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5주간 토요일(2024.7.20.) : 미카 2,1-5; 마태 12,14-21
“불행하여라,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꾀하는 자들!”(미카 2,1)
오늘 독서에서 미카 예언자가 시대의 불의를 고발하는 예언입니다. 남 유다 왕국에서 기원 전 8세기 경에 활약했던 미카 예언자는 이사야와 동 시대 인물입니다. 미카 예언서의 서두에 이렇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유다 임금 요탐, 아하즈, 히즈키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카”(미카 1,1) 그는 이사야처럼 긴 예언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메시아의 강생에 관하여 결정적인 단서를 남겨 주었습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미카 5,1)
베들레헴은 다윗이 태어나 자란 고장이었으므로, 미카가 예언한 메시아도 다윗의 후손 중에서 태어나리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미카가 예언한 이 약속이 예수님의 탄생으로 성취되었다고 보았습니다.(마태 2,6; 요한 7,42 참조) 미카 예언자가 이사야를 비롯한 여러 예언자들이 예고한 메시아 탄생의 결정적 계시를 남겨 놓았기에,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고 오히려 우상 숭배에 물들어 불의를 꾀하는 당대의 시대상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했던 것은 차라리 당연했습니다.
예언자들은 북 이스라엘 왕국에서 활약했건 남 유다 왕국에서 활약했건 또는 그 활약한 시대와 상관없이 하나같이 당시 지도자들과 백성들에 대해서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그들의 날선 비판 때문에 그들은 역시 하나같이 박해를 당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들이 그런 운명을 모르고 한 것이 아니라 알고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예언자들 모두에게 공통되는 기준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켜 해방해 주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었습니다. 이 신앙을 기준으로 예언자들은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초강경한 자세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출애굽의 야훼 신앙에 관한 한 예언자들은 보수주의자들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 예언자는 시대와 나라에 상관없이 당시의 사회 현실과 종교 행태를 가차없이 비판했습니다. 우상을 끌어들이고 숭배하는 죄악과 이로 말미암은 사회의 불공정과 불의를 여과없이 하느님 신앙의 잣대로 심판했던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의 종교적 자세와 사회 현실에 대해서 예언자들은 진보주의자들이었던 겁니다.
예언자들의 정통 노선을 걷던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의 가치에 있어서는 초강경 보수 노선을 견지하셨고, 이에 미치지 못하던 현실에 대해서는 역시 초강경 진보 노선을 고수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당시의 유다교나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백성이 보여주던 행태 역시 비판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비판이 매섭고 아파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당할 박해와 수난을 각오하시고 비판의 강도를 늦추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비판에서 그치지 않고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앞당겨서 실현하심으로써 비판으로 쇄신될 현실의 목표를 제시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언자들과 명백히 구분되는 메시아의 모습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예언자로 활약했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마태 3,3ㄷ)라고 소개하면서도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ㄴ)으로 소개하고 있는 연유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메시아로서의 비판과 실천으로 말미암은 수난은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정해진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수난이 메시아의 정체성을 전부 알려주는 모습은 아닙니다. 수난에도 불구하고 이룩된 부활이야말로 메시아의 정체성을 드러낸 하느님의 계시였습니다. 수난은 예언자들도 다 겼었으나 부활은 메시아께서만 이룩하신 하느님의 구원업적입니다.
오늘날 메시아적 백성으로 자임하는 가톨릭 교회가 메시아의 부활을 선포함에 있어서도 수난을 피해가서는 제대로 전달되기가 어렵겠습니다. 수난 없는 부활 선포는 자칫 공허한 독백일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회 현실에 있어서도 어김없이 메시아께서 실천하신 바 인간 사랑으로 나타나는 하느님 사랑을 증거할 때라야 그런 실천을 담보로 전해지는 메시지가 설득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메시아께 예언된 수난은 메시아적 백성의 운명이기도 한 까닭입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이사 42,1) 마태오는 이사야의 이 예언이 예수님께서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연기 나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심성으로 올바름을 승리로 이끄셨던 생애에 적중한다고 보아 자신의 복음서에 인용하였습니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마태 12,18)
사실, 이사야 예언자는 당시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다윗과 같은 강력한 힘을 지닌 인물이 오시리라고 기대하던 백성 일반의 기대와는 다르게, 장차 오실 메시아는 고난 받는 종일 것이라고 내다보면서 그 고난의 원인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때문이라고도 내다보았습니다. 예언자로서 그가 지닌 상상력과 통찰력은 실제로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천명하시는 자리에서 이사야 예언을 인용하심으로써 그 정확성이 입증되었습니다.(루카 4,18 참조)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그로 인하여 고난을 받으신 메시아께서 부활하시어 믿는 이들 안에 성령으로 현존하심으로써 이룩된 올바른 현실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서 누릴 참된 행복에 대해서는 역시 마태오가 산상설교와 특히 진복팔단으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여기서도 슬픔은 있으며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고난은 없어지지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이 슬픔을 겪을 때 위로하시고 의로운 이들이 박해를 받을 때 하늘 나라의 상급으로 격려하십니다. 부활하신 메시아께서 수행하실 이 역할과 섭리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 또 이 역할과 섭리를 믿기는 커녕 불의를 꾀하고 악을 꾸미는 죄인들에 맞서기 위해서 일으키시는 표징이 있습니다.
