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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 종교 2 (전영의)
  • 전영의
  • 등록 2015-07-15 13:05:50
  • 수정 2015-07-20 15:5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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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엘 신부는 어디 있을까?

-『레 미제라블』 속의 인물들 : (1) 미리엘 주교 -



어릴 적 음악과 미술, 그리고 책을 아주 좋아했던 필자는 집에서 아버지가 씌워준 커다란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었다. 물론 책을 읽을 때는 음악을 듣지 않았는데 그 버릇은 지금도 여전하여 글을 쓰거나 공부하거나 책을 읽을 때에는 조용히 몰두하는 편이다. 부모님을 따라 외출하거나 할머니 댁에 갈 때면 반드시 챙기는 것이 바로 스케치북과 책이었다.


당시에도 방 하나의 삼면이 내가 좋아하는 책으로 가득했으니, 지금의 필자가 있는 것은 바로 부모님의 이러한 지원 때문일 것이다. 그 때 읽었던 많은 책들 중 하나가 『장발장』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된 지금의 『레 미제라블』⑴이다. 어린이를 위해 번역된 책들의 거의 대부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배가 고파 빵 한 조각을 훔친 장발장이 19년의 감옥살이를 하고 나왔지만 자신을 받아주는 곳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한 성당의 신부가 하룻밤을 머물게 해주고 따뜻한 음식도 주었는데도 장발장은 밤에 몰래 은식기와 은촛대를 훔쳐 달아났다.

이를 수상히 여긴 경찰은 장발장을 붙잡아 성당으로 데려 왔는데 신부는 오히려 자신이 은식기와 은촛대를 그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하며 그를 도둑으로 몬 경찰을 나무랐다. 이에 감동받은 장발장은 착한 사람이 되었다.


이 정도의 내용으로만 보아도 『레 미제라블』은 상당히 교훈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원 내용이 무엇인지는 국민 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에, 상당히 두꺼운 장면으로 된 『레 미제라블』을 읽고 나서야 내가 알던 내용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부끄러운 일이나 이것도 『레 미제라블』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프랑스 원서로 된 『레 미제라블』을 읽지 못할망정 번역본이라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1802년 프랑스 브장송에서 태어난 빅토르 위고는 열일곱에 평론지 <르 콩세르바퇴르 리테레르>를 창간하고 1822년 『송가와 다른 시들』을 발표한 출판인이자 시인이다. 1931년 『노트르 담 드 파리』 (Notre Dame de Paris)를 출간하면서 소설가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후에는 프랑스 상원의원으로 선출되면서 문학과 정치를 잇는 교량적 역할도 하였다.



1848년 2월 혁명을 계기로 공화당원이 되면서 루이 나폴레옹과 대립각을 세우고 1851년 나폴레옹 3세의 집권이 시작되자 추방을 당하여 20년 동안 망명생활을 하였다. 이 와중에 아내와 자식들을 잃고 『레 미제라블』을 썼으니, 현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대작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레 미제라블』이 나온 것은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할 수 있다.


오랜 망명 생활 끝에 1870년 파리로 귀환한 그는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1885년 별세하였다. 그의 죽음을 애도한 프랑스 정부는 국장(國葬)으로 그를 예우했으니 그는 당대 최고의 작가 중 한명이라 할 수 있다.


『레 미제라블』은 1832년에 있던 프랑스 6월 혁명과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 그리고 당시 프랑스 민중들의 비참한 생활을 소재로 한 5권의 장편소설이다. 문학인으로서 민중들의 삶과 사회개혁에 관심을 갖고 이를 실천하려는 의지를 보여준 빅토르 위고는 실제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이를 현실로 이루고자 하였다.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시민혁명과 정부군의 대립, 정부군이 시민군들을 진압하는 장면이 우연적으로 삽입된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해방 후 제주 4‧3 학쟁, 여순사건, 한국전쟁, 1960년 4‧19 학생운동과 이후 1970년대에 계속 이어진 학생들의 자유화‧민주화 운동,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등 한국현대사를 생각해 보았을 때 국가폭력에 의해 무고하게, 혹은 민주화를 위해 저항하다가 희생된 사람들은 다 헤아릴 수가 없다.


『레 미제라블』에서 시민군과 정부군의 대립, 이에 희생된 시민군 시신들의 모습은 1980년 광주에서의 일과 오버랩 되면서 데칼코마니처럼 보인다. 이런 이유로 한동안 『레 미제라블』의 전체 내용이 책에 다 수록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책에 따라서 ‘훔친 은촛대와 은식기를 신부에게 선물받고 회개하여 착한 사람이 되는 장발장’, ‘이후 불쌍한 코제트의 엄마를 찾아주려 하나, 어렵게 만난 코제트의 엄마는 죽고, 자신이 양아버지가 되어 코제트를 잘 키우고 죽는 장발장’까지 출간된 소설의 내용은 다양하지만 실제로 작가가 독자들에게 알리고자 했던 것은 바로 부패한 프랑스 왕정을 완전히 끝내고 시민의 인권을 되찾아 복지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사회개혁의지’였을 것이다.


