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성심 대축일(2023.6.16.) : 신명 7,6-11; 1요한 4,7-16; 마태 11,25-30
예수 성심 대축일의 전례적 취지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지낸 다음 금요일인 오늘, 교회는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냅니다.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던 요일은 목요일이었지만 바로 이때 이 십자가의 신비를 앞당겨서 당신의 몸과 피에 일치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십자가에 달리실 당신의 몸을 빵에 일치시키시고는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하고 말씀하셨고, 당신의 몸에서 흘리실 당신의 피를 포도주에 일치시키시고는 “받아마셔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흘릴 내 피다.” 하고 말씀하셨으며, 이 두 마디의 말씀 끝에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하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금요일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몸은 우리를 기르시는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셨고, 피는 우리를 일치시키시는 생명의 물로 내어주셨습니다.
무엇을 기억하고 행할 것인가?
여기서 말씀하신 바, 그분에 대한 기억은 공생활 동안 행하신 수없이 많은 일들을 기억하라고 하신 말씀이지만 그 초점은 그 일들에 담긴 그분의 마음을 기억하라는 데 있었습니다. 또 그분이 행하라고 명하신 것들 역시 일차적으로는 그분이 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두고 하신 말씀이지만 그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도 그 핵심은 그분의 마음을 닮는 데 있습니다.
마음을 기억하지 못하고 마음을 닮지 못하면, 일에 대한 기억과 행함은 반쪽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성심 대축일이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마무리하는 전례로 자리잡은 것입니다.
파스카 과업을 위한 예수 성심
이렇게 예수 성심을 닮고자 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정작 기억하고 계승해야 할 일들은 모두 파스카 과업을 위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파스카 축제일에 맞추어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드시고 이 자리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루카 22,15). 예수님의 마음이 이토록 간절했던 까닭은 그분이 공생활 동안 파스카 과업으로 행하신 그 수많은 일들을 바야흐로 당신 제자들에게 당부하고 물려주어야 하셨기 때문인데, 이는 다섯 가지로 추려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령께서 당신을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고 천명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건 사십 주야 단식을 사탄의 유혹 속에서 무사히 마치시고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오셔서 회당에 모인 마을 사람들 앞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통해 당신의 소명을 공개적으로 천명하셨고, 이 말씀 안에 예수 성심의 큰 줄기가 담겨 있습니다.
둘째, 그 말씀대로 실제로 가난한 이들을 찾아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사두가이와 바리사이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대놓고 무시하고 억압하며 착취하던 그 가난한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기쁨과 웃음과 행복을 나누어주셨고, 위로와 치유와 안식을 선사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창조주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시던 그 정성으로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세상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아 장차 교회를 이룰 주춧돌을 마련하시고 본격적으로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 이 파스카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준비를 해 놓으셨습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만나신 가난한 이들은 대부분 고통을 달고 사는 이들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커녕 지옥과도 같은 고통의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즉, 육체적인 질병이나 장애 또는 정신적인 아픔으로 고통받고 있기도 했고, 무시당한 나머지 극심한 소외감으로 억눌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들을 치유해 주시기도 하고 위로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이 치유와 위로의 복음선포 과정에서 숱한 기적들이 일어났고 지옥과도 같이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해방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눈먼 이가 보기도 하고, 앉은뱅이가 걷기도 하였습니다. 나병이나 중풍을 앓던 이들이 깨끗하게 낫기도 했습니다.
또 자식을 잃고 슬퍼하던 어버이들을 보고 함께 슬퍼하시던 그분은 죽을 지경으로 위독하거나 심지어 이미 죽은 아들딸들을 다시 살아나게도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복음을 듣고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체험하게 된 이들은 기꺼이 새로운 하느님 백성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고, 이들이 교회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넷째, 이러한 예수님의 복음선포 활동을 반대하고 방해하려 한 세력들은 사두가이나 바리사이 같은 사람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자들의 배후에서도 사탄이 조종하고 있었거니와,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유다 광야에서 그분을 유혹하다가 실패했던 바로 그 사탄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분은 피하지 않으시고 정면으로 맞서셨으며 쫓아내셨습니다. 그리하여 마귀에 들렸던 많은 이들이 해방되어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이런 구마의 복음선포는 역대 어느 예언자들도 하지 못하던 기적이었는데, 적반하장 격으로 종교 지도자들은 마귀의 편에 서서 그분이 마귀들렸다고 모함을 해 댔습니다.
