 그 때에 당신들은 그들을 전멸시켜야 합니다. 그들과 어떤 언약도 세우지 말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마십시오(신명기 7:1-2).


이런 명령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한 다음에도 주어졌습니다. 사울 왕이 군대를 이끌고 아말렉 종족과 싸울 때에 야훼 하느님은 사무엘을 통해서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한 일 곧 길을 막고 대적한 일 때문에 아말렉을 벌하겠다. 너는 이제 가서 아말렉을 쳐라. 그들에게 딸린 것은 모두 전멸시켜라. 사정을 보아 주어서는 안 된다.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와 젖먹이, 소 떼와 양 떼, 낙타와 나귀 등 무엇이든 가릴 것 없이 죽여라(사무엘상 15:2-3).


야훼는 사정 봐주지 말고 아말렉을 전멸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들까지도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는데 그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길을 막고 이스라엘을 대적했기 때문에 멸절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게 이해할만한 이유입니까? 여러분은 이해가 됩니까?


대량학살을 보는 기본적인 관점


이와 같은 대량학살에 대해 대개는 불편해 하거나 분노하지만 전혀 불편해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살상은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불가피한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대량학살은 죽은 사람의 숫자가 많을 뿐, 실행해야 한다면 실행해야 한다는 겁니다. 다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야겠지요. 대량학살의 명령을 하느님이 내렸다면, 그리고 하느님이 직접 실행했다면 그런 줄 알아야지 어떻게 하겠냐는 겁니다. 대량학살이 하느님의 명령에 따르거나 그 이름으로 행해졌다면 이러쿵저러쿵 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하느님 이름으로 행해졌다면 수많은 사람이 죽어도 상관없나요? 나치의 유대인 학살, 터키인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일본군의 난징 학살과 이승만 정권의 보도연맹 학살도 하느님의 명령에 따랐다고 한다면 괜찮습니까?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앞으로 찾아보겠습니다. 여기서는 앞으로 대량학살에 대한 얘기를 진행함에 있어서 우리가 가져야 할 공통적인 인식 세 가지만 얘기하겠습니다. 


첫째로 사람에게는 보편적인 윤리라는 게 있습니다. 특정 종교의 경전이 가르치지 않는다 해도, 성현이 말하지 않았다 해도 수학공리처럼 누구나 받아들이는 윤리가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게 여기 속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굳이 누가 말하지 않고 종교가 적시하지 않아도 해서는 안 되는 행위입니다. 부모공경도 그렇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모공경은 보편적 윤리입니다. 공경하는 방법은 문화와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말입니다.


사람을 대량학살하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는 행위요 범죄입니다. 여기엔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것들을 묻거나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유대인이거나 아르메니아인이라고 해서 죽이는 짓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범죄입니다. 


그렇다면 이집트의 장자를 몰살한 일이나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학살한 일, 아말렉 족속을 몰살한 일에 대해서도 똑같이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요?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그럴 겁니다. 그것을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구별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성서를 경전이요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게 야훼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서 행해졌다고 성서가 전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 행해졌다고 해서 성서가 전하는 대량학살을 긍정하거나 최소한 묵인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하겠습니다. 야훼 하느님이 진정 그 명령을 내렸는지도 따져봐야 할 겁니다. 


둘째로 구약성서의 대량학살을 학살을 저지른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만 바라보지 말고 학살당한 사람들의 입장도 고려해야 합니다. 서로 대립하는 양편이 존재하는 경우 한 쪽 말만 들어서는 제대로 사건을 파악하고 평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편의 얘기를 들으면 완전히 내용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동안 이집트인이나 가나안 종족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이 얘기들을 읽어왔습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는 언제나 필요한 태도입니다.


물론 구약성서에 이집트인이나 가나안 부족의 목소리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려 하지 않는 태도가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우리의 상상력을 발휘해서라도 그걸 들으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근본적인 전제로서 성서는 어떤 성격의 책인가 하는 점입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말들 합니다. 이를 부인할 생각은 없습니다. 성서는 분명 하느님의 말씀이 기록된 책입니다. 


하지만 성서가 하느님의 말씀이란 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대답이 다양합니다. 우리는 성서가 하늘에서 하느님이 불러준 얘기를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이 듣고 그대로 적은 책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은 앞으로 제가 하는 얘기에 공감하지 못할 겁니다. 성서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었던 얘기를 기록한 책입니다. 성서에 기록된 말씀을 그들은 분명히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는 오늘날 우리에게 의심스러운 말씀들도 적지 않고 시대적인 제약을 갖는 말씀도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말씀들을 세심하게 읽고 해석하고 평가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대량학살에 관한 얘기들이 바로 여기에 속합니다. 앞에서 동형보복법 얘기를 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세 가지 전제에 동감하십니까? 저는 그러리라고 믿습니다. 이 전제 위에서 앞으로 얘기를 전해보겠습니다. 



[필진정보]
곽건용 : LA항린교회 담임목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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