여기에 하나를 덧붙인다면 바로 인간의 죄와 구원에 대한 실천적인 해법을 찾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였다. 『레 미제라블』 뒷부분에서는 ‘시민혁명에 동참했다가 정부군의 진압으로 부상당한 마리우스를 장발장이 하수도를 이용해 피신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이 부분은 시민사회운동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실천의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실천적 행위를 통해 인간의 죄를 스스로 구원하고자 하는 작가의 열망을 나타낸다 할 수 있다.



필자와 마찬가지로 『장발장』 원본 혹은 원본 번역본을 읽지 않은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하여 이번 2화부터는 『레 미제라블』의 인물들을 살펴보면서 소설 속 종교를 살펴보기로 하자.


작가인 빅토르 위고는 『레 미제라블』 첫 부분에 상당히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여 미리엘 주교에 대해 서술한다. 미리엘 주교는 디뉴 지방의 주교이지만 신부가 되기 전에는 엑스 고등법원 판사의 아들이자 법관 귀족 가문의 자제였다.


키는 작달만한 편이나 품위 있고 우아함과 재치를 겸비한 풍채 좋은 이 사내는 열여덟 혹은 스무 살 정도에 결혼도 하였다. 프랑스혁명(1789.07.14.~1794.07.27.)이 일어나면서 프랑스 왕정‧귀족 사회는 붕괴되고 미리엘 씨의 집안은 몰락하였다.


아들이 없었던 미리엘 씨는 이탈리아로 망명을 갔지만 아내는 폐병으로 죽었고 프랑스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사제가 되어 있었다.⑵ 브리뇰의 주임사제였던 그는 이제 노인이 되어 완전한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 초라한 신부는 마을 주민들에게 예하로 불리며 존경을 받는다.


디뉴의 주교가 된 그는 주교관 옆 자선 병원을 방문한다. 스물여섯 명의 환자가 있는 자선 병원은 방이 비좁고 통풍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환자들이 산책할 뜰도 너무 좁으며, 티푸스와 속립열 등의 유행병이 돌 때에는 한꺼번에 환자가 백여 명 이상 생기곤 하였다.


병원의 열악한 상태를 안 미리엘 주교는 자신의 주교관을 병원으로 내어주고 자신의 숙소는 병원으로 옮긴다. 국가에서 받은 15,000 프랑(리브르⑶)의 봉급도 신학생, 전도회, 성(聖) 나자로 회원, 수도회, 종교회관, 어머니 자선회, 감옥 개선 사업, 죄수 위문 및 구제 사업, 부채로 투옥된 가장들의 석방을 위한 사업에 일정액씩 기부하고, 교구 내 빈궁한 교사들의 급료 보조, 구황때 빈민들을 위한 곡식 저장소 보조, 빈민 여성 무료 교육 및 빈민 생활비 보조 등으로 총 14,000 프랑을 사용한다.


정작 주교관에서 사용하는 것은 1,000 프랑이다. 그러나 그는 누이 바티스틴 양과 하녀 마글루아르 부인과 같이 살았으므로 결코 풍족할 수 없었다. 아니 빈곤하였다. 또 주교에게는 사륜마차 비용으로 해마다 3,000 프랑이 지급되었는데 이마저도 자선병원 환자들의 고기스프 비용, 엑스 어머니 자선회, 드라기냥 어머니 자선회, 버려진 아이들을 키우는 고아원에 전부 기부한다.


이러한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막대한 헌금이 들어오지만 미리엘 주교는 어려운 이웃을 위해 돈을 전부 기부한다. 그의 수중에는 항상 돈이 부족하거나 없었고, 오히려 헐벗은 자들에게 자신의 주교복까지 벗어주었다. 이제 디뉴의 사람들은 그를 비앵브뉘(환영하는) 예하라고 불렀다.


미리엘 주교에게는 유일하게 화려한 은촛대와 은식기가 있었다. 손님들이나 사제들이 방문하면 이 화려한 식기들로 식탁을 장식하고 성찬을 대접하지만 평소 자신이 먹는 것은 물에 데친 채소와 기름 스프 즉 트라피스트 식사였다(트라피스트 식사란 극히 검소한 생활을 하는 트라프 파 수도사들의 식사를 말한다). 이런 그는 언제나 사람들을 위해 성당과 주교관의 문을 열어놓았다.


