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 불신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요즈음 단비와 같은 두 소식이 장안을 장식했다. 첫째는 개헌하지 않고도 대법원장 임명에 국민주권이 제대로 발휘될 방안이 있다는 것, 둘째는 주권자 국민이 사법권에 개입하는 길을 확대하는 것이다.
며칠 전 수원에서 (사)수원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가 주최한 한인섭 서울대 명예교수의 강의가 있었다. 제목은 ‘시민이 중심되는 사법체계’. 이재명 정부와 여당이 국민주권시대를 외치고 있지만, 사법개혁이 요원한 터에 한 교수의 강의내용은 시원한 단비와 같았다.
강의 내용 중 눈에 번쩍 뜨이는 것은, 헌법을 고치지 않고도 대통령이 대법원장 임명에 관한 법률을 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행 헌법에는 ‘제104조 ①대법원장은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라는 이 조항 외에는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원장에 대한 국민주권이 행사될 수 있는 내용이 없다.
그런데 한 교수의 논지는, 이 조항만으로는 3권 중 하나인 사법권에 대한 민주적 정당성이 확보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 헌법 중 주권재민의 정신이 결여된 부분이라는 것, 즉 대통령 맘대로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를 보완하는 장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1960년 헌법과 1963년 헌법을 예로 들었다. 대통령이 대법원장을 임명할 때는 선거인단이나 법관추천회의를 거쳐 대법원장 후보를 추천받도록 하는 조항이 헌법에 규정되어 있었는데, 그게 유신과 전두환 시절을 거치면서 없어지는 바람에 1987년 헌법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기본정신을 살리는 방법은 대통령이 대법원장을 국민에게 추천받는 절차에 관한 법률을 입법하면 된다는 것이다. 위 제104조 제1항 국회의 동의를 받기 전에 대법원장 후보를 검토하는 과정을 일반법률로 입법하는 것은 현행 헌법에도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개헌하지 않고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획기적인 제안이다.
대통령이 국회에 임명동의를 받기 전에 민주적 정당성을 보완하는 어떤 민주적 선출 혹은 추천의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고, 그 절차를 입법해서 국민주권이 어떤 형태로든 참여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헌법정신에 부합된다는 것. 이것은 일반 법률로서 제정해서 운영하면 된다는 것이다. 정신이 번쩍 뜨이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한 교수의 주장을 정부와 여당은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 하나는 국민참여재판이다. 김선수 전 대법관(현 사법연수원 전임교수)은 지난 18일 국회의원회관 제5 간담회실에서 이성윤 의원실과 시민인권위원회 공동주최로 열린 ‘국민참여재판 활성화 방안’ 초청강연회에서 국민주권시대에 걸맞게 국민참여재판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취지의 강연회를 가졌다.
강연 개최의 취지는 주권자의 사법개입을 선진국 수준으로 하자는 것이다. 더도 말고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일본, 이 다섯 나라와 비슷한 수준으로 하면 된다는 것이다. 우리 국민들의 민주주의 역량은 벌써 이들 나라와 비등하거나 넘어섰다. 왜 우리에게 그들보다 낮은 수준의 국민참여재판만 허용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민변 회장을 역임한 김선수 전 대법관은 “민주법치국가에서 사법권의 주체는 주권자인 국민이고 선진국에서는 영국, 미국의 배심제와 일본, 독일의 참심제와 같이 이를 구현하는 제도가 일찍부터 도입되었으나, 우리는 일제강점기로 인해 사법절차에 있어서 국민참여 제도화가 늦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때 사법개혁추진위원회가 만들어져서 이 제도의 도입을 본격 검토하기 시작했고, 노무현 대통령 때인 2007년 6월에 ‘국민의 형사재판 참여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었다. 하지만 국민참여재판 제도는 아직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개선논의가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이제 제대로 활성화 할 때가 되었다” 고 밝혔다.
