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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대문 문간방에' 좌판을 벌이신 교황님
  • 전순란
  • 등록 2015-07-16 15:4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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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14일 화요일, 맑음


‘네비’가 제 아무리 깡통이기로서니 주소가 아니면 도무지 갈 곳을 모를까?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을 주소로 쳐야만 가겠다니 말이 되는가? 그 공항이 ‘번지 없는 주막’도 아니고 말이다. 미루씨 부부를 데리러 아침 일찍 공항으로 가다가 혹시 몰라 카르멜라에게 전화해서 공항 주소를 물었더니만 ‘공항’이면 되지 왜 주소를 묻느냔다. “에라 모르겠다. 옛날 가락으로 가보자.”며 운전을 했더니만 하도 많이 간 길이어서 기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기억을 더듬어 살아가는 게 사실 인생이다. 스테파노라는 신부님이 계시는데 다른 곳에 오래 계시던 분이라 “우리 집에 가야지 내가 왜 여기 있어?”라면서 사라지곤 하는데 집에서 없어졌다 하면 그곳에 가 있단다. 


나이 많은 이들이 많아서 몇몇 공동체에 나누어 상주시키는데 이 집만 해도 아흔이 다 된 루이지 신부님, 죠반니 신부님, 문지기 주교님이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현존하시면서 젊은 회원들의 모범이 되고 허드렛일을 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루이지 신부님은 꺾인 목을 하고 늘 책을 읽고 묵상을 하고 기도하는 모습이 너무도 거룩해서 곁을 지나가기 힘들 만큼이다. 청소년을 위해 청춘과 일생을 다하던 분들이지만 옛 추억일랑 고이 간직하고 뉘엿뉘엿 져가는 햇살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삶을 마감하는 정경을 본다.


8시 15분에 도착한다는 비행기인데 열두 시간의 비행에 밀라노 공항 로비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어 지칠 대로 지쳤을 만한 사람들이 나를 보자마자 기운이 난단다. 그래서 카타콤바에 짐을 내려놓자마자 바티칸으로 달렸다. 보스코는 은사 파리나 추기경님 예방이 있어 카타콤바에서 직접 바티칸으로 간 길이다.




우리가 바티칸에 도착한 것은 11시여서 차수녀님을 만나면서부터 오늘의 일정에 들어갔다. 바티칸 안에다 차를 세우고 마음 놓고 활보하니 그렇게나 마음이 편할 수밖에.... 보스코랑 우리 넷이서 차수녀님과 성수녀님을 모시고 중국집에서 서둘러 점심을 먹었다.




원래 오후 1시에 보스코의 국무원장(총리) 예방이 잡혀 있어 일행 전부가 집무실로 올라갔다. 성베드로 성당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선  검문소를 지나 '청동문'으로 해서 널따란 계단과 복도로 올라가 '산다마소 광장'에 이르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교황궁 2층 국무원장관에 내려 대기실로 안내받아 들어갔다. 산다마소에서는 경호원이 보스코를 기다리다 우리를 접견대기실까지 안내하고 내려갔다. 몇 개의 방을 어떻게 거쳤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이니 교황님 집무실까지 열두 대문을 거쳐야 한다던 보스코의 말이 맞다. 


교황님이 아예 산타 마르타, 그러니까 바티칸 행랑채에다 거처를 정하신 까닭을 알 만하다. 최고급 백화점과 쇼핑센터를 마다하고 서민들의 재래시장에 좌판을 벌이신 셈이다.



마지막으로 '조약실(條約室 Sala dei Trattati)이라 불리는 방에서 차례를 기다리다 보니 전근가는 교황대사들 한 무리가 국무원장 방에서 나오고, 마지막으로 로마 총대리 추기경이 나오고,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다. 


보스코와 안면이 있어 반가이들 인사를 나누곤 한다. 파롤린 추기경은 외무차관부터 우리와 친숙했던 분으로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고 교황님 묵주도 선물하고 기념촬영에도 응해주었다. 회담은 보스코와 둘이서만 이루져서 무슨 일로 담화를 했는지 모를 일이다.





요담을 마치고 물러나 교황님이 미사를 집전하러 내려가시는 통로로 성베드로 성당에 들어가 참배와 관광을 겸하고, 지하 묘소에서 역대교황님들의 묘소를 참배하고, 바티칸 슈퍼에서 장을 보고, 코만디니 성물점에 가서 귀국시의 친지들에게 줄 선물을 사고 나서 숙소인 카타콤바로 돌아왔다.



저녁식탁에서 살레시오 신부님들의 환대를 받으며 신부님들 사이에 앉은 미루씨 부부의 얘기도 통역해 주면서 즐거운 식사를 하였다. 저녁 산보길에 나섰으나 워낙 피곤해진 두 사람은 일찍 잠자리에 들고 아랫집에 가서 한참 쟌카를로 신부님과 말벗을 하다 돌아왔다. 


당신이 40년 걸쳐 가꾸신 정원의 소나무 밑에 앉아 어둠 속에서 명상에 잠긴 신부님은 머지 않아 당신의 영원한 저녁,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표현을 따라 "해넘이가 없는 저녁"을 맞을 차비를 하는 모습이 석상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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