의사의 집 문은 결코 닫혀 있으면 안 되고, 목자의 집 문은 늘 열려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나도 그들처럼 의사가 아닌가? 나 역시 나의 환자들을 가지고 있다. 먼저 그들이 환자라고 부르는 그들의 환자들을 가지고 있고, 다음에 내가 불쌍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나의 환자들을 가지고 있다. (중략) 그대에게 숙소를 달라는 사람에게 그 이름을 묻지 마라, 스스로 이름을 밝히기 거북한 자야말로 특히, 피난처가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평소 이런 글을 써놓고 실천하는 미리엘 주교가 장발장에게 숙식을 제공한 것은 당연하게 보인다. 빵 하나를 훔치고 몇 번의 탈옥을 시행한 이유로 총 십구 년의 형을 언도받은 장발장을 모든 이들은 거부하고 외면한다. 그가 돈이 있어도 사람들은 그에게 숙식을 제공하지 않았다.


출소한 이들이 가지는 노란 통행권은 그에게 이미 주홍글씨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미리엘 주교는 그를 ‘나의 형제’라 부르며 맛있는 음식과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한다. 은식기를 훔쳐 달아나다 경찰에게 붙들려 다시 돌아온 그에게 미리엘 주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 당신이구려, (중략) 당신을 보니 기쁩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이오? 나는 당신에게 촛대도 드렸는데, 그것도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은이니, 200 프랑은 능히 받을 수 있을 거요. 어째서 그것도 그 식기들과 함께 가져가지 않았소?”


이후는 독자들도 알다시피, 주교의 따뜻한 마음과 배려에 감동을 받은 장발장은 ‘은을 정직한 사람이 되기 위해 쓰겠다.’고 약속하고 이후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쯤 되면 생각해 볼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이 시대의 종교인들, 물론 천주교 말고도 개신교나 불교 등 타종교의 성직자들도 있지만 일단 천주교(가톨릭)만 생각하기로 하자.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과 현재의 추기경들은 생활, 종교, 사회 등 여러 면에서 비교가 된다. 필자가 알기로 추기경이나 일반 신부나 월급은 200만 원으로 같다고 들었다(이는 필자가 아는 수녀님에게 2009년에 들은 것으로 혹시 잘못된 정보라면 알려주길 바란다).


김수환 추기경은 200만 원 중 140만 원 정도를 기부하고 자신은 나머지 돈으로 사셨으며, 돌아가실 때까지 오래된 빨간색 경차를 타고 다니셨다. 개인 비서(보좌신부)가 항상 동행했는데 에어컨도 작동이 잘 안 되는 차를 타고 추기경을 보좌했으니 그 역시 여름에는 신체적 고생을 좀 했을 듯싶다.


물론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이지만 신도들은 맛있는 음식이 생기거나 좋은 물건이 생기면 성직자들을 위해 선물을 하는 편이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건 외에도 선물하는 종류는 다양하다. 사람들은 요즘 물가가 얼마나 비싼데 그걸로 생활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묻겠지만 많은 성직자들은 검소하게 생활하는 편이다.


성당에서도 김장은 하지만 신도들이 십시일반으로 가져다주는 김장 김치로 인해 사실 김장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김치가 모이고, 사람들이 안 쓰는 물건(가전, 책, 옷 등등)을 성당에 기부하니 오히려 검소하게 사는 성직자들도 많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이들보다는 상당히 많은 성직자들이 호화롭게 산다는 것이다. 고급 승용차를 몰고 필드에 나가 골프를 즐기는 성직자들(신부)도 상당히 많다. 교구청 소속이 아닌 수도회 소속의 수녀들과 수도회 신부들은 청빈한 삶을 현재까지도 이어오고 있지만, 교황청 산하 한국가톨릭교구에 속하는 신부들 중에는 그렇지 않은 이들도 많이 보인다. 어쩌면 대다수인지도 모르겠다.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은 외면하고 화려한 삶을 즐기는 성직자들에게 사회의 불의와 빈곤의 문제를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인지도 모른다.


1970~80년 민주화운동 시기에 명동성당은 불의에 저항하는 상징적 공간이었다. 데모를 하다가 학생들이 성당 안으로 들어오면, 경찰이나 전경들은 학생들을 잡으러 성당 안으로 진입할 수 없었다. 혹 진입하려해도 “먼저 나를 밟고 가라, 나를 밟으면 사제들이 그 뒤를 지킬 것이고, 사제들을 밟고 가면 수녀들이 지킬 것이며, 수녀들을 밟고 나서야 학생들(시민들)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 김수환 추기경의 일화는 이제 유명하다.