이 표징은, 믿는 이들이 아파하거나 고통 받을 때 치유와 위로를 주시는 것이기도 하고, 악한 자들이 불의를 꾀하고 악을 꾸밀 때 천상의 기쁨을 박탈하시고 제 꾀에 걸려 넘어지게 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 믿는 이들에게 더 큰 역할과 사명을 부여하시고자 할 때 확신을 주시기는 것이기도 하고, 악한 자들이 죄악으로 사람들을 유혹할 때 갈라서게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상선벌악(賞善罰惡)이라는 하느님의 섭리를 관철하시고자 일으키시는 표징을 세상에서는 기적이라 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표지라고 보아서 ‘표징’이라 일컫지만, 세상에서는 상식과 자연질서를 넘어서는 신기한 일이라고 보아서 ‘기적’이라 말합니다.
또 믿는 이들은 예수님께서 치유와 구마로 당신의 신적 권능을 드러내실 때 기적이라고 놀라워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적 권능을 체험한 이들에게 생겨나는 믿음이 기적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자들이 놀랍고도 분노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표징이라 부르든 기적이라 부르든 관통되는 것은 올바른 세상을 이룩하시려는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바로 어제 들으신 독서를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앗시리아의 산헤립 임금이 남 유다 왕국을 침공해 왔을 때, 히즈키야 임금은 우상숭배 풍조에 빠지지 않고 또 이집트의 세력에 의지하지도 않았으며 오로지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와 백성의 애국심에 기대어 물리쳐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 히즈키야는 슬피 통곡하며 하느님께 매달리다시피 기도 바쳤습니다. 이 기도를 들으신 하느님께서 이사야를 시켜 특별한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히즈키야를 살리시되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꾼으로 더 쓰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표징에 대한 기록은 이사야 예언서 38장에만이 아니라 열왕기 하권 20장에도 병행되어 나오는데, 부왕 아하즈가 아시리아에서 들여온 해시계의 눈금에 비치는 그림자를 열 칸이나 뒤로 돌리는 기적이었습니다.
과학적으로 이해하기 참으로 어려운 이 기적에 대한 해석은 이러합니다. 시간이 뒤로 가려면 자전하던 지구가 거꾸로 돌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지구는 한 시간에 1,660km나 가는 매우 빠른 속도로 자전하는데, 이 속도에서 방향이 바뀐다면 지구상에 있는 모든 물체가 대홍수에 맞먹을 정도로 대혼란을 겪게 됩니다. 특히 바닷물은 큰 해일이 되어 모든 바닷가 마을을 덮칠 것입니다.
그러나 히즈키야의 기적에도 불구하고 이런 재앙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합리적 해석은 빛의 굴절로 보는 것입니다. 해가 뒤로 가거나 지구가 거꾸로 돌지 않아도, 정상적으로 비추이는 햇빛이 물기를 머금은 구름에 의해 굴절되어 지상에 전해진다면 해시계의 눈금이 앞으로 가거나 뒤로 가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한 현상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사야가 이를 이용해서 히즈키야에게 하느님의 권능을 확신시키고 남 유다 왕국의 회개를 위해서 왕정을 잘 펴게끔 용기를 주는 일이었습니다.
신체적인 질병이나 장애를 지닌 이들을 치유해 주신 기적도 예수님께서 지니신 신적 권능을 보여주는 표징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당사자가 조금이라도 그분께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는 경우에라야 현실화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적이 일어나려면 신적 권능의 비율이 99%나 되어야 하지만, 나머지 1%를 채우는 것은 당사자의 믿음입니다. 그 1%를 위해서 해시계의 눈금을 돌리는 표징을 하느님께서는 이사야를 시켜서 보여 주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 1%에 투자하고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메시아에게 당신의 영을 부어주셔서 올바른 세상을 이룩하게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메시아 백성인 우리에게도 언제나 99%의 권능으로 올바른 세상을 위한 기적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