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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과 순응의 틈새
  • 강신숙(성가소비녀회) 수녀
  • 등록 2015-04-14 17:14:43
  • 수정 2017-02-21 15: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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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지 마세요, 움직이면 더 위험하니까 움직이지 마세요!” 세월호 이준석 선장이 생사의 기로에서 아이들과 탑승객들에게 반복적으로 내린 명령이다. 그리고 그는 승무원들과 함께 급히 세월호를 빠져나갔고, 수 백 명 아이들과 탑승객은 그대로 몰살당했다. 이후 세월호 문제 분석을 둘러싼 오랜 실랑이가 실시간 뉴스를 덮었다. “팽목”은 아수라장이었으며 거짓말로 기획하고 보도하는 또 다른 ‘언피아’, 관피아, 권력의 하수들이 유족과 국민들을 상대로 “가만히 있어라, 조용히 하라, 우리가 다 알아서 할 것”이라며 반복적으로 외쳐댔다. 그리고 그들 역시 간단히 시간에 올라타서 아수라장의 시공간을 빠져나갔다.


그 후 이들의 집요한 무력화에 저항하며 보낸 1년, 유족들과 우리는 여전히 세월호 내부에 꼼짝 없이 갇혀 두려움에 떠는 아이들과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소리(지금도 진행 중인)에 몸서리 치고 있다. 대체 이렇게 함부로 대하고 있는 이들, 함부로 대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무슨 근거로 진실을 밝히라고 외치는 무력한 어미들의 가슴을 수 천 번씩 내리 찍는가?


우리는 살아오면서 줄곧 이런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들으며 살아왔다. 사회조직과 시스템은 대부분 보이지 않는 명령과 순응의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 심지어 종교계 지도자들은 시스템의 더 위험한 부역자들일 수 있다. 그들은 정말 착한 사람들일 거라고 근거 없이 믿게 만드는 지위를 이용해서 우매한 대중을 상대로 진리를 팔고, 그러고도 독단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모든 조직은 명령의 진위를 묻지 못하게 한다. 오히려 명령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소위 “알아서 처신”하는 사람을 반긴다. 우리는 아이 때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이런 명령에 잘 길들여진 개체로 살도록 훈육되어왔다. 그러니 보통의 사람들이 이 모든 명령의 기제들에 의심을 품고 명령 자체를 점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설사 명령이 잘못 되었음을 알았다 해도, 이 후 자신이 취할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선택 이후가 더 큰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권력의 메커니즘에 저항한다는 일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오르는” 일만큼 목숨 거는 일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이를 알아차린다. 조직에서 벗어나는 일의 결과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잠깐만 계산해 봐도 알 수 있으니까. 잘 짜여진 사회와 조직일수록 반동을 솎아내기란 식은 죽 먹기이다.


문제는 메커니즘의 순응에 있다. 메커니즘은 어떻게 작동되는가? 일찍이 리영희 선생은 우리 당대의 우상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우상이란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우상의 통치는 사유가 금지된 영역에서 이루어지며, 그의 체제는 사유하지 않는 가신들의 충성에 의해 유지된다. 그들은 어디서든 법과 도그마와 전통과 신학을 앞세워 자신의 권력을 유지한다. 우상은 종교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우상은 사유가 정지된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는 모든 영역에서 일어난다. 우상은 이들을 좀비처럼 활용하는데 불행하게도 이 세상의 좀비들은 영화 속의 좀비처럼 눈으로 식별할 수가 없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매력 있는 ‘포스’를 갖추고 활동한다. 이들이 지닌 인기는 식을 날이 없어서 대중은 자신의 아이들을 그 제단에 바치면서도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우상의 하수들이 가장 좋아하고 많이 사용하는 말은 토시를 달지 않는 “(사유 없는)복종, 충성, 수용, 침묵” 같은 용어들이다. 그들은 법과 체제의 규율과 경전을 끌어들여 자신의 힘을 ‘도그마화’ 한 이후, 자신의 절대 성역에서 분탕질 하는 사람들을 솎아내며 권력을 유지한다. 그러니 자신들이 배제한 이들, 제 목소리를 낼 수 없게 입을 틀어막은 사람들 편에 선다는 것은 너무 계면쩍은 일이다. 화려해 보이는 역사와 진보의 이면은 이렇듯 사실상 형편없는 무리들에 의해 조작된 편견과 권력의 결탁으로 점철돼 온 것이다.


예수는 이런 면에서 반동자였다. 그는 당시 사제, 랍비, 바리사이 같은 지도자들이 하느님과 우상을 제대로 구분 못한 채 ‘스승’ 행세를 하는 것에 격분 했다. 그는 이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 독사의 족속들, 예언자들을 죽인 살인자들의 후손”이라며 맹공격을 퍼부었다. 예수가 행한 분노의 이유는 간단했다. 이들이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버린’ 탓이며, 개종자 한사람을 얻는데 광분하다가 겨우 하나를 얻으면 그를 ‘자신들보다 더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마태23,1-39을 읽어보라!).


그러면 예수는 어떤 사람을 감히 명령 가능한 자로 두고 싶어 하셨을까? 아마도 그 첫 번째 자격 조건은 틀림없이 ‘자기혁명(메타노이아)을 이룬 자’였을 것이다. 그의 첫 일성이 “회개하라”였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겪은 스승의 체험, 사도 바오로의 다마스쿠스 체험, 예수를 만난 이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낡은 생각의 회로가 뒤집혀졌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이런 사람은 명령자로 비쳐지기보다 해방하는 자로 비쳐진다. 진짜 스승(지도자)은 대중 안에서 배움이 일어나게 하는 사람이며, 각성케 하는 사람이고, 이전에 살아온 방식에서 궤도수정이 일어나게 하는 사람이다(루카4,18). 그러나 이런 사람은 기존질서에 매우 위험한 사람이다. 하느님 나라는 기존체제의 비위를 건드림 없이 능란한 처세로 오는 면피적 평화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로 인해 전방위적으로 공격당하던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에게 “가만히 있어라, 입 다물라, 조용히 하라”고 압박했지만 예수는 자신의 행보를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가만히 있지 않는 예수’를, 점점 더 소란스럽게 하고 다니는 예수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회와 조직에서 제거했다.


세월호 이후 무엇이 달라졌는가? 제2, 제3의 이준석 선장이 여전히 우릴 우롱하고 있지 않은가? 실로 무섭고 비극적인 일이다. 명령을 내릴 위치에 있는 사람은 부디 명령을 내리기 전, 설교대와 제대에 서기 전, 팽목과 절규하는 유족, 통곡하는 예수를 끌어안으라. 그렇지 않으면 평생 순응만을 주입받은 우리 ‘나머지들’은 당신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끝내 알아채기도 전에 다시 바다 밑으로 갈아 앉고 말 것이다. 그러니 함부로 명령하지 말라. 함부로 순응하지도 말라. 자기혁명이 정답이다. 그래야만 명령과 순응의 고리를 끊고, 탈출을 감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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