그러나 지금의 추기경 및 대부분의 사제들을 보자. 쌍용 자동차 사건, 강정마을 사건, 밀양 송전탑 사건, 세월호 사건 등 국민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국가가 국익을 앞세워 국민들에게 국가폭력을 휘두를 때, 혹은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자 폭력을 행사할 때 사제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1980년 정의구현사제단에 있던 신부들은 이제 노년의 사제가 되었고 문규현 신부를 비롯한 몇몇 신부와 수녀들, 평신도들만이 그 자리를 지킨다. 미사 도중 연행되는 이들을 보면서, 의자에 앉아 묵주기도를 올리는 수녀님을 연행하는 장면을 보면서, 신부님들의 팔이 부러지고 공권력에 의해 상해를 입어 병원에 누워있는 장면을 보면서 내가 21세기에 살고 있는지, 아니면 1970년대로 회귀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로마를 중심으로 유럽에 뿌리 깊은 영향을 행사해온 가톨릭은 여전히 유럽에서 힘을 갖는다. 대부분 이탈리아계 출신들이 교황으로 선출되는 상황에서 전전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는 첫 슬라브계 교황이었으며 동유럽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고, 세계 평화와 반전을 호소하며, 종교 간 갈등 문제에서는 그 전까지와는 다르게 다소 온건한 태도를 취하였다.


2015년 4월 17일 성인으로 시성된 이분은 겸손하고 소박한 생활로 이전 교황들과는 다른 면을 보여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런 분이 또 계시다. 바로 현 프란치스코 교종(교황)이다. 첫 아메리카 대륙의 예수회 출신, 소위 비유럽권의 비주류 교황이시다. 사실 필자는 이분이 더 존경스럽다.


요한 바오로 2세도 지난 2000년 과거 교회가 저지른 과오에 대해 사과하고 2001년에는 오세아니아 원주민들에게 ‘가톨릭교회가 선교를 내세워 그들에게 행한 유린 행위들’을 사과하는 이메일을 보냈다. 그런데 현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보다 좀 더 직접적인 사과를 한 것이다.


2015년 7월 9일(로마 현지시간) 교황은 ‘그동안 가톨릭교회가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음’을 볼리비아 최초 원주민 출신인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 앞에서 시인하고 정중하게 용서를 구했다.


조직의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직접 용서를 구하는 리더를 찾아보기 힘든 요즘,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런 모습은 당연한 것임에도 신선한 충격이며, 대단한 용기라 생각한다. 이토록 당연한 행동들이 당연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화려한 교황복을 거부하고 하얀 사제복을 입으며, 방탄유리로 된 세단 자동차보다는 소형 자동차를 즐겨 타는 교종, 한국의 추기경들이 사고 당시 팽목항에 들리지도 않고 노란 리본도 달지 않았을 때, 유가족들이 그리 만나달라고 간청해도 외면할 때, 현 프란치스코 교황은 직접 차에서 내려 유가족 중 한 분이었던 김영오씨(유민 아버지)를 만났고 그의 아픔을 어루만졌다.


한국의 추기경이 노란 리본을 다는 것을 거부하고 교황께도 달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을 때에도 그는 직접 자신의 옷 위에 리본을 달고 자신의 모습이 세계에 생중계가 되도록 하였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아픔을 세계인들이 공감하고, 희생된 아이들과 가족들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바랐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어떤 교황보다도 더욱 교종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이유는 교회의 종으로서 인류를 위해 희생하고자 하는 그의 겸손한 태도와 평소 생활에서 몸에 밴 소박함 그리고 겸손한 태도 때문일 것이다. 분명 현재도 미리엘 주교와 같은 분은 어느 나라에건, 어느 지방에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 천주교에서 미리엘 주교와 같은 분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미리엘 주교, 당신은 지금 어디 있는 것인가?




Victor Marie Hugo, Les Miserables, 1862.

빅토르 위고, 정기수 옮김, 『레 미제라블』 1-5, 민음사, 2012.

les는 프랑스어에서 복수형 정관사이고 miserables은 '비참한'이라는 형용사에서 전성된 복수형 명사이므로 '고난자들' 혹은 '불쌍한, 가엾은, 비참한 사람들'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 부분에서 필자는 의문이 생긴다. 원래 사제는 미혼이어야 하고 혼전순결을 유지해야하기 때문이다. 결혼을 한 미리엘 씨가 어떻게 사제가 되었는지 궁금하다.


⑶ 프랑을 사용하기 전 프랑스의 옛 화폐단위, 현재는 당연히 유로를 쓰고 있다.


덧붙이는 글

전영의 :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국어국문학·현대소설비평·동아시아 비교문학 전공이다. 문학박사·문학평론가이며, 현재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의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5년 9월부터 중국 상해 복단대학교 (Pudan National University) 한국어문학과에 교환교수로 1년간 재직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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