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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남미 순방을 돌아보며
  • 이상호 편집위원
  • 등록 2015-07-17 09:57:39
  • 수정 2015-08-13 11: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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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부터 12일까지 프란치스코 교황을 따라다닌 남미 3개국 순방은 7박 8일간의 행복한 여행이었다.


교황을 따라 에콰도르, 볼리비아, 파라과이를 차례로 돌면서, 그의 강론과 연설을 듣고, 그의 행동을 보는 동안(물로 그것은 외신이 전해주는 활자와 동영상이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더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어 좋았다) 가마솥 같은 더위조차 그다지 뜨겁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행동 하나 하나가 너무 뜨거웠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것은 무더위를 식히는 한바탕의 억센 차가운 소나기이기도 했다.


지난해 교황을 가까운 곳에서 본 경험이 있어, 이번 남미 순방이 어떠하리라고는 미리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가 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 못했었다.


교황은, 왜 그가 그렇게 사랑 받는 동시에 경계의 대상이 되고 있는지를 이번 남미 순방에서 여실히 보여줬다.


교황의 말은, 그것이 강론이든 연설이든 간에,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준비되고 계산된 것이었다. 어느 하나 그냥 허튼 것이 없었다. 그 장소와 그 시간에 꼭 있어야 할 말이었다.


교황은 참으로 많은 말을 했다. 그의 전문분야이기도 한 분배와 사회정의, 그것이 구체화된 현 경제 시스템은 말 할 것도 없고, 최근 발표한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의 주제인 환경 문제를 거쳐 정치, 사회, 종교, 가정, 여성, 역사 등 건드리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로 광범위했다.


그런데, 교황의 말을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들으면, 금방 ‘아하!’하고 무릎을 치게 된다.


한 종교의 최고 수장으로서, 정신적 지도자로서,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일반적인 ‘좋은 말씀’은 결코 없었다. 그 장소와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말만을 골라서 했다.


그 장소에 사는, 그 사람들이 가장 아파하는 곳을 정확히 알아내 어루만졌다. 가려운 곳을 정확히 긁어줬다. 그래서 교황의 말은 ‘맞춤형’이었다.


교황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남미의 땅과 그 땅 위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이 그대로 눈앞에 떠오른다.


그러다보니, 눈물을 흘리며 환호하는 사람이 물론 대다수였지만, 불만을 갖고 불평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2,000년 전 예수도 그랬을 것이다. 예수는 유대교인 이었지만, 유대 경전을 때와 장소와 관계없이 문자 그대로 말하거나 적용 시키지는 않았다.


아니, 가장 기본적인 계율을 어기기까지 했다. 이를 지적하고 비난하는 ‘경건한’ 사람들에게 한 예수의 답변은 “안식일을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였다.


아무리 좋은 말도, 훌륭한 행동도 때와 장소에 맞아야 그 가치가 제대로 드러나고 기능한다.


예수의 말과 행동이 그랬고, 지금 교황이 그렇다. 그래서 예수의 참 뜻을 제대로 이해하자면, 그 시대를 우선 잘 이해해야 한다. 교황도 마찬가지다. 역사적 예수이고, 역사적 교황이다.


교황은, 귀국 기내 기자회견에서 밝혔듯이, 그에 대해 적지 않은 불만과 비난과 비판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남미를 순방하는 교황으로서 꼭 해야 할 말이기에 아무런 거침이 없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교황은 첫 방문지 에콰도르에서, 남미는 아직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다.


남미 대륙의 국가들이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데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희생이 가장 컸고, 그에 대한 보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의미다.


이어 헐값으로 팔리는 남미의 풍부한 자원과 값싼 노동력이 이제는 제 값을 받아야 한다며, 지구자원 접근에 이익이 아닌 평등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정의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이는 어려운 경제상황을 맞아 개발과 보전 사이에서 곡예를 하고 있는 현 정부에 대한 충고이자 경고이기도 했다.


성직자들에게는 영적 치매에 빠지지 말라고 수장으로서 훈계했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왔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을 결코 잊지 말라는 것이다. 이 지역에서 가톨릭이 점차 쇠퇴하고 있는 데는 성직자들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점을 경고한 것으로 읽힌다.


두 번째 방문국인 볼리비아는 남미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에 속한다. 교황은 지난해 바티칸에서 개최했던 대중운동세계회의를 이곳에서 열고, 세계경제의 구조적 변화와 더 나아가 새로운 질서를 요구했다.


교황은 그 이유로 예수를 들었다. 현 경제 시스템이 예수의 의도와는 반대로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뜻이 그러하니, 정말로 심사숙고하기 바란다는 강한 주장이다.


