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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약한 사제에게 미사 갈 적마다 산티아고에 순례가는 고행이라는데 2015년 10월 18일 일요일, 맑음오늘 중으로 텃밭의 풀을 다 매고 꽃씨를 뿌려야 하는데 6시가 넘어도 먼동이 터오지 않는다. 내일 떠날 여행가방을 싸면서 동트기를 기다리다가 회색이 좀 가시자 엉덩이에 방석을 달고서 텃밭으로 내려갔다. 땅바닥을 기며 풀과 엉키는 샅바놀이는 씨름판과 또 다르다. 뿌리 채 캐내는 덴 호미보다 낫이 나아서 ... 2015-10-20 전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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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의 이빨을 지으신 하느님의 장난끼 2015년 10월 14일 수요일, 맑음 서울 가는 '함양지리산고속' 버스를 탔다. 남이 운전하는 차라 좋고 일반 승용차보다 좌석이 높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산위로 마악 피어오르는 안개며, 그 산 기세에 눌려 야트막하게 순응하는 농가들이 겸손하다. 농사를 지어보면 하늘이 주셔야 모든 게 풀린다는 인생사를 가장 뼈저리게 익힌 사... 2015-10-15 전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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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빠서라도 아플 틈 없는 몸뚱이들 2015년 10월 12일 월요일, 비 흐림 그리고 맑음왕산에 붉은 아침놀이 찬란하다. 저 빛을 내려고 태양은 얼마나 긴 치장을 하고서 얼굴을 내밀까? 그런데 조금 뒤 마당의 태양열집광판 위로 비 쏟아지는 소리가 들린다. 좀 전의 예쁜 얼굴을 “흥!” 하면서 감춰버려 변덕스러운 기집애 같다.비바람이 지나면 한기가 몰려온다. 3층 다락으로 올라... 2015-10-13 전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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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각황전 앞에서 울려퍼지던 영혼의 가락들 2015년 10월 10일 토요일, 맑고 흐리다 소나기광주에 갔다. 수세미물을 제법 많이 받아놓았기에 스킨 만들어 쓰시라고 성삼회 수녀님들에게 갖다드리고, 12시에는 보스코의 6총 동생 성석현 장로의 아들 결혼식에 가고, 방림동 어머니의 산소에 성묘를 하고, 저녁 6시에는 구례 화엄사 ‘화엄음악제’에 참석하는 여정이다.석현이 서방님은 촌... 2015-10-11 전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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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의 눈길만으로도 산꽃들은 행복할 게다 2015년 10월 5일 월요일, 맑음“마님, 뭐하셔유?” 어제 오후에 헤어진 미루의 전화다. “뭘 하긴... 남편 없을 때 할 일이 태산이지. 우선 배나무 밑 약초밭 풀매고, 무 순 옮겨 심고, 여름 내내 곰팡이 난 싱크대 밑 청소하고, 뒤꼍의 포인세티아 화분들 제멋대로 컸으니 손질도 하고...” 머리 속에서 DVD가 돌아가면서 한나절치 일을 순식간에 ... 2015-10-06 전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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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엄마도 때로는 보호를 받고 싶은데....” 2015년 9월 30일 수요일, 흐리다 맑게 개임간밤에 더럽힌 침대 시트들을 몽땅 걷어서 빨았다, 새벽 다섯 시에! 꼭두새벽에 세탁기를 거듭 돌리는 아내를 보고서 보스코는 말없이 지켜본다. 언젠가 내가 정말 치매에 걸려서 기저귀를 차고 있는지도 이불 요에 실례를 했는지도 도통 모를 지경이 되면 저 남자 불쌍해서 어찌할까나 하는 걱정이 ... 2015-10-02 전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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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의 남편으로선 어느 편이 낫겠어?” 2015년 9월 29일 화요일, 맑았다 흐려짐사람이 참 독하다. 살아남으려고 어느 동물보다 더 질긴 인내력을 발휘한다. 대장내시경을 하려면 제일 징그러운 게 정체 모를 그 묘한 물약을 맛보는 일이다. 시큼털털하고 찝질하기도 한데다 그 맛을 포장하느라 레몬향까지 넣었으니..... 우리 보스코처럼 도통 물을 못 마시는 사람은 본인은 물론 옆에... 2015-09-30 전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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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 2015년 9월 25일 금요일, 맑음장내시경을 받으려면 먼저 의사와 면담을 해야 한다기에 30일의 내시경 시술을 위해 오늘 9시에 면담이 잡혀 있었다. 한일병원까지 부지런히 걸어갔다. 걸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집을 나와 걷다보니 아침에 뭘 했는지 아침기도도 티벳요가도 보스코에게 아침을 챙겨주는 일도 생략한 길이다. 밤에 생각이 나서 아... 2015-09-26 전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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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해 안되는 ‘비생활인 (非生活人)’ 2015년 9월 23일 수요일, 하루 종일 비“여보, 축대 위 도깨비방망이랑 쑥, 그리고 넝쿨잡초들 좀 걷어냅시다. 장미도 연산홍도 심지어 소나무까지 질식사하겠더라구요.”라는 말에 ‘성나중씨’의 대답은 역시나 “좀 있으면 겨울인데 그냥 놓아두지 그래? 어차피 얼어 죽을 건데...” 그러나 마당 화단에 설 때마다 호자덩쿨, 하늘타리, 새콩,... 2015-09-24 전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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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진 송신부님 댁에 다녀오다 2015년 9월 21일 월요일, 맑음밤중에 일기를 쓸 시간이면 다가오는 유혹이 있다. 글을 쓰는 대신 책을 읽고 싶은 맘이다. 그러고 나면 숙제하기 싫은 아이처럼 일기는 자정 너머로 밀리고 자다가 졸다가를 거듭하노라면 자정을 훨씬 넘어 일기장을 닫게 된다. 내가 막 잠자리에 들고 나면 조금 뒤, 새벽 4시 30분이면 보스코가 일어나 서재로 간... 2015-09-22 전순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