그동안 기존 헌법상의 사법권의 규정이 주권재민을 반영하는 데 결함이 있다는 지적과 함께 현실에서는 이로 인한 재판과정상의 인권침해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어서 보다 공정한 재판과 국민이 주권자로서 재판에 참여할 권리를 보장하는 일이 중요해졌다는 여론이 커져 온 편이다.
김 전 대법관은 “국민참여재판의 순기능은, 국민이 직접 재판절차에 참여함으로써 사법의 민주적 정당성 강화를 들면서 재판의 투명성 확보에 큰 의의가 있다. 기실 한국의 사법부는 전관예우와 무전유죄 등 논란에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실질적 법정 중심으로 재판이 활성화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공판중심주의, 구두변론주의, 직접심리주의, 집중심리주의 등 선진적 법정운영의 실현에 기여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의 배심제처럼 운영이 되면, 사실 인정 및 법적 판단에 사회적 상식이 반영된다. 법의식 향상 및 법교육적 효과가 크다. 배심원으로 참여한 시민들에게 대화와 토론을 통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체험하게 하는 법교육의 장으로서 순기능 등이 크다는 통계가 있다”고 하는 등 국민참여재판의 효과를 강조한다.
구체적인 활성화 방안들도 제시하였는데, 단독판사에 의한 재판에서도 국민참여재판이 가능하도록 하고, 국민참여재판 전담재판부도 설치하고, 국민참여재판을 진행하는 판사에 대한 인센티브제 도입, 법정에서의 배심원 배석의 개선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는 개정법률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국회의 입법활동에 힘을 보탰다.
강연 내용 중 관심을 모은 대목은, 최근의 성문제 관련 재판에 대해서 “대법원은 ‘성폭력범죄 피해자가 국민참여재판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국민참여재판 배제 결정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결정하였고, 이에 따라 ‘피해자에게 방지하기 어려운 추가적인 피해가 발생할 현저한 우려가 있는 경우에’ 재판장이 판단하도록 관계 법률(국민의 형사재판참여에 관한 법률)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실 2020년 기준 성범죄 일반 재판 무죄율이 3.7%인 것에 반해 국민참여재판 무죄율은 47.8%에 달했다(권인숙 전 의원). 그러니까 국민참여재판에서 성범죄 무죄판결이 많았다는 것은, 성범죄 재판 운영에 문제가 많아 억울한 자가 양산되고 있다는 것을 뜻하고, 따라서 국민참여재판의 문턱이 더욱 낮아져야 함을 의미한다.
이날 강연회에는 시민인권위원회 20여 명이 참석하였고, 참석자들은 특히 성범죄 재판과 관련하여 법원의 국민참여재판 배제율이 높다는 점과, 법원이 성인지감수성과 피해자중심주의라는 편향적 시각을 지적하였다. 즉, 형사재판의 기본원칙인 증거재판주의와 무죄추정의 원칙을 경시하고 있어서 더욱 국민참여재판이 요구된다는 주장이다.
지금처럼 "피해자가 싫어한다"는 이유만으로 배제되는 법 구조 대신, 성범죄 사건에서도 원칙적으로 국민참여재판을 허용하더라도 피해자의 인권침해를 방지할 수 있는 기술적 방안이 충분히 가능하므로, 헌법이 규정하는 피고자 인권을 충실히 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피고인의 신청이 있으면 국민참여재판을 허용하는 것이 주권재민의 원칙이고, ‘예외는 구체적이고 제한적인 요건에 따라 적용되도록 하는”구조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선수 전 대법관의 국민참여재판의 활성화 방안은 진보적 법관 입장에서는 최선일 수 있지만 주권자 국민에게는 미흡할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현행 1987년 헌법상에는 사법권이 법관에 속한다는 조항 자체가 주권재민을 위배하는 결함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향후 개헌을 통해 근본적인 오류를 바로 잡아야겠지만, 그 이전이라도 합리성을 추구하는 적극적인 입법활동이 요구된다 할 것이다. 사법부가 더 이상 국민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불신당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이원영
시민인권위원회 공동위원장
국토미래연구소장
전 수원대 교수
이 글은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와 <불교닷컴>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