그래서인지, 이날 교황의 발언을 두고 일부 언론에서는 ‘혁명’이라고 까지 표현했다. 그 만큼 그는 볼리비아로 대표되는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어루만지고 위로했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변혁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권리를 3L 권리-노동(labor), 주택(lodging), 토지(land)-라는 한 단어로 표현해, 듣는 사람들의 마음과 머리에 단번에 쏙 박히도록 했다.


만일 교황이 이런 말을 유엔 총회나 바티칸에서 했다면, 과연 이토록 감동적이었을까?


세 번째 방문국인 파라과이에서는 민주주의론을 꺼냈다. 교황은 공항에 내리자마자 현재 파라과이의 민주주의를 앞으로 수년간 더욱 견고하고 안정되게 만들어야 한다면서, 형식적 민주주의에 만족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파라과이 대통령에게 충고했다.


파라과이 방문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내정 간섭’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아주 민감한 정치 이야기로 시작했다.


파라과이가 지난 60년간 겪어온 쿠데타와 장기 군사독재, 인권 유린 등 쓰라린 역사적 경험 때문이다.


파라과이 대통령은 실업가 출신의 우파다. 그래서인지, 교황은 이번에는 이익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인 경제 만들기는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1607년부터 150년간 지속된 예수회 선교사들의 ‘선교촌’ 역사를 자세히 설명했다.


교황은 파라과이에서 여성들을 여러 차례 높이 칭송했다. 앞뒤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인사치레 정도로 들릴지 모르나, 무수히 많은 남성들이 전사한 파라과이 역사를 알면 역시 고개가 끄떡여진다.


빈민가를 찾아서는 연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잘라 말했다. 연대야 말로 빈민들에게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실업인들 앞에서 이 말을 했다면 어땠을까.


더욱이 교황은 이런 말들을 아주 쉽고, 직설적이고, 직접적이며, 분명하게 했다. 에둘러 말하거나.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될 수도 있게 애매하게 말하지 않는다. 명확하다.


그의 말은 한 마디로 돌직구다. 그래서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차지도 않으니 입에서 뱉어버리겠다는 성경 말씀이 절로 떠오른다.


현대의 물신주의를 ‘금송아지 숭배’, ‘경제 독재’ 등으로 표현하다 이번에는 ‘악마의 배설물’이라는 그 옛날 신앙의 선배가 했던 말을 인용하는 등, 그 단어만 들어도 그 내용을 훤히 알 수 있도록 그는 말한다.


또 성경을 자유자재로 인용하는 데, 그 해석이 신선하다. 자신의 체험과 깊은 사고, 관상에서 나온 ‘자기 것’이기 때문이다. 카나 혼인잔치, 예수의 제자 파견 등에 대한 교황의 설명은 그래서 권위적이고, 금방 와 닿는다.


게다가 시적인 표현도 종종 끼어든다. 인간의 존엄성을 설명하면서, 식탁 위엔 빵을 놓고, 아이들 침대 위엔 지붕을 얹고, 그들에게 건강과 교육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교황의 말은 그 자체가 바로 사회교리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경우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잘 모를 때에는, 교황이 어떻게 했는지를 떠올리면 된다. 일주일 내내 교황 기사를 읽으면서 내린 결론이다.


이런 경우엔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행동해야 되는구나. 복음에 따라, 예수의 행적에 비추어서 말이야. 그런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면서 교황은 참으로 공부를 많이 하고, 생각을 깊이 했구나 하고 확신했다. 어지간히 깊이 파고들어 연구하고 고민하지 않았으면 결코 나오기가 힘든 그런 언행을 아주 자연스럽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정확한 말을, 확실하게, 분명히, 자신 있게 할 수가 있었다.


문득 우리의 경우로 생각이 돌았다. 교황이 지난해 방한 때 세월호와 관련해 제의에 노란 리본을 달고, 가족들을 위로한 것은 그냥 벌어진 것이 아니라, 사전에 많은 공부와 생각을 거친 결과임이 분명할 것이다. 게다가 교황은 몇 달 후 한국 주교단의 방문을 받고 첫 마디로 세월호에 대해 물었지 않은가.


그런데 거리미사, 시국미사가 한창 이슈가 됐을 때, 한국 교회의 수장인 추기경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서 질문을 받거나 그렇게 애매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일부에서 말하는 대로 ‘수정주의자’여서 그런가. 또 왜 지난번 바티칸 방문 때 교황이 세월호를 물었을 때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을까. 교황은 미리 준비한 원고를 옆으로 밀어놓고 즉문즉답을 잘도 하던데.


