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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예수 17
  • 김근수 편집장
  • 등록 2015-07-20 09:48:48
  • 수정 2015-08-20 13: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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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 18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19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냈다. 20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당신은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21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22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여러분은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합니까? 23 ‘당신은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시오.’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쉽습니까? 24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여러분이 알게 해 주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당신에게 말합니다. 일어나 당신의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시오.” 25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26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루가 5,17-26)



예수의 활약을 루가는 갈릴래아(루가 4,14-43), 유다(루가 4,44-9,50), 예루살렘(루가 9,51-19,28) 세 곳으로 차례로 소개한다. 루가가 대본으로 참조한 마르코 2,1-12와 달리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가파르나움이 아니라 유다 지방 어느 마을로 17절에서 암시되었다. 예수가 다시 가파르나움으로 갔다는(마르코2,1) 구절은 빠졌다.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새 그룹 바리사이가 루가복음에 오늘 처음 등장한다. 여러 논쟁하는 이야기가 있는 루가 5,17-6,11에 바리사이는 네 차례 나온다. 예수가 다시 가파르나움으로 갔다는(마르코2,1) 구절은 빠졌다.


예수는 그곳을 영원히 떠났다고 루가가 이미 썼기 때문이다.(루가 4,42-44) 바리사이와 율법학자가 동시에 언급된 것은 예수에 대한 소문이 예루살렘까지 퍼졌다는 것을 독자에게 알려주고 있다.


예수는 어느 집 실내에 있던 것 같다. 18절 평상kline은 마태오도 같이 쓴 단어지만, 마르코는 krabattos라는 단어를 썼다. 잘 때와 아플 때 몸을 누일 수 있는, 다리가 있고 등을 놓을 수 있는 침대를 가리킨다.


krabattos는 그리스 문헌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 단어다. 19절에서 루가는 각목과 진흙으로 엮은 평평한 지붕이 있는 근동식 주택이(마르코 2,4) 아니라, 벽돌과 돌판, 기와로 만든 그리스 로마식 주택을 생각한 것 같다.


20절에서 믿음은 예수의 치유 능력을 신뢰하는 태도로 설명되고 있다.(루가 7,9; 8,48; 17,19) 놀랍게도 예수는 치유하는 말이나 행동은 전혀 하지 않고 죄사함을 말하고 있다. 예수에게 죄사함을 들은 환자는 18절의 중풍환자와 루가 7,36-50에 나오는 여자(루가 7,36-50)뿐이다.


죄사함은 오직 하느님의 영역이다.(이사야 44,22; 사무엘하 12,13) 예수의 말은 그러나 레위기 24,15에서 언급된 하느님 모독에 해당되진 않는다. 유다인에게 신성모독은 하느님 이름을 발음할 때 해당된다.


22절에서 마치 하느님을 닮은 예수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사람 마음속에 숨겨진 생각을 아는 것은 공동성서(구약)에서 하느님에 속한 특징이다.(사무엘상 16,7; 시편 94,11; 139,2) 예수의 치유 능력은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었고, 예수는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초대교회의 믿음이 드러나는 단락이다.


죄사함의 능력은 특히 사람의 아들에게 속해있다는 표현은 유다교 문헌이나 그리스도교 전승에 없고, 이 구절에만 있다. 26절 신기한 일paradoxa는 신약성서에서 여기에만 있는 단어다. 예수 자신이 스스로 사람의 아들이라고 확신했는지에 대해 성서학자들의 의견은 여전히 분분하다.


오늘 이야기가 어떻게 생겼을까. 예수의 치유 능력을 증언하고 가르치던 초대교회 교리교육과 설교에 배경이 있는 것 같다. 당시 유다교와 예수의 죄사함을 두고 벌이던 논쟁도 또 다른 배경이다.


루가복음이 쓰이던 당시 바리사이파는 유다민족을 지도하고 초대교회를 공격하던 그룹이었다. 루가복음에서 바리사이는 예수의 갈릴래아, 유다 지역 활동에만 나타나고 예루살렘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예수와 바리사이의 논쟁은 하느님, 메시아, 율법에 대한 종교적 주제를 두고 벌어졌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바리사이에 대한 비판은 크게 줄어들었다. 바리사이와 초대교회는 부활신앙을 공유하고 있었고, 루가는 바리사이의 회개를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바리사이 부분을 볼 때 예수와 바리사이 논쟁보다 초대교회와 바리사이 논쟁을 생각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예수는 병을 고치고 가르쳤다. 치유는 병을 없애는데 그치지 않는다. 환자를 위로하고 사회적으로 복권시키고, 병을 낳는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도 담겨 있다. 가르침은 모르는 것을 새로 알려주는데 그치지 않는다.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올바로 고쳐주고, 사람을 속이는 언론, 교육, 종교의 거짓을 폭로하는 일도 포함한다. 예수의 가르침은 종교적 의식화교육을 넘어서 사회 현실을 정직하게 보도록 해준다. 나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지만, 좋은 종교는 각성제다. 나쁜 종교인은 사기꾼이요 장사꾼이다. 착한 목자는 예언자요 순교자다.


예수의 치유 이야기, 죄사함 이야기를 볼 때 우리가 주의할게 있다. 치유와 죄사함이 개인 차원에서만 해석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치유와 죄사함은 당사자 개인을 넘어 하느님백성의 차원에서 하느님나라 시각에서 넓게 보아야 한다. 하느님나라를 망각하고 죄사함에 집중하는 그리스도교의 옹졸한 지금 분위기를 볼 때, 이 주제는 더 강조하고 싶다.


죄사함 또는 용서는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의 희생 덕분이다. 그러나 용서는 인간의 회개 없이 제대로 실현될 수 없다. 하느님이 내 죄를 용서하신다 해도, 나는 내 죄를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필요하다.


돈과 권력이 있으면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 사회 풍토는 크게 잘못되었다. 공정하지 않은 사법부가 있는 곳에서 죄와 용서가 제대로 인정될 리 없다. 큰 죄 저지른 권력자와 부자에게 이해할 수 없이 너그러운 종교가 있는 곳이야 더 말해 무엇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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