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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 않는 사제들, 보고 들을 수 있어 행복한 제자들
  • 이기우
  • 등록 2026-07-23 17:5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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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6주간 목요일 (2026.07.23)

: 예레 2,1-13; 마태 13,10-17

 

예레미야 예언자는 모태에서 빚어지기 전에 하느님께서 아셨다지만(예레 1,5), 예수님은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며 아주 오래 전부터 메시아로 오시기로 예언되었고 과연 때가 차자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신 분이신 데다가 민족들의 예언자로 성별된 존재를 넘어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로 세워 주신 분입니다. 그래서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던 같은 무게로 그분의 말씀이 다가옵니다.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이 그분의 말씀으로 창조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뿌리실 때,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동안 갈릴래아 지방에서 주로 활동하시면서 전반기에는 그분이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길바닥이나 돌밭, 가시덤불에도 뿌리셨지만, 후반기에는 좋은 땅을 골라서 정성을 다해 뿌리셨습니다. 그 결과, 백 배도 넘는 풍성한 열매를 거두셨습니다. 이는 역사적 현실로도 뒷받침됩니다. 


공생활 전반기에 군중을 대상으로 복음을 선포하시던 그분이 후반기에는 군중을 벗어나서 열두 제자에게 집중하셨고, 특히 부활 후 승천 전까지 사십 일 동안에는 이들을 사도로 양성하는 데 공을 들이셨습니다. 이 노력이 루카와 요한이 쓴 복음서에 증언되어 있는 '예수 발현 사건'입니다. 그 결과, 승천 후 성령 강림 후에는 이 사도들이 초대교회의 신자들을 놀랍게 활성화시켰고 신앙을 박해하던 로마제국조차도 끝내 신앙의 진리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들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사제들이 “주님이 어디 계신가?”(예레 2,8)하고 묻지 않았다지만, 예수님 당시의 사제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두가이파에 속했던 그들은 주님의 뜻이 궁금하지도 않은 듯이 성전 권력에만 집착하여 하느님께는 관심도 두지 않고 있었기에, 그 사제들에게는 말씀의 씨앗을 뿌리지 않았고 성전을 허물라고 말씀하시고는 아예 군중 속에서 새로운 말씀의 성전을 짓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군중 속에 숨어서 엿듣다가 함정을 만들려고 들거나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오던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이치에 맞지 않는 시비를 걸어올 때마다 조목조목 반박해서 물리치셨을 뿐이었고, 제자들에게 그들의 위선을 조심하라고 기회가 될 때마다 당부하셨습니다.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 이 두 부류는 말씀의 씨앗을 뿌릴 밭이 아니었던 겁니다.


사실 말씀 선포의 현장에서 만난 일반 군중 가운데에서도 말씀을 듣자마자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수두룩했습니다. 요행히 머리로 알아듣는 경우에도 마음으로는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어쩌다가 깨달음을 얻는 경우에도 세속적인 걱정거리가 더 커서 말씀을 실행하지 않은 까닭에 그 깨달음이 뿌리를 내릴 수 없었던 사람들도 제법 되었습니다. 이들 부류의 마음 속에는 하느님의 자리가 아예 없었던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먼저 그리고 무상으로 자비를 베푸셨고, 이에 대한 찬미와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고 표현하는 것이 기본 관계 질서인데, 이것이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조건이었습니다.


여기서 길가나 돌밭 또는 가시덤불에 비유되는 군중은 자신들의 눈 앞에서 일어난 기적을 보아도 이를 하느님의 표징으로 알아 보지 못하고, 이를 비유로 쉽게 풀이해 해주는 말씀을 들어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마음이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마태 13,15)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셨습니다. 일부러 그들이 알아 보지 못하게 하거나 알아 듣지 못하게 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평소에 그분은 될 수 있으면 알아듣게 하시려고 듣는 이들의 체험을 고려하여 자유자재로 비유 소재를 바꾸어 말씀하신 터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처럼 예수님을 알아본 제자들은 그분이 파견하시는 대로 진정으로 복음을 갈망하던 이들에게 가서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열매를 거두기도 했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16)


예수님처럼 이 말씀을 하고 싶었던지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은 즉위 후 처음으로 반포한  교황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사제로 살아오면서 느끼고 깨달은 바를 담아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반포하였습니다. 특히 매일 혹은 매주일 강론으로 신자들에게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사제들에게 강론의 중요성에 대해서 대단히 힘을 주어 강조하셨습니다. 


강조점은 여러 가지였지만, 핵심은 신자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징표를 식별해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이미 당시에 나타난 시대의 징표를 두고 예언자들에게  말씀하셨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통해서도 말씀하셨지만 특히 성령으로 현존하시는 지금도 시대의 징표를 통해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징표를 식별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배경으로 하고 예수님의 삶을 기준으로 삼아서 해석해야 정통적이고 정확한 강론입니다.


시대의 징표에 대해서는 신자들도 물론 알 수 있고 볼 수 있으며 들을 수 있습니다. 단지 길바닥이나 돌밭 또는 가시덤불처럼 여러 가지 장애들이 있기 때문에, 이미 신자들 각자가 알아 듣고 있는 시대의 징표에 더해서, 사제들이 강론으로 식별한 시대의 징표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자들이 각자 식별한 시대의 징표는 정치적 입장이나 경제적 이해관계 또는 인생의 연륜이나 종교적 영성의 수준에 따라서 너무나 다르기 마련입니다. 물론 사제들은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에 바탕해서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여 신자들에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대의 징표를 식별한 바를 감별하는 성경적이고 교회적인 기준도 필요해 집니다. 첫 번째는 십자가의 기준입니다. 식별 메시지를 발하는 당사자가 손해와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말하는지를 살펴야 진정성이 일차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각오로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부활의 기준입니다. 부활은 현세에로 인간의 운명을 가두지 않고 내세에로 열어젖힐 뿐 아니라 지금 이 현세에서도 세속적 가치가 아니라 천상적 가치로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신앙의 핵심 신비입니다. 세 번째는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 기준입니다. 지식을 배웠거나 권세나 재물을 가져서 힘을 과시할 수 있는 부자나 권세가들만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포함한 모든 약자들에게도 보편적으로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배제한 메시지는 하느님의 뜻에 부합되지 못합니다.


제자들은 이 세 가지 감별 기준도 통과하여 예수님처럼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고 해석해 줄 수 있었던 덕분에 하늘 나라의 신비를 볼 수 있었고 들을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미사 때마다 외치는 “신앙의 신비” 환호도 하늘 나라의 신비를 보고 듣는 환호이기 위해서도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라는 하늘의 공리를 전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필진정보]
이기우(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성사전담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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