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0주간 수요일(2023.6.14.) : 2코린 3,4-11; 마태 5,17-19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확신을 피력합니다. 이 확신은 돌판에 십계명을 새겨 넣은 모세의 직분도 영광스러웠지만, 마음에 성령을 부어 넣는 사도의 직분은 훨씬 더 영광스럽다는 자부심에 근거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는 도구로 쓰여진다면 십계명이라는 율법도 사람을 살리는 은총의 도구로 거룩하게 변합니다.
이런 이치에서 예수님께서는 막연히 율법을 백안시하지 말라고 경고하시며,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사랑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아주 작은 계명이라도 어기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작아 보일 뿐 하느님의 법에 속하는 계명이라면 하느님의 크신 은총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에 가장 작은 계명이라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성장하는 데 있어서도 동식물의 성장 과정에서 발견되는 최소량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독일의 화학자이자 비료의 아버지라 불리는 유스투스 폰 리비히(Justus von Liebig, 1803~1873)는 모든 동식물은 최소량의 법칙에 따라 성장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생장에 꼭 필요한 어떤 원소가 최소량 이하로 투입되는 경우에 다른 원소들이 아무리 많이 주어져도 그 생명체는 성장하지 못하고 가장 적게 투입되는 원소의 양에 따라 성장과정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주 적게 필요한 원소라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를 실험으로 보여주는 물건이 리비히의 물통입니다.
여러 개의 나무판을 세로로 잇대어 만든 나무 물통이 있을 때, 그 물통에 채워지는 물의 양은 가장 낮은 나무판의 길이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래서 물을 더 담으려면 가장 짧은 나무판의 길이를 늘려주어야만 합니다.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산성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나, 친교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잘 하는 구성원을 활용하는 방안을 고민하기보다는 가장 처지거나 취약한 구성원의 사기를 어떻게 끌어올리느냐 하는 문제가 공동체의 생산성과 친교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군대나 기업 같은 세상의 크고 작은 집단이나 조직에서만이 아니라 교회의 크고 작은 공동체들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수제자의 배신은 나중에 찾아가서 해결하셨지만,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신은 그가 결행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스럽게 지켜보시며 기다리셨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세 가지 양식, 즉 말씀과 성찬과 사랑 가운데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하지 말고 이 세 가지의 균형을 회복하라고 권고하였습니다.
특히 세 번째 현존양식인 사랑은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 같이 막연히 보편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것이고, 그 사랑의 정도는 함께 가난의 어려움을 나누어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정도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흔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은 교회 활동 전체나 신자 개인의 신앙 활동에 있어 아주 적은 부분을 차지하기 마련입니다. 더군다나 대개는 가난의 어려움을 삶으로 나누기보다는 돈으로 도와주는 자선으로 해결하려 들지요.
그런데 삶으로 나누든 자선으로 나누든, 이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랑의 작은 몫이 교회 전체 사목 및 선교 활동이나 신자 개인의 신앙 활동의 성숙도를 좌우합니다. 즉, 최소량의 법칙이 여기에도 작용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져야 할 사랑의 몫이 소홀히 되는 한 전체 교회 영성의 성숙이나 개인 신앙의 영성이 성숙되기는 애시당초 불가능합니다. 그것이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에서만이 아니라, 교회의 역사에서 여실히 입증된 진리입니다.
로마제국의 영광과 권세를 가톨릭교회가 취하고자 했을 때, 가난한 이들과 가진 것을 나누던 교회는 세속의 권력과 다투는 경쟁자가 되고 말았고 브루노나 루터 같은 반항아들에게는 화형을 시키거나 파문을 시키는 박해자가 되었으며, 비판자들에게 수세기 동안이나 종교재판을 해 온 흑역사(黑歷史) 또한 두고두고 역사에서 지적받는 주홍글씨가 새겨지고 말았으니, 이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나누어준 전통을 잊어버린 데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초대교회에서는 보편 초대교회와 동일한 기적 현상이 재현되었었습니다. 비록 박해를 받고 쫓기는 신세로 심산유곡에 초라한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으나, 치명을 불사할 정도로 신앙의 기개는 살아 있었고 민족을 하느님 백성으로 봉헌하겠다는 진리의 깨달음이 한국교회의 빛나는 유산으로 남았습니다.
교우 여러분!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쳐온 증인들이 순교성인과 복자 그리고 무명의 치명자들이었습니다. 고문의 고통에 못 이겨 입술로 배교한 이들과 치명자의 후손들이 바로 이 이치를 깨닫고 순교자를 현양하며 순교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교회도 한국교회밖에 없습니다. 상하지 못함의 은총이 온전히 충만한, 하늘나라에서 큰 교회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