다섯째, 좀처럼 알아듣지 못하던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지방을 벗어나 전국 방방곡곡과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인 마을에까지 그들을 파견하시어 당신이 하시던 복음선포 활동을 사람들 안에서 하게 되자, 함께 하시던 성령의 도움으로 많은 것을 깨닫고 터득했습니다. 한 번은 열두 명, 또 다른 한 번은 일흔 두 명을 파견하여 그렇게 하셨습니다.
물론 똑똑하다고 자부하던 바리사이들이나 권세를 부리던 사두가이들은 스승도 무시했던 판에 그 제자들이 선포한 복음을 받아들일 리가 없이 거부했지만, 도처에서 이 복음을 받아들인 토박이 지지자들이 생겨났고 예수님께서는 귀환한 제자들의 이러한 보고를 받으시고 매우 이례적으로 성령에 가득 차서 기뻐하셨습니다. 땅에 묻혀 있던 보물을 발견한 농부의 심정이나, 잃었던 은전을 되찾은 여인의 심정으로 기뻐하셨고, 이처럼 복음이 실현된 새로운 세상을 기뻐하는 마음을 제자들도 함께 간직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새 세상을 위한 누룩과 겨자씨
이러한 다섯 가지 파스카 과업의 특징 안에 예수 성심이 담겨 있습니다. 이 마음을 알아보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한 이들이 제자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이루었고, 이 교회가 새로운 인류의 누룩이자 겨자씨가 되었습니다.
예수 성심으로부터 기운을 받아 영적 광합성 활동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산함으로써 새로운 인류가 숨을 쉬고 있으며, 식물이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희생으로 바치는 애덕 행위들 덕분에 세상의 부패가 방지되고 있는가 하면, 영적 광합성 활동으로 이룩해 낸 영성으로 인류 문명을 이끌어나갈 진리의 빛과 정의의 힘과 그리고 사랑과 평화의 기운을 채워주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 성심이 새로운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셈입니다.
요컨대, 오늘 제1독서인 신명기 7장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예수 성심과 이를 섬기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며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수효로가 아니라 그들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기운으로 그 존재이유를 삼습니다. 그런데도 이 길을 막아서는 자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친히 대적하실 것이고 그 결과는 죽음이요 멸망뿐입니다. 죄악을 저지르는 자들을 하느님께서 직접 갚으실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이 심판의 역할을 맡아서 하려고 들 필요가 없고, 오로지 하느님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를 지키는 데 충실하면 됩니다.
또한 오늘 제2독서인 요한 1서 4장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이 계명과 규정과 법규는 사랑과 자비의 지도입니다. 이 지도를 따라서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믿고 알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사랑의 빛을 비추어주고, 사랑의 힘을 나누어주며, 사랑의 영성으로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인 마태오 복음 11장에 비추어 보면, 사랑의 복음을 선포하는 활동의 결과로 되찾은 이들을 두고 기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복음을 알아보거나 알아듣지 못하고 거부하는 자들에게 마음을 두지 말고, 오로지 보잘것없는 이들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과 그 이름이 드러나는 것만을 기뻐하며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안식과 평안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이들에게 안식을 주신 예수 성심
이러한 지향과 마음을 지니셨기에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보기에 고달픈 복음선포 활동을 하시면서도,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 모두 당신에게 오라고 초대하셨습니다. 그들 모두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장담까지 하셨습니다. 당신의 멍에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데도, 그 멍에를 메고 당신에게 배우라고 큰 소리를 치기도 하셨습니다. 그분의 이 장담과 큰 소리가 빈 말이 아님을 우리가 믿는다면, 복음을 선포하고 난 다음의 성과에 집착하기보다는 그분처럼 하느님께 되돌아온 가난한 이들을 두고 함께 기뻐하는 그 마음을 우리가 배워야 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인간은 하느님께서 가장 정성껏 지어내신 피조물이며, 그분을 닮도록 창조된 자녀로서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무신론 풍조에 물들어버린다면, 우리를 낳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 앞에서 우리 자신은 부모 없이 스스로 태어났고 우리 힘으로만 컸다고 우기는 꼴이 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