한 기자가 교황청 대변인에게 물었다. 이번 교황의 남미 3개국 방문에서 가장 중요한 공통분모는 무엇인가? 파라과이 아순시온에서의 마지막 기자 브리핑 때였다.


이에 대한 대변인은 오래 생각하지 않고 거의 즉시 대답했다. 그런데 그 대답이 아주 특이했다.


정의와 평화에 대한 호소,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보호, 부패와 싸우라는 지도자들에 대한 요구 등 쉽게 떠오를 수 있는 이런 종류는 답이 아니었다. 교황의 모든 사람들에 대한 포용력도 물론 아니었다.


대변인의 답변은 아주 간단했다. 그것은 남미 3개국 사람들이 보여 준 압도적인 참여와 따뜻함이었다.


이 대답을 듣고 바티칸 라디오 기자는 이렇게 썼다. 유럽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고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이곳에서 보니 교황에 대한 사랑은 진짜로 넘쳐흘렀고,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이번 교황 방문을 하나로 꿰는 단어는 ‘기쁨’(JOY)이었다. 이는 단적으로 이들 3개국 언론의 기사 제목에서 잘 알 수 있다. 에콰도르는 ‘기쁨으로 복음화를’, 볼리비아는 ‘프란치스코 교황과 함께, 우리 복음을 선포합시다’, 파라과이는 ‘교황 프란치스코 : 기쁨과 평화의 전달자’였다.


교황이 방문한 3개국은 가난했고, 정복과 갈등 그리고 독재로 황폐화 됐다. 정치적 불안의 시기를 경험했고, 좀 더 많은 평등과 환경보호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이다.


이런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교황의 메시지는 희망의 큰 원천이라고 바티칸 라디오 기자는 설명했다.


교황을 보려고 길에 나와 서있던 한 여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교황이 여기에 기적을 가져다주리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나는 교황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교황은 귀국 기내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놀라움을 또 보여주었다.


그는 왜 세금을 꼬박꼬박 내고 있지만,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하고 있는 중산층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먼저 자신의 ‘잘못’이라고 했다. 교황이, 물론 이 경우는 아니지만, 아직도 무오류성이 살아있는 교황이, 너무나도 쉽게 자신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그리고는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에 집중하다보니 그렇게 됐다면서, 앞으로는 중산층에 대해서도 공부를 하겠다고 말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자신의 경제 비판에 대해 미국에서는 적지 않은 반발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이 역시 오는 9월 미국 방문 전까지 공부하겠다고 말했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높은 사람, 그것도 최고로 높은 사람은 스스로 공부하기 보다는 밑에서 써 준 대로 읽거나 말하면 되고, 잘 모르거나 막히면 담당자에게 물어보라고 미루는 장면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보니, 참 놀랍고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충격이었다.


아, 그래서 개신교도인 이재명 성남시장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황 역사상 아마 가장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고 말했구나,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놀라운 것은 또 있다.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이 선물로 준 망치와 낫 모양의 나무 십자가상에 대한 교황의 태도다.


교황은 이 십자가상을 디자인한 예수회 사제 루이스 에스피날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며, 이 선물은 전혀 불쾌하지도 않고, 저항 예술로 보고 있으며, 바티칸으로 가지고 간다고 밝혔다.


같은 경우는 아니지만, 교황은 지난해 한국 방문 후 귀국 기내 회견에서 세월호 관련 기자 질문에 “고통 앞에는 중립 없다”라는 답변으로 모든 논란을 일시에 잠 재웠듯이, 이번에도 역시 그랬다.


이 십자가상을 두고도 언론별로 논조가 조금씩 달랐다. 보수 성향에서는 공산주의와 연계시키는 정치적인 해석과 볼리비아 대통령의 무례, 가톨릭 보수층의 당혹감 등을 주로 앞세웠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투쟁에서의 협력, 소통, 대화 등으로 해석한 언론도 있었다.


상당 수 매체들은 일부에서는 교황이 이 선물을 받고는 당혹해하면서 즉시 돌려줬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촬영한 동영상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교황은 별로 표정의 변화가 없었고, 선물을 받고 대통령과 이야기 한 후 다시 선물을 볼리비아 관계자에게 건넸다. 그런데 이것은 선물을 반납한 것이 아니라, 선물을 받고 살펴본 후 잘 보관하라고 다시 돌려준 것이다. 보통 그런다. 그래서 바티칸으로 가지고 간 것이다.


여하튼 오는 9월 교황의 쿠바와 미국 방문이 몹시 기대된다.


교황은 중산층에 대해, 또 교황의 세계경제 비판에 대한 미국 반발에 대해 공부하겠다고 공언했다.

교황의 공부 결과